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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⑥
스위스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
임안자(2020-06-08 17:30:49)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⑥


스위스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
임안자 영화평론가




바젤의 시립병원에서

1969년 7월 말에 스위스로 들어온 다음 나는 바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예수병원 친구와 약속했던 ‘딱 1년만 일하고 귀국한다’는 계획에 맞춰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바젤시립병원(바젤대학병원의 전신) 이비인후과 병동에 출근했다. 일자리는 낯선 분야였지만 다행히 친구와 같은 곳에 배치되어 일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독일어를 못했던지라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병원 쪽에서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간호사가 모자라서 그랬지 싶었다.


아무튼 처음에는 말이 안 돼서 답답하고 주눅도 들었으나 다행히 병동에는 나 말고도 핀라드, 유고슬라비아, 독일,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외국 출신 간호사와 의사들이 여럿 있었고 모두가 영어를 잘하여 소통 문제는 의외로 빨리 풀렸다. 그리고 환자들도 거의가 영어를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다들 불평하지 않고 나를 너그럽게 받아줘 고마웠다.


하지만 병동의 수간호사는 나를 처음부터 못마땅해 했다. 자그마한 키에다 예순 살쯤 돼 보였던 그녀는 같은 곳에서 몇 십 년을 일해온 수장으로, 매섭고 차가운 성격에다 오지랖이 넓어서 간호사들 사이에서 평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싫어한 이유는 영어를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을까? 내가 하는 일에 자주 끼어들어 잔소리를 하고 환자들 앞에서 꾸짖기까지 했는데 한 번은 곁에 있던 친구가 보다 못해 중간에 끼어들어 ‘통역을 해줄 테니 낮은 말로 문제점을 설명해 주라’고 수간호사에게 사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녀의 잔소리질은 덜해졌지만 스위스에서의 첫 1년은 이래저래 고달프고 허전했다.


 바젤시립병원에서 일주일에 44시간 근무했던 나는 매달 3천 (스위스)프랑의 월급을 받았다. 미국에 비하여 좀 낮았지만 시카고에서 겪었던 교환간호사에 대한 차별 대우가 없었고, 아예 독일과 스위스에는 교환간호사 제도가 없었다. 여하튼 초기에 내가 받은 월급은 중류층 수준으로 일반 공무원이나 개인회사 사원의 수입에 가까웠다. 거기에 매달 지출은 세금과 건강보험비 그리고 기숙사의 방세 정도였는데, 세금은 상당히 높았지만 기숙사비는 월세가 높기로 이름난 바젤시에서도 한 달에 2백 프랑 정도로 아주 쌌다. 그리고 식사비도 스스로 요리를 할 수 있어서 비용이 적게 들었지만, 그 밖의 일상에 필요한 물건 값은 교통비를 포함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이웃나라에 비해 도드라지게 비쌌다.


기숙사에는 한국 간호사가 네 명이 살고 있었다. 다들 근무 시간과 일자리가 달라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씩 돌아가면서 요리를 하여 저녁식사를 같이 즐겼다. 그런 날이면 적은 재료를 가지고 정성 들여 만든 음식들이 식탁에 올랐는데, 누가 요리를 하든 재주껏 노력해도 좀처럼 제맛이 나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김치였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김치는 한국 음식의 기본이다. 그러기에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먹고 싶은, 그래서 좀처럼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먹거리로 다른 국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이다. 특히 외국에서 살다 보면 김치처럼 그리운 음식도 사실 드물다. 김치가 없으면 하다못해 김치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 대리만족을 찾기 마련이지만 그 시절의 스위스에는 배추와 무를 파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러기에 하는 수없이 질기고 야문 양배추로 김치를 담고 주먹만한 크기의 동그란 서양무로 깍두기를 만들어서 먹기도 했지만 도무지 한국에서 먹었던 김치 맛이 나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서 고향의 음식 맛에 대한 향수도 다르겠지만, 나는 어머니가 그리울라치면 김치 생각이 났고 김치가 먹고 싶으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떠올렸던 때가 있었다. 그게 맛의 향수였는지 아니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 김치는 향수병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였다.


그러다가 80년대부터 스위스인들의 동양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반 상점에도 스위스에서 생산하는 배추(보통 중국 배추로 부름)와 무가 팔리기 시작했고, 또 일본, 중국, 타이, 인도 등의 동양 식품들도 잇따라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취리히, 제네바, 베른 등 큰 도시에 한국 음식점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부터 한인들의 고국 음식에 대한 갈증은 그런대로 많이 해소됐다.


바젤에 정착한 지 1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친구와 같이 가야 했으나 반년 전 친구에게 애인이 생기면서 우리의 약속은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친구는 바젤의 전력 회사에서 일하는 20대 중반의 총각과 몇 달 사귀다가 약혼을 했고 그해 겨울에 결혼할 예정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친구는 미안해하면서 바젤에서 같이 남아 살자고 달랬지만, 나는 되도록 빨리 이비인후과 병동을 떠나고 싶었다. 수간호사도 싫었지만 너무 긴 근무시간에 진저리가 났다. 대체로 간호사의 근무시간은 낮과 저녁, 밤 근무로 나눠져 8시간 간격으로 교대를 하기 마련인데, 바젤에서는 간호사 부족 때문이었는지 낮과 밤의 근무로 나눠졌다. 낮 근무는 아침 7시에 시작되어 19시에 끝났고 그 사이 12시부터 15시 30분까지는 점심시간이었다. 3시간 반의 점심시간은 길었지만, 그 시간에 밖에 나가 시장을 보던가 아니면 친구와 커피를 마실 수는 있지만 뭘 배우던가 영화를 보기엔 너무 짧아서 휴식 시간을 그저 낮잠으로 때울 때가 많았다. 사실 하루빨리 독일어를 배우고 싶었지만 점심시간은 너무 짧았고 7시에 퇴근해 저녁을 먹고 나면 언어학원은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한마디로 근무시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하루하루가 너무 싫증 나고 지겨워서 어떤 변화가 절실히 필요했다. 해서 예정대로 한국행을 택했다. 지난 1년 동안 몰아놓은 한 달 휴가를 어머니 곁에서 조용히 보내면서 심신의 피로도 풀고, 앞으로 내 삶을 위한 새로운 계획도 짜고 싶어서였다.

                                        7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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