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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어머니 나 결혼해요
임안자(2020-11-06 11:44:37)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⑪


어머니 나 결혼해요

임안자 영화평론가



1975년 초봄 어느 일요일에 나는 오랜만에 바젤에서 페터와 만나 점심을 하고는  그의 집 근처에서 라인강을 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가롭게 산보를 했다. 그런데 항상 대화에 적극적인 그답지 않게 그날따라 말이 뜸하길래 내가 무슨 걱정거리가 생겼냐고 묻자 그는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 듯 그때야 빙긋 웃으면서 내 귀에 대고 ‘이제 우리 결혼하자’고 소곤거렸다. 그가 결혼에 대해서 말을 꺼낸 건 그게 처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던 터라서 나는 청혼자의 살가운 말에 끌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인데 우리 그렇게 할까? 나도 당신 좋아해!“(Ich habe Dich gern!)라고 그를 향해 품고 있던 내 느낌을 털어놓았다.


  그 무렵 페터는 2년간 일하던 병리과를 그만두고 두 달 뒤에 에멘탈 지역 랑나우 (Langnau in Emmental) 동네 병원에서 외과 조수로 갈 예정이어서 이왕이면 나도 같이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시기에 나는 신문학을 끝내고 돈이 떨어져 프리부룩의 시립병원 외과병동에서 6개월 계약으로 일을 하면서 일상적인 불어 실습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두 달 뒤에 어차피 계약이 끝나기 때문에 페터가 바라는 대로 같이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5월 초 바젤에서 106km 떨어진 랑나우로 자리를 옮긴 뒤에 페터는 외과 병동에서 그리고 나는 다행히 같은 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에서 일자리를 얻어서 바로 근무에 들어갔다. 우리는 세 칸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저 멀리 푸른 야산을 마주 보는 넓디넓은 전망에다 고즈넉한 주변의 분위기로 새살림을 시작하는 우리에겐 평화롭고 아기자기한 둥지였다. 



(결혼식날 찍은 임안자씨 부부)


  그런데 랑나우에 이사 오고 한 달 뒤에 나는 여든네 살의 아버지를 잃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타계 소식을 받았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뒤였다. 결혼을 앞두고 내가 너무 바쁘고 슬퍼할까봐 오빠가 일부러 장례식을 치르고 알려준 탓에 아버지와  이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중에 새언니한테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가씨 이름을 계속 부르시며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 슬퍼서 울고 또 울었다. 나도 아버지가 무척 그리웠던 때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특히 미국에 살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는 그리움이 더 절실하여 과거에 자주 만나지 못한 데에 후회가 많았다. 그래서 곧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우리는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고 남는 건 내 어린 시절의 몇 개 안 되는 조각난 기억들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는 여름 방학이 되면 나를 며칠씩 아버지한테로 보냈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반가워하고 예뻐했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촌 생활에 어울리지 않게 방에 홀로 앉아서 붓글씨를 쓰고 시조를 읊었는데 어린 내 눈에는 말이 별로 없는 아버지가 어쩐지 항상 외로워 보였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나는 마루에 누워있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아버지의 팔에 눕혀져 있었고 내 옆에 누워있는 아버지가 “청산리 벽계수야”를 조용조용히 읊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날의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몇 안 되는 귀중한 사랑의 징표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임안자씨의 아버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페터와 나는 10월 21일에 결혼을 했다. 서른세 살의 신부와 스물아홉 살의 신랑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날 아침에 종교가 없는 우리는 약간 흥분되어 랑나우 지방행정구역 사무실 쪽으로 산보하듯 천천히 걸어갔다. 우리가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50대의 공무원이 우리를 친절히 맞이한 뒤 조그만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예식에 따라 공무원이 우리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고 그다음에 우리는 금으로 된 조그마한 결혼반지를 왼쪽 넷째 손가락에 서로 끼워주고는 결혼 증명서에 서명을 했다. 30분쯤 걸린 예식이 끝나고 밖으로 나가자 이번에는 젊은 공무원 하나가 내 손에 빨간색의 스위스 여권과 역시 빨간색의 가족 등기부를 건네면서 ‘결혼을 축하하고 스위스 시민이 된 것을 환영한다’며 웃는 얼굴로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외국 출신으로 스위스 패스포트를 결혼식장에서 받던 전례는 1991년으로 끝났다. 그리고 1992년부터 ‘결혼 후 5년이 지난 후에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 계속될 경우에만 스위스 패스포트가 주어진다’)


  우리 결혼식의 증인은 페터의 오랜 친구인 베르너와 그의 아내 클로드였다. 베르너는 화가, 클로드는 도자기 예술 전문가였는데 고려청자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베르너는 이탈리아, 프랑스, 인도, 중동지역의 요리에 능통한 미식가로 ‘한국 음식이 세계에서 제일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한국 음식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우리 넷은 동네 한가운데 있는 전통음식점에서 가을의 특별 요리로 알려진 사냥꾼들이 잡은 싱싱한 노루고기와 뢰스티(감자를 잘게 쓸어 버터에 굽는 스위스의 전통 음식) 그리고 불란서의 고급 포도주로 점심을 즐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스프레소 커피를 주문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음식점 주인이 빨간 촛불이 꽃인 예쁜 케이크를 직접 우리 앞에 갖다 놓으면서 결혼을 축하해 줬다. 뜻밖의 선물에 우리가 너무 감동해서 감사의 박수를 치자 옆에 있던 손님들까지 박수로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라’고 손을 흔들었는데, 그날은 마침 날씨까지 아주 화창해서 마치 온 세상이 우리를 축복해 주는 듯 모든 게 다 아름답게 보였다.    


  결혼식은 아주 만족스러웠으나 내 마음의 한쪽은 서글펐다. 스위스 여권이 주어진 그날 나는 한국 여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잃은 여권을 나는 지금까지도 되찾지 못하고 있는데, 스위스는 이중 여권을 허락하지만 한국은 지금까지 이중 여권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스위스 여권은 나름 편리한 점이 많지만 한국 여권 상실로 흠난 내 정체성의 생채기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물지 않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이름도 바꿔졌다. 내가 결혼할 시절에는 ‘결혼 시 여자는 스위스의 남편 위주의 “성명법”에 따라 무조건 남편의 성을 넘겨받아야’ 했었다. 그리하여 내 패스포트에는 내 이름이 안자 풀루바허-림 (An cha Flubacher-Rhim)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성명법은 2012년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2013년부터는 새로 만들어진 “남녀평등의 성명법”에 따라 남녀 차별 없이 결혼 시 본인이 원하는 성명을 고를 수 있다.)  12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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