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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타인을 경유하며 낯선 공간을 이해하는 관조적 자세
나의 인생여행
김경태(2021-01-06 10:18:25)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나의 인생여행


타인을 경유하며 낯선 공간을 이해하는 관조적 자세

김경태 영화평론가



베트남 전쟁 이후의 정치적 격변기를 피해 당시 6살이었던 ‘키트(헨리 골딩)’와 그의 가족은 야반도주를 해서 난민으로 영국에 정착했다. 그 후 30년이 흐른 시점에서 키트는 어머니의 유골을 안고 베트남을 처음 방문한다. 영화는 오프닝 장면에서 수많은 오토바이 무리와 자동차가 뒤얽혀 달리는 혼잡한 베트남의 도로를 부감으로 장시간 보여준다. 저 안에는 이제 막 베트남에 도착한 키트가 찬 택시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피하며 지나가는 그들은 언뜻 보면 커다란 혼돈처럼 인지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에서 고유한 호흡과 유려한 흐름의 질서가 감지된다. 이 시퀀스는 관광객으로서 키트가 타지를 대하는 태도를, 그리고 영화가 타국을 재현하는 자세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관광 명소들을 짧게 훑고 지나가기보다는 삶의 터전을 깊게 응시하는 것.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긴 시간의 관조가 필요하다. 키트는 그곳에서 만난 타인들과 보내는 길고 친밀한 시간을 통해 베트남을 이해하려 한다.


모국에 왔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고 베트남어조차 할 수 없는 키트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다. 부모 세대가 겪었던 명징한 역사적 트라우마는 당시 너무 어렸던 그에게는 쉬이 와닿지 않기에 공간이 주는 정서적 울림은 미약하다. 그는 당시 친하게 지낸 이웃이었던, 친구 ‘리’의 가족을 맨 먼저 찾아가 영국에서 챙겨온 선물을 건네고 어린 시절을 함께 회상한다. 비좁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리는 키트의 어머니에게서 빌린 돈으로 핸드폰 매장을 하며 홀어머니와 어린 딸을 보살피고 있다. 그의 아파트는 키트가 머무는 고급 호텔의 모습과 비교된다. 현재 키트가 애니메이터라는 창의적인 직업을 가지고서 게이로서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건 베트남을 벗어났기에 가능한 혜택일지 모른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쓴 망명을 포기한 리 가족의 비루한 삶은 키트 가족이 베트남에 남아있었다면 가졌을 삶에 다름없다.





또한 키트는 미술관에서 관광객들에게 베트남 미술사를 유창한 영어로 설명해 주는 ‘린’을 만난다. 외국인 큐레이터의 자료 수집을 돕고 작품 해설도 하는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연꽃차를 만드는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보수적인 부모와 대립 중에 있다. 키트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공감하며 그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연꽃을 다듬기도 한다. 리가 그를 과거로 이끄는 안내자였다면, 린은 그에게 신구의 갈등과 조화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베트남의 현재와 미래를 상기시킨다.     






특히, 게이라는 키트의 성 정체성은 베트남을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도록 이끄는 특수한 계기가 된다.

의류 디자이너로 일하며 베트남에 체류 중인 미국인 ‘루이스’를 데이팅 앱을 통해서 만난다. 그들은 성소수자이자 외국인이라는 이중적 이방인으로서의 정서를 공유하며 금세 서로에게 매료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루이스의 아버지가 베트남 참전 용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키트는 가해자의 아들이라는 시점에서 베트남을 돌아보게 된다. 아버지로 인해 루이스에게도 베트남은 트라우마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키트는 그렇게 자신과 더욱 닮아버린 루이스를 경유하며 비로소 베트남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갖는다.


낯선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타인들의 삶을 깊숙이 오래 들여다보면 그 공간은 어느새 익숙한 풍경으로 변해있다. 베트남 현대사의 희미한 자장 안에 있는 키트와 루이스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사랑으로 나아간다. 그들이 함께 하는 베트남의 밤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타인과의 만남이 베트남을 자신과 이어주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돌이켜보니 베트남이 새로운 관계의 매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낯선 공간과 그곳을 채운 새로운 만남들은 그렇게 서로를 익숙하게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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