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87.11 | 특집 [기획시리즈]
井邑詞考(정읍사고)
심인택 전주우석대 교수(2003-09-26 11:00:08)

멋과 흥의 정취가 가장 짙게 베어있는, 또한 그 흐름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전라도.


춘향가 한 대목의 질펀한 흥과 井邑詞의 애닮은 정서가 만나는 이 고장엔 우리가 기억하고 안아가야 할 뿌리깊은 藝와 그 文化가 있다. 그 중에서도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노래가락은 우리 전라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더불어 전국 각 지역으로 널리 퍼져나갔음에 자부심 또한 크다.


물론 우리나라는 古代로부터 고유의 노래가 전해져 오고 있고 멋스럽고 흥겨운 詩談도, 춤도 곁들일 수 있는 가락도 많다. 그러나 그중 몇 곡의 歌詞만 정확히 전할뿐 이름만 전하고 가사가 전해오지 못하고 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예로부터 내려오는 歌樂을 살펴보면서 시대적 문화상황과 맞추어 다시 한번 음미해 보고자 남도음악을 중심으로 한 맥을 정리해본다.


백제시대의 노래는 그 정확한 시대, 작자, 노래의 내용, 노래의 음악적인 형태 등은 알 수 없고 다만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이 전하는 5곡의 노래가 「고려사」악지에 전하고 있으니 <정읍(井邑)><선운산(禪雲山)>,<무등산(無等山)>,<방등산(方等山)>,<지리산(智異山)>, 등이 그 노래이다.


"정읍은 全州의 속현(屬縣)으로서, 그 현인(縣人)이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매, 그 아내가 산석(山石)에 올라 바라보고,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해(害)를 입을까 함을 니수(泥水)에 탁(托)하여 노래하였다 하는바, 전하기는 등점망부석(登점望夫石)이 있다고 한다."(고려사 권71 樂志2)


일반적으로 정읍사를 백제시대의 노래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언제 어떻게 불리웠는지는 뚜렷한 기록이 없지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 107 樂考2에 보면 고려 충렬왕(忠烈王, 1275∼1308년) 때 이혼(李混)이 지은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정읍사는 무고(舞鼓)와 함께 연주되었던 노래이고 이 무고는 이혼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舞鼓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무용으로 이 무고를 하는 중 정읍사를 창사(唱詞)로 불렀기 때문에 정읍사와 무고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무고의 춤사위를 보면,


"무고는 고려 시중(侍中) 이혼(李混)이 영해(寧海)로 귀양가서, 바다에 뜬 나무를 얻어 舞鼓를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굉장하고 그 춤이 변전(變轉)하여, 나비가 쌍으로 꽃을 둘러 펄펄 나는 듯하고 두 용(龍)이 날쌔게 구슬을 가루는 듯하니, 악부(樂府)의 가장 기묘한 것이다. 악사가 악공 16인을 북과 대구(台具)를 받들고, 동편 기둥으로 들어 전중(殿中)에 두고 나오고, 악사는 북채 16개를 안고 동편 기둥으로 북 앞에 놓고 나간다. 여러 무용수들은 정읍사를 부르고 악공들은 정읍만기(井邑慢機, 오늘날 '수제천'이라는 기악 합주곡)를 아뢴다. 무용수 8명씩 넓은 소매로써 좌우로 나뉘어 나와 북 앞에 서서 북향하여 나란히 나아가 꿇어 엎드렸다가 일어나 발을 구르고, 다시 꿇어앉아 좁은 소매로 가른 후 일어섯 춤을 춘다.


다음에 손을 여미고 꿇어 북채를 잡고 손을 여민 채 일어서서 발을 구르며 춤추고 나아가, 좌우가 서로 연하여 좌로 돌아 북을 울려 춤추며 장고쌍성(杖鼓雙聲)과 북소리를 따라 친다. 정읍중기(井邑中機)와 아뢰어 소리가 잦은 즉, 장고 쌍성을 건너 북소리를 따라 정읍급기(井邑急機)를 아뢰면, 악사가 그 절차의 그 절차의 느리고 빠름으로 인하여 한 강(腔)을 건너 박자를 치고, 8명의 무용수는 손을 여미고 서서 발을 구르다가 꿇어 엎드리고 다시 일어나 발을 구르며 물러난다. 음악이 그치고 악공 16명도 북을 거두어 나오고, 악사는 돌아가 북채를 거두어 나온다."(「백제의 가요」. 이병기·백철著)


위의 무고 춤사위 설명 중 정읍만기·정읍중기·정읍급기는 井邑이라는 曲이 慢·中·急 즉 느리고, 중간속도, 빠른 속도의 3형식의 곡이라는 점과 이 曲의 곡명이 '정읍'이라는 점, 또한 무용수가 노래부른 창사가 정읍사라는 점에서 오늘날 전해오는 정읍사의 노래 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舞鼓를 이 혼이 만들었기 때문에 정읍사도 그가 지은 것이라고 추정 할 수도 있지만 정읍 만·중·급과 무용의 作者는 아닐 것이다.


전라북도에 있는 名山 내장산과 그 아래 동네인 정읍의 지명으로 보아 이 노래가 아니고 내장산가로 불리워지다 고려에 와서 정읍사가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다른 백제의 노래가 모두 山의 명칭을 갖고 있는데 반하여 오직 내장산과 위치를 같이하고 있는 정읍의 지명을 선택 한 점에서 그러할 것이라 생각이 된다.


정읍사의 가사가 전해 오기에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정읍과 내장산에 가게 되면 백제의 내음이 아직도 서려 있는 듯, 늦 가을의 정취를 만끽 할 수 있으면 다시 만들어진 望夫石에 서서 멀리 떠난 님을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여인네의 모습도 그려보며, 다시 한번 멋드러진 정읍사의 노래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심인택, 전주우석대 교수



 정읍,  정읍사고,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