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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베니스에서 신혼여행
임안자(2020-12-03 11:20:13)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⑫


베니스에서 신혼여행
임안자 영화평론가


결혼식 바로 다음날 우리는 결혼 잔치를 일주일 앞두고 밤기차를 타고 베니스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문학 4년 동안에 돈을 아껴 쓰느라 한 번도 여행을 한 적이 없었던 나는 남편이 베니스로 가자고 했을 때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처음 보는 베니스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낭만적인 분위기에다 고색창연한 역사와 문화의 유적 그리고 해상 도시의 찬란한 풍치는 방문자의 넋을 뺐기에 충분했다. 그에다 그 맛있는 음식들! 특히 스위스에서 좀처럼 먹기 힘든 해물요리에 나는 그냥 홀딱했다. 그 대신 남편은 어릴 때부터 이탈리아에 자주 여행을 갔기 때문에 요리보다는 이탈리아의 포도주에 더 관심이 많았고 식사 후에 마시는 그라파(40도의 포도로 만든 이탈리아 화주)를 좋아했다. 그때까지 술을 마실 기회가 별로 없었던 나는 애주가인 남편을 만나면서 포도주 맛을 조금씩 알게 됐지만, 처음엔 뭐가 뭔지 몰라서 맛도 모르면서 그저 멋으로 마셨다. 남편은 병원에서 이탈리아 환자들과 말을 나눌 정도로 이탈리아 말에 익숙해서 아주 편리했다. 하루는 초저녁에 곤돌라를 타고 물 위에서 시내를 구경했다. 남편이 뱃사공에게 인사를 하면서 신혼여행 중이라고 우리를 소개하자 그는 활짝 웃으면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축하의 뜻으로 달콤한 가요를 불러주어 우리 신혼여행의 멋진 추억거리로 남게 됐다. 그런가 하면 하루는 호텔 옆의 음식점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나가려고 하자 멋지게 차려입은 한 중년 남자가 우리 쪽으로 오더니 ‘친구의 결혼 축하파티인데 가지 말고 같이 먹자’며 우리를 식탁으로 초대했다. 그의 극진한 친절에 차마 거절을 못 하고 우리는 초청객들 틈에 앉아서 눈앞에 펼쳐진 맛 좋은 음식과 베네치아 지역의 이름난 술을 즐기면서 잊을 수 없는 쾌적한 저녁을 보냈다. 첫 여행이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대체로 먹고 마시길 좋아하고 인정이 많아서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소통이 잘되고 친절했다. 그 밖에도 이름난 박물관에서 근사한 백화점까지 베니스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곳이 너무 많아서 주어진 짧은 체류기간을 쪼개가면서 발이 부르터 오르도록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시내 곳곳을 구경했다. 



즐겁고 조금은 쓸쓸했던 결혼 축하연
  11월 초 우리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결혼잔치 준비에 들어갔다. 잔치 장소는 랑나우에서 차로 30분쯤 걸리는 구릉지대 불랖바흐(Blapbach)의 산정에 있는 전형적인 엠멘탈의 시골풍 음식점이었다. 11월 첫 일요일 아침 11시에 두 대의 버스가 우리 아파트 앞에 모인 80명의 초청객을 태우고 음식점으로 출발했다. 날씨는 좀 쌀쌀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빛으로 음식점 주위는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날 나는 남편이 베니스에서 사준 검은색의 명주 블라우스에다 어머니가 보내준 빨간색의 긴 비단 치마로 차려입었다. 그리고 남편은 원래 사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날만은 오빠가 결혼 선물로 보내준 옷감으로 랑나우에서 맞춘 양복으로 치장했는데 내 눈에는 모델 못지않게 아주 멋져 보였다. 음식점은 정오가 되자 남편 가족 친척 친지들로 빈틈없이 꽉 찼다. 그러나 내 친정 쪽에서는 아무도 올 수가 없어서 외로웠다.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오빠는 학교 때문에 올 수가 없었는데 시집 식구들도 아쉬워했다. 그런 처지에 다행히 예수병원의 친구 부부와 마침 딸을 방문하던 친구의 어머니가 같이 자리를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조금은 위로가 됐다. 예수병원 친구는 내가 바젤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시기에 사귀던 남자와 결혼하여 첫 딸을 난 뒤였다. 아무튼 그날 점심 메뉴는 칸톤 베른 지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음식으로 알려진 “베른(의) 접시”(Berner Platte)였다. 베른 접시에는 찐 감자, 기름에 볶은 껍질콩, 소금과 초에 발효시킨 얇게 썬 양배추 그리고 여러 종류의 고기 요리였는데, 돼지비계,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척주, 다리, 귀), 돼지갈비, 소고기의 피와 간으로 만든 순대 등이었고 술은 스위스의 불어권 지역 발리스의 포도주였다. 워낙 이름난 음식이라서 그날 점심은 초청객들 사이에 인기가 아주 높았지만 나는 고기들이 너무 기름지고 종류가 많아서 맛만 보는 정도로 그쳤고 남편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초청객들과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점심이 어느 정도 끝나자 커피와 케이크 그리고 쉬납스가 돌려지고 그와 동시에 남편의 친아버지. 의붓아버지, 결혼식 증인 남자친구, 랑나우 행정부의 의원이 우리의 결혼을 위해 축사했다. 축사 다음의 프로그램은 음악과 춤이었다. 남편은 랑나우에 온 뒤 바로 “랑나우 남자 노동자합창단”에 들어가 엠멘탈 지역의 노래를 배우고 있던 중이었는데 페터를 축하하기 위해 20명의 남자들이 자주 들어볼 수 없는 지역의 민속음악을 들려줬다. 합창 다음은 랑나우에 살고 있는 70세의 한스 쉴트의 “스위스 오르겔” 독주였다, 이 악기는 아코데온을 개조한 손하모카로 엠멘탈 사투리로는 ‘쉬비츠욀겔리“(chwyzoelgeli)로 알려졌다. 아무튼 랑나우 출신인 한스는 평생 토목 공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혼자서 손하모니카를 배웠고 퇴직한 다음에는 쉬비츠욀겔리를 스스로 만들어 그 수법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칠 정도로 음악에 몰입했다. 한스의 독주가 끝나자 다음으로 60세쯤의 그레고가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했다. 그도 한스처럼 순전히 독학으로 이름난 연주자가 됐는데 놀랍게도 그는 엠멘탈 지역의 한 농갓집의 머슴으로 일하면서 음악에 열중하여 실력을 쌓았고 나중에는 일본과 캐나다에서 콘서트 초청을 받을 정도로 그의 음악은 널리 알려졌다. 그레고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 계속 궐련을 입에 물고는 스위스의 민속과 대중음악에서 재즈에 이르기까지 악보 없이 연주를 계속 하며 흥을 돋아줬다. 그리고 초청객들은 그의 음악에 심취되어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흥나게 춤을 추며 즐겼고 나는 춤에 엉터리였지만 춤을 잘 추는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했다. 



  결혼잔치 다음날 아침에 외출을 하려던 나는 문 앞에 놓인 아주 큼직한 결혼 축하 케이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비둘기 한 마리와 “사랑 평화 ”(Liebe Frieden)라는 글자가 새겨진 케이크를 보고 축하 카드가 없었는데도 직감으로 누구의 선물인지를 알아 맞혔다. 랑나우에서 그런 선물을 할 사람은 딱 하나였는데 결혼잔치에서 쉬비츠욀겔리를 연주한 한스의 부인 한니로, 내 짐작대로 케이크는 한니가 정성 들여 만든 결혼 선물이었다. 한스와 한니는 남편 여자친구의 시부모로서 그녀가 우리한테 랑나우에 가면 꼭 찾아보라고 해서 알게 됐는데 우리는 대번에 친구가 돼버렸다. 한니는 가난으로 어린 나이에 랑나우 개신교회의 목사 집에서 하녀로 일하다 한스와 결혼한 뒤에 어느 공장에서 잡일을 하면서 조그만 집을 지어 아들 셋을 길렀다. 그녀는 개신교회 신자로서 중년 때부터 동네의 아마추어 연극단원으로 활동하고 70년대에 스위스 전국에 널리 퍼졌던 반핵운동과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항의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리하여 한스와 한니의 집은 엠멘탈 지역을 넘어 여러 곳의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자주 모여드는 토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예를 들어, 독일의 쾰른 지역에서 여성, 평화, 환경운동을 주도하던 신학대학교 여교수이며 시인인 도로테 쇨레(Dorothee Soelle 1929-2003)도 한니 집의 토론에 여러 번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니를 인터뷰하여 글로 발표할 정도로 두 여인은 가깝게 지냈다.


너무나 보고싶었던 가족에게로
  흥겨웠던 결혼의 여운이 아직도 생생하던 1975년 12월 말에 나는 남편의 부탁을 받고 오빠를 도와주려고 한국으로 갔다. 바로 그전에 오빠한테서 받은 편지를 통해  오빠가 위궤양 수술 문제를 놓고 큰 번민에 쌓여 있음을 알게 됐다. 오빠의 위궤양 문제는 아버지의 도박성 때문에 오래전에 시작된 만성병으로, 오빠는 ‘담당 의사가 수술을 권하지만 암인 것 같고 돈이 많이 들어 수술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나를 통해 담당 의사와 전화 상담을 하고 또 의사는 친절하게 방사선 사진을 보내주기까지 했는데, 결국 남편은 ‘담당 의사의 진단이 맞다며 자기는 근무로 같이 갈 수 없으니 나더러 혼자 가서 오빠가 수술을 받도록 도와주라’고 했다. 오빠는 뜻밖에 나타난 나를 보자 ‘하나뿐인 동생의 결혼잔치에 빠져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며’며 감동의 눈물을 글썽거렸고 남편이 나를 보낸 이유를 듣고는 ‘아직 얼굴도 모르는 처남의 정성이 너무 고맙다’며 바로 입원 수속을 마치고 수술을 받았다. 위의 60%가 잘려나갈 정도로 큰 수술이었지만 그 뒤에 오빠는 만성 소화 불량과 통증에서 해방되고 식욕을 되찾아 87세까지 30여 년을 편안하게 지냈다.   
  오빠의 수술 경과가 좋아지자 나는 어머니한테로 갔다. 어머니가 건강 때문에 결혼식에 오지 못해 걱정했지만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다 몸 상태가 훨씬 좋아 보였다. 어머니는 내가 드디어 결혼한 것에 아주 만족해했다. 그럼에도 뭐가 불안한지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시부모는 나한테 잘해주는지를 샅샅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결혼식 잔치 때의 가족사진을 보여주자 ‘착하게 생기고 귀티가 난다’며 귀여운 듯 사진 속의 남편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에 나는 어머니의 호기심을 돋우기 위하여 ‘어머니 사위는 피부가 하얗고 머리는 금발의 곱슬머리 그리고 코가 좀 높고 눈이 파란데 눈이 동양인처럼 작고 길어서 어릴 때는 애들이 “치네세”(중국사람)라고 놀렸대요’라고 남편 얼굴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는 자랑삼아 ‘그 사람은 요리도 설거지도 잘 하고 내 신발을 닦아준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거기는 남자들이 부엌 일도 하냐’며 신기해했다. 그리고는 ‘다 네 복이다’라고 흐뭇해 하면서 ‘그런데 아직 애기 소식은 없냐‘고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내가 아직 없다고 하자 ’나이가 서른셋인데...늦으면 네 고생이니까 서두르라‘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남편이 어머에게 쓴 긴 편지를 어머니에게 한국말로 들려줬다. “친애하는 어머니! 우리는 얼마 전에 결혼을 하고 아담한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결혼식에 어머님이 오시지 못하여 섭섭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가족과 친척들 모두가 어머니의 딸을 아주 좋아하고 아내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저에게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얻었다고 칭찬을 퍼붓는데요. 저는 머리와 감성( Kopf und Herz)이 잘 어울리는 아내가 자랑스럽습니다.......어머님을 뵐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오길 바라며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아들 드림 (Ergebener Sohn). 내 말을 귀담아듣던 어머니는 ‘나도 네 남편을 어서 보고 싶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리 사느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1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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