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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 | 연재 [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난한 사람들>
이휘현(2020-11-06 14:35:34)

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①

 오는 2021년은 도스또예프스키 탄생 200년이 되는 해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인 그는 '시작부터 천재로 인정받으며 결국 생몰 이후에도 위대한 예술가로 인류의 역사에 남게 된 인물'이다. 


그동안 '책이야기' 코너를 연재해온 이휘현 피디가 도스또예프스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도스또예프스키 읽기'를 연재한다. 그의 인생과 집필 연대기를 시간 순대로 되짚어보는 연재물을 통해 독자들도 위대한 문호 도스또예프스키의 삶과 문학세계에 더 새롭게 눈뜰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가난한 사람들>
글 이휘현 KBS전주 PD


-‘새로운 고골이 출연했다’-
1845년 봄, 아마 5월이었을 걸로 추정된다.
러시아의 대도시 뻬쩨르부르그에 살고 있는 한 청년 그리고로비치의 손에는 원고가 한 뭉치 들려 있었다. 그는 네끄라소프라는 청년에게 이 원고 뭉치를 건넸다.
“이 소설 한 번 읽어보게. 아주 물건이야.”
네끄라소프는 당대 러시아 문단에 데뷔해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전도유망한 작가였다. 하지만 원고 뭉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못 미더운 느낌이 역력했다.
“작가 이름이. 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그리고로비치는 자신의 공과대학 시절 친구인 한 무명작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원고를 함께 읽어보자고 네끄라소프에게 제안했다.
그들은 곧장 소설 읽기에 들어갔다. 편지 형식으로 쓰인 중편 분량의 작품이었는데, 그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이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4시. 그들은 잔뜩 흥분한 채 정신없이 거리를 달려 어느 누추한 방에서 잠에 취해 있던 한 청년의 몸을 흔들어 대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청년은, 자신의 인생에 무언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얼마 후 네끄라소프는 당시 러시아에서 비평가로 이름을 날리던 벨린스끼를 찾아 이 원고를 넘겼다. “새로운 고골이 출연했습니다!!”라는 것이 네끄라소프의 전언이었다. 우리에게도 <외투>, <코> 등으로 유명한 고골은 러시아 문단의 최전선에 서있던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그런 고골 같은 작가가 또 나타났다고?
‘웬 호들갑이야…’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벨린스끼는 원고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3일 후 그는 이 중편소설을 쓴 한 낯선 청년을 눈앞에 마주 보고 앉게 된다.
“자네가 도스또예프스끼인가?”
벨린스끼는 스물네 살의 앳된 청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이 청년의 맑은 얼굴을 통해 러시아문학의 어떤 미래를 본 것일까. 이듬해인 1846년 1월 그가 주도해 만든 작품집 <뻬쩨르부르그 선집>에는 이 무명작가의 중편소설이 실리게 된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아울러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이름 또한 러시아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천재 작가의 탄생.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
<가난한 사람들>은 편지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두 명인데, 이웃 사이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4월 8일부터 9월 30일까지 약 6개월간 주고받는 편지가 소설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정확한 연도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설이 쓰인 시기(1844-1845) 즈음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바라보는 관점이 꽤 달라 보이나 어쨌든 둘은 서로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비극의 원인은 ‘지독한 가난’에 있었다.
남자 주인공 마까르 알렉세예비치의 경제력은 바닥이다. 중늙은이에 가난한 말단 공무원인 그는 가진 게 없다. 설상가상으로 낭비벽까지 있어 그나마 조금씩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이웃집 처녀 바르바라의 마음을 사기 위한 비용이나 자신의 치기 어린 감상을 달래는 용도로 곧장 탕진해 버리고 만다. 염치는 있었는지 마까르는 고작 열 몇 걸음 정도면 닿을 수 있는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의 집으로 선뜻 들어서지도 못한다.
의지할 가족 없이 홀로 어렵게 살고 있는 여자 주인공 바르바라가 가진 건 아름다운 미모와 싱그러운 젊음뿐이다. 바르바라는 먼 친척뻘이고 자신에게 헌신하는 마까르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경제적 현실은 그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녀에게 가장 큰 공포는 무엇보다도 가난, 그 지독한 궁핍 자체에 있으니 말이다.
결국 바르바라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부자 비꼬프와 팔려가듯 결혼하게 되고, 정신세계만큼은 그 누구보다 더 높다고 자부하던 마까르는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물욕의 화신에게 떠나가는 그녀를 망연자실 바라볼 뿐이다. 둘 사이의 편지 왕래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는 세상사. 그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진리가 당대 러시아의 암울한 현실과 맞물려 하나의 멋들어진 신파로 탄생한 것이다.


-흥미로운 멜로드라마의 성공 그리고…-
방대한 서사 그리고 인간 내면의 어둠을 끝도 없이 파고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성향 때문에 선뜻 그의 소설에 입문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다 그렇게 ‘심오한 어둠’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참을 수 없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무거움’에 짓눌린 사람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을 추천하고 싶다.
도스또예프스끼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이 처녀작에도 넘쳐나지만, 어쨌거나 이후의 작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작품 속 캐릭터들이 맑고 투명한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중편소설인 만큼 분량도 큰 부담이 없고, 술술 읽힌다는 면에서 도스또예프스끼 입문서로 손색이 없을 듯싶다.


그리하여 당대 러시아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이 젊은 작가의 처녀작에 주목했던 것도 이야기의 깊이보다는 몰입도 즉 ‘잘 읽힌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도록 만드는 게 제1의 목표다. 뻬쩨르부르그의 무명작가가 단숨에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 것도 이 작품이 가진 ‘재미’에 있지 않나 싶다.

그리하여 당대 최고의 멜로드라마 히트작을 탄생시킨 도스또예프스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곧장 후속작 집필에 들어간다.
의욕 충만한 그는 리얼리즘 소설에 가까운 <가난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중편 소설을 하나 기획한다. 그건 고골 풍의 풍자문학과 흡사했다. 이름하여 <분신(分身)>. 이제 이 청년작가는 꽃길만 걷게 될 것인가? 그리고 오랜 시간 자신을 짓눌러 오던 경제적 궁핍을 벗고 큰 명성과 부를 거머쥔 채 훨훨 날게 될 것인가?
그의 문학적 재능이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단 한 번 운 좋게 꽃피웠던 것인지 아니면 그가 정말 ‘제2의 고골’로서의 면모를 가진 것인지는 결국 두 번째 작품 <분신>을 통해 판가름 날 판이었다. 자, 다음에 우리는 그 결과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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