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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 | 연재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마지막 수업’과 ‘러빙 빈센트’
스트라스부르와 오베르쉬르우아즈
윤지용(2020-11-06 14:09:22)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 스트라스부르와 오베르쉬르우아즈

‘마지막 수업’과 ‘러빙 빈센트’



기구한 역사를 품은 스트라스부르
프랑스 동북부에 있는 도시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는 독일과의 접경지대에 있다. 도시 동쪽을 흐르는 라인강을 경계로 독일과 맞닿아 있어 강 건너 독일로 출퇴근하는 주민들도 있다는데, 자전거로 20분쯤 걸린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다고 하고 EU의 입법기구인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도 이 도시에 있다.


사실 스트라스부르가 속해 있는 알자스 지역은 역사적으로는 독일의 영토였던 시절이 더 많았다. 10세기 무렵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라 프랑스령이 됐는데, 1871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해서 다시 독일 영토가 되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해 또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이 점령, 1945년 종전 후 다시 프랑스의 영토, 이런 식으로 무려 열여덟 번이나 두 나라가 번갈아 영유했던 지역이다.


스트라스부르라는 이름도 독일어에서 유래했다. 예로부터 이 지역이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요충지에 있다고 해서 독일어로 길이라는 뜻의 ‘스트라세(Straße)’와 도시라는 뜻의 ‘부르크(Burg)’ 합쳐져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 Straßburg)’가 되었다. 프랑스어 발음으로는 ‘스트라스부르’이지만, 현지 주민들 중에는 여전히 독일어 발음으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20세기 초반까지 주민 다수가 사용했던 알자스어도 계통상 프랑스어보다는 독일어 방언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어 교육을 강화해왔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독일어에 능통하고 주민들의 성씨도 독일식 이름이 많다고 한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그러니 스트라스부르는 ‘독일 같은 프랑스’다. 어렸을 때 국어책에 나왔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의 배경도 바로 이곳이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알자스 지역이 다시 독일 땅이 된 1871년 무렵의 이야기다. 독일 당국에 의한 프랑스어 금지 조치가 발효되는 날 선생님이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마치고 칠판에 “프랑스 만세(Viva La France!)”라고 쓴 후 교실을 나간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우리나라의 민족 정서 덕분에 어린 나이에도 무척 감동적이었다. 아마 그래서 교과서에 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의 역사와 현실을 들여다보면 반전(反轉)이 있다. 독일계에 가까운 알자스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은 ‘오랫동안 독일 땅이었다가 프랑스에 뺏겼다가 다시 독일이 되찾았다가 결국 다시 뺏긴 땅’이다. 이들에게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시기는 ‘피점령’이 아니라 ‘원상회복’이었을 수도 있다. 작가 알퐁스 도데는 젊은 목동과 주인집 딸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별>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평소에 프랑스 민족주의에 심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극렬한 보수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감정이입해서 알퐁스 도데를 거짓말쟁이 취급할 일도 아니다. 본래 역사는 객관적이지 않은 법이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 서서 역사를 바라보고 서술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프랑스와 독일은 본디 ‘프랑크왕국’이라는 한 나라였다. 오늘날 스트라스부르를 비롯한 알자스 지역 주민들이 프랑스 땅에서 ‘핍박받는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성당)


노트르담 대성당과 구텐베르크 광장, 그리고 쁘띠 프랑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자 안소니 퀸이 주연한 1950년대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알다시피 파리 세느강의 시테섬에 있다. 그런데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는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의 성당들이 여럿 있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도 파리에 있는 성당 못지않게 웅장하고 유명하다. 첨탑의 놀이가 142미터나 돼서 19세기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었다고 한다. 1015년에 짓기 시작해서 1439년까지 무려 400년 넘게 걸려 지어졌다고 한다. 본래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가 나중에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성당 건물이 몹시 높고 웅장한데다가 성당 주변에 건물들이 많아서 성당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기 어렵다. 그래서 화면에 건물을 조금이라도 더 담아보려고 성당 앞마당에 드러누워서 촬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성당 건물 앞면에 조명을 비추어 화려한 장관을 연출하는 미디어 파사드 공연도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이 구텐베르크 광장이다. 고려에 뒤이어 서양식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Gutenberg)를 기리는 광장이다. 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 출신이지만 금속활자를 처음 만든 곳은 이곳 스트라스부르였다고 한다.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이 구텐베르크다. 동상은 손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종이를 들고 있다. 종이에는 “Et la lumiere fut(그리고 빛이 있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광장에 있는 회전목마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운하를 끼고 있는 쁘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구시가지 서쪽의 운하 주변을 ‘쁘띠 프랑스(Petite France)’라고 한다. 옛날에 이 일대에 가죽을 무두질하는 피혁공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었다고 한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 구교도(가톨릭) 세력이 압도적인 프랑스에서 신교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독일 땅인 이곳으로 피신했고 생계를 위해 가죽 무두질을 했다고 한다. 가죽 무두질이 물을 많이 쓰는 작업이라서 이들이 자연스럽게 운하 주변에 모여 살다 보니 동네 이름이 쁘띠 프랑스가 됐다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 종교개혁가인 칼뱅(Jean Calvin)도 한때 이곳에서 목회를 했었다고 한다. 당시에 칼뱅이 머물면서 설교했던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고흐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

파리 북역(Gare Do Nord)에서 기차로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오베르쉬르우아즈는 작고 한적한 마을이다. 비운의 천재화가 고흐가 짧은 생애의 마지막 두 달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정확하게는 1890년 5월 20일부터 7월 27일까지 70일 남짓이었다. 네덜란드 태생인 고흐는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대도시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전원도시 아를로 옮겼다가 나중에 이곳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와서 생을 마쳤다. 몇 년 전에 인기 있었던 영화 <러빙 빈센트>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그는 오베르쉬르우아즈 읍내의 ‘라부 여관’에 묵으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자살로 생을 마치기 전까지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거의 하루에 한 작품씩 그린 셈이다. ‘오베르 교회’, ‘오베르의 거리’, ‘까마귀 나는 밀밭’ 등 유명한 작품들이 이곳에서 그려졌다. 오베르쉬르우아즈 마을 곳곳에는 고흐의 마지막 숨결이 깃들어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마다 안내판이 서 있다. 고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오베르 교회는 12세기에 지어진 작은 교회당이다. 그림과 똑같은 모습의 교회 입구 안내판에 고흐의 ‘오베르 교회’가 그려져 있다. 동네 뒤쪽의 밀밭에는 지금도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고흐의 마지막 생애를 뒤밟아보려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다는 가난한 화가 고흐가 죽어서는 이 한적한 시골마을을 두고두고 먹여 살리고 있다.


(오베르 교회 앞 고흐의 그림)


한 이불 덮고 누워 있는 형제
아침마다 그림도구를 챙겨 여관을 나선 고흐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고 돌아와서 밤이면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테오는 그의 유일한 벗이자 열렬한 팬이었고 그림도구와 생활비를 대주는 후원자였다.

형의 자살에 상심한 테오는 반년 동안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해서 고국 네덜란드에 묻혔다. 나중에 유족들이 테오의 유해를 형 고흐가 묻힌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옮겨와서 형의 무덤 옆에 안장했다고 한다. 오베르 교회를 지나 밀밭 길로 십 분쯤 걸어가면 마을 묘지가 나온다. 마을 묘지 한편 담장 아래에 고흐와 테오 형제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무덤이 있다. 담쟁이넝쿨이 생전에도 우애 깊었던 두 형제를 이불처럼 포근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고흐와 동생 태오가 나란히 묻혀 있는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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