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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 | 연재 [여행유감]
으레 그런 제주
제주도
오병현(2020-04-10 11:46:08)



<꽃보다 시리즈>를 비롯하여, <배틀트립>, <짠내투어>,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등 여행을 주제로 한 티브이 프로그램이 쏟아지는 중이다. 이미 레드오션이 된 지 오래인 여행 프로그램이지만, 그 인기는 꾸준하다. ‘먹방’과 ‘쿡방’을 가미한 새로운 포맷이 한몫했다. 한편으로는, 시청자들이 여전히 여행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여행이란 영원히 갈구해야 하는 목마름일지도 모른다.


제주도라 하면, 멀리 뻗은 푸른 하늘과 온후한 기온을 떠올린다. 아쉽게도 그러한 제주도는 그리 많은 날이 못 된다. 제주는 특성이 또렷하다. 바퀴 달린 이동수단으로는 갈 수 없는 곳. 배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하는 곳. 이국의 냄새가 난다.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제주도 이민’과 같은 키워드가 얼마 전부터 화제에 오르기도 했으리라. 제주가 ‘여행’이 아닌 ‘생활’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지만 말이다. 나 또한 깊은 갈증을 느끼는 시기면 잠깐 시간을 내서라도 제주도에 간다.

1월 초였다. 나는 한가한 친구와 함께 자동차 렌트와 숙소만 예약한 뒤 제주도로 향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시기였기에 제주도에 가자는 친구의 말이 달가웠다. 당시 인천은 패딩 안에 여러 옷을 껴입어도 칼바람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추위가 강했다. 몸은 더욱더 제주도를 원했다. 나긋한 제주도의 이미지를 그리며 비행기에 올랐고, 캐리어를 맡기지 않아 빠르게 제주 땅을 밟았다. 아차. 보편적인 제주도의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뿐이라는 점을 잊고 있었다. 제주도 또한 인천과 마찬가지도 칼바람이 불었다. 아니, 바람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더 매서웠던 것 같다. 하늘도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것이 1월 제주도의 첫인상이었다. 인천보다 더한 칼바람. 우중충한 하늘. 제주시 주변으로 이리저리 치이는 자가용들.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한라산이라거나 주상절리라거나 오름이라거나 하는 관광 장소는 여럿 갔기 때문에 2박 3일의 일정은 먹는 행위에 집중하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맛있는 음식은 몇 번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매일 군만두만 먹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먹투어(먹거리 투어)는 요즘 대세기도 하다. 옛날처럼 짜장면이 최고의 외식이 아닌 시대다. 국경 없이 흘러드는 음식과 가정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월계수, 바질, 바닐라 익스트랙. 후추는 이미 한국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향신료가 되었다. 사람들은 맛을 무척 잘 안다. 맛을 잘 알기에 여러 선택지 앞에서 늘 고민한다. 점심시간만 되면, 갈치조림을 먹을지 불고기 정식을 먹을지 파스타를 먹을지 고민하게 된다.



나 또한 제주도에서 먹을 첫 끼를 골똘히 고민했다. 제주 특산물을 두고 갈팡질팡하다 결국 백반으로 결정했다. 시작을 제주도민처럼 하자는 의미였다. 으레 그런 날씨를 안은 채 향한 백반집은… 과연 정답이었다. 제주도산 흑돼지로 만든 제육볶음과 짭조름하게 간을 한 고등어구이는 우리를 제주도민으로 착각하게 했다. 실상 인천에서 온 두 명의 외지인이라 할지라도 그때만큼은 제주 방언을 써도 될 것 같았다. 음식은 그런 힘을 지녔다. 타지에서 자란 재료로 만든 음식은 먹는 이로 하여금 타지 일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남아에서 고수를 즐기고, 한국에서 김치를 즐기는 일처럼 그 지역의 일부분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여행을 떠난 곳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 여행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먹는 행위는 그런 것이다.


점심 메뉴로 정한 전복을 먹기 위해 거친 해안도로를 걷고 또 걸었다. 가려 했던 전복 전문점이 닫힌 것도 모르면서…. 바람이 무섭게 불던 해안도로를 걸으니, 집을 떠나왔다는 생각이 절절했다. 1월의 제주는 찼고, 비릿했다. 바람을 조금 더 맞으며 회덮밥 가게 하나를 찾았다. 가게는 헛헛했지만, 주인아주머니는 따뜻했다. 전복 비빔밥과 성게알 비빔밥을 하나씩 시켜 나눠 먹었다. 오랜만에 날것을 먹어서인지 비린 맛이 강했는데도 계속 수저를 들었다. 전복의 그것과 성게알의 그것이 온전해졌을 때쯤 그릇은 깨끗해졌다. 두 끼를 먹고 나서야 제주도가 실감 났다. 꽁꽁 얼었던 두 귀가 녹아들면서 해안도로의 거친 바람도 점차 느슨해졌다. 대여한 전기차가 충전이 덜 됐을 것이므로 우리는 남은 반찬을 끼적이며 시간을 늘어뜨렸다. 조금씩 해가 들고, 바다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입안에는 아직 성게알의 씁쓸한 맛과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혼나지 않는 시간이었고, 전기차의 완충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었고, 제주도였다.


숙소는 6인실 게스트하우스였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게스트하우스 덕에 방 잡는 일이 어렵진 않았다. 남자 숙소와 여자 숙소, 두 채의 집과 지하로 이어지는 공용공간이 딸린 곳이었다. 매일 밤이 되면 공용공간엔 영화가 상영되고, 영화가 끝나면 게스트끼리 모여 술을 기울이는 곳이었다. 우리 또한 몇 캔의 맥주와 마른안주를 사 들고 지하로 향했다. 우리처럼 둘이서 온 여행객과 여러 숙소에서 며칠씩 묵다 가는 여행객 하나가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같이 술을 마시며, 좋은 카페라거나 아침 식사하러 갈만한 식당 등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곳에서 일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인원이 더 많았으면 좋았겠지만, 충분히 값진 사람들이었다.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에 게스트하우스가 늘어나는 추세다. 방값이 싼 이유도 있겠지만, 게스트하우스는 거짓말이 자유롭다는 이점이 크다. 거짓말이 자유롭다는 말 자체는 이상하지만, 사실이다. 사람들은 감정을 소비하는 데 너무 지쳐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선 나를 숨길 수 있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보여줘도 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타인이고, 언제 다시 볼지, 볼 일이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자유롭다. 살짝씩 과장하며 지난 일을 부풀려도 된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기에 속에 담아둔 얘기를 풀어놓기도 쉽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 관계망에서 우리는 조금씩이라도 가식적이다. 그러나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그들은 오히려 쉽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답을 내려준다. 우리 또한 그들에게 타인이다. 내가, 내가 아닐 수 있는 곳, 게스트하우스는 그런 곳이었다.


새벽 늦게 얘기를 나누다 쓰러지듯 잠들었다. 날이 밝아 으레 그런 게스트하우스를 슬쩍 빠져나오자, 으레 그렇지 않은 제주 날씨였다. 날은 좋았는데, 계획해두었던 식당이 문을 닫았고, 좌회전을 못 해 몇 km을 더 달리던 오전과 오후를 보냈다. 그리곤 제주도에 사는 동네 친구를 만났다. 인천에서 같이 자란 친구였는데, 여타 사정으로 제주도에 터를 둔 친구였다. 먼 시간을 통과한 후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여행지에서 만났다는 생각에… 들떠버렸다. 한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 그렇듯 변함이 없다. 옛날얘기를 나누면서 옛날 통닭을 우적거리는 밤이었다. 우리의 시간은 미래로 향해 가는데, 그날 제주도의 밤은 자꾸 과거로 흘러갔다. 뜬금없이 친해진 일화, 누구와 누가 사귀다 헤어진 일화, 정자에서 술을 마시다 경찰서로 끌려간 사건들이 곱씹혔다. 마지막 남은 모래주머니 튀김을 해치우니 그제야 현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주도민 친구는 내일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아쉽게 보내줘야 했다. EF 쏘나타를 타고 멀어지는 과거. 우리는 몇 병의 술과 도다리회를 사 들고 두 번째 숙소로 서행했다.



도다리는 봄이 제철이라고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도다리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1인분의 도다리회를 먹으며, 한라산 몇 병을 마시며 <8월의 크리스마스>를 틀었다. 남자 둘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남자 둘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술을 마시는 일이 외람된 것처럼 보일 터인데,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영화가 중반에 다다랐을 때쯤 친구는 자라 갔고, 남아있는 회 몇 점을 먹으며 엔딩 크레딧까지 지켜봤다. 조금 취기가 돌았다. 집이었다면, 몇몇 장면을 넘기며 봤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였기에 놓쳤던 장면을 되감아 봤다. 여행을 떠나면 조금 센티멘털해져도 괜찮다. 소설가들이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서, 화가들이 붓을 들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할 거란 생각이다. 집이 아닌 공간은 처리해야 할 일에서 손을 떼도 되는 공간이다. 동사무소에 제출해야 하는 통장 사본도, 제때 치워줘야 하는 고양이 대소변도 없다. 먹은 것들을 간단히 치우는 와중에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내일… 일상으로 돌아간다. 못된 버릇이다.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우울해지는 버릇이 제주에서도 돋아났다. 다행히 침대에선 친구가 코를 골고 있고, 귓속에선 한석규의 내레이션이 되감아 지는 중이어서 덜 슬플 수 있었다.


렌트한 차를 반납하기 위해 채비를 서둘렀다. 여전히 제주시 주변은 자가용들로 붐볐다. 얽히고설킨 자동차들을 뚫고, 무사히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발 셔틀버스에 올랐다. 계획해야 할 일정도, 치러야 할 계산도 없었다. 돌아갈 일만 남았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출국장에서 그럭저럭 비싼 점심을 먹고, 살 것 없이 면세점을 구경했다. 그리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내 방에 대자로 드러눕자 드디어 여행을 다녀왔다. 누가 그랬던가, 돌아와야지 여행이라고. 성하게 돌아오자 여행을 했다는, 나도 모르는 새 갈증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겠다. 갈증이 일어나는 시기가 불규칙하므로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1월 초 비행기 창문 밖 풍경을 되새길 것이다. 그런 풍경이 있어야 일상을 버틸 힘이 난다. 먼 이국의 풍경이 담긴 엽서 한 장씩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떠날 힘이 난다. 버틸 힘이 나는 동시에 떠날 힘이 나는… 그런 풍경. 나를 포함한 우리는 안도하고 싶을 때, 무사하다는 느낌을 받고 싶을 때 여행을 간다. 안전하기 위해서 딴 곳으로 떠나는 모순적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떠나야 한다. 그리고 돌아와야 한다. 헤매고 방황하다가 불 켜진 가게를 발견하여 안심하길 바란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거짓말도 하고, 아슴아슴하게 뜬 석양을 보며 센티멘털해졌으면 좋겠다. 외로울 일 많고, 지칠 일 많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탈은 여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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