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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날 것 그대로의 사랑에 대한 신화를 다시 쓰다
사랑이 뭘까
김경태(2020-06-08 17:42:42)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사랑이 뭘까


날 것 그대로의 사랑에 대한 신화를 다시 쓰다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테루코(키시이 유키노)’는 친구의 결혼 피로연에서 ‘마모루(나리타 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허나, 마모루는 자신이 필요할 때만 테루코를 찾으면서 자신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용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오매불망 그의 연락을 기다린다. 먼저 연락을 줄 때까지, 혹은 그를 불러낼 적당한 이유가 생길 때까지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하다. 어떻게든 그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 그의 곁에 머물고자 한다. 급기야 그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둔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테루코는 사랑에 대한 모든 통념들을 뒤엎으며 기존의 로맨스 공식을 여지없이 허물어트린다. 마모루가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연상의 ‘스미레(에구치 노리코)’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눈물을 머금으며 그의 곁을 떠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슬픈 로맨스의 전형은 찾아볼 수 없다. (죽으면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절대 죽을 수 없다!) 가질 수 없다고 그에게 집작하며 그를 파멸로 몰고 가는 섬뜩한 전개도 벌어지지 않는다. 즉, <사랑이 뭘까>는 눈물을 머금고 뒤돌아서는 신파조의 멜로드라마도, 해피엔딩을 기대케 하는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도, 그와 나를 무너트리는 집착과 광기의 싸이코 드라마도 아니다. 사랑을 다루는 익숙한 장르로부터 모두 비껴가면서 우리는 때묻지 않은 사랑의 기묘한 본령을 목격한다. 그것은 모든 계산과 겉치레를 벗어버린 날 것 그대로의 사랑이다. 그 때묻지 않은 사랑은 우리에게 사랑을 대하는 낯선 감각을 선사한다. 그 자장 안에는 영화는 장르적 전회를 이룬다.


돌려받지 못하는 짝사랑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사랑은 받기 위해서 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목적은 단 하나,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머무는 것이다. 애초에 사랑의 목표가 달랐다. 그 사랑의 궁극적 지향점은 연애나 결혼이 아니라 그와의 합일이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독점적인 관계 맺기는 그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가장 세속적인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멀리 돌아가는 다른 방식을 강구한다. 친구 관계로 그의 곁에 머무는 것. 독점적 사랑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물기는 수월하다. 마모루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 고백을 하고서 친구로 지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심지어 그의 행복을 위해 그를 스미레와 이어주고자 애쓴다. 



사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랑은 위험하다. 테루코의 결혼을 앞둔 직장동료는 사랑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경외심을 느끼면서도, 그 사랑의 반사회적 성격을 지적한다. 모든 사람들이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다른 일상을 모두 포기한다면, 세상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사랑이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 한편, 사랑이 본래 무조건적이라면, 그만큼 계급 전복적이다. 실제로 우리는 계급을 초월해 부지불식간에 사랑에 빠질 수 있지만, 사랑 외적인 조건들 때문에 포기한다. 다시, 엄밀히 말해, 우리가 걱정하는 그 날 것 그대로의 사랑, 그 미래가 없는 사랑은 세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영화는 “왜일까? 나는 아직 마모루가 아니다”라고 의아해하는 테루코의 독백으로 끝이 난다. 그 사랑의 목적을 재차 각인시킨다. 원래 하나였던 두 인간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를 찾아 헤맨다는 신화적인 사랑의 부활을 욕망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세속화된 사랑을 각성시키며 날 것 그대로의 태곳적 사랑을 뚜렷하게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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