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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 | 연재 [연재/코로나 시대의 집콕 배낭여행]
유라시아 대륙의 땅끝 호카곶
코로나 시대의 집콕 배낭여행
윤지용 편집위원(2021-05-07 11:44:38)


코로나 시대의 집콕 배낭여행 


유라시아 대륙의 땅끝 호카곶

윤지용 편집위원



[망망한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호카곶]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호카곶은 포르투갈 남서부의 신트라라는 도시 근교에 있는 바닷가 절벽이다. 바다 쪽으로 볼록하게 도드라져 있는 지형이라서 ‘곶’이다. 로마자 표기가 Cabo da Roca이다 보니 ‘로카곶’이라고 쓰는 이들도 있는데, 포르투갈어에서는 R이 [h]와 비슷하게 발음되니 ‘호카’가 맞다.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땅끝이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십여 년 전에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어느 광고 덕분에 유명해졌다. 우리나라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자동차를 배에 싣고 가서 시베리아를 지나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이들이 이곳을 ‘반환점’으로 삼기도 한다.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어 자동차로 한 시간쯤 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신트라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니 두 시간 넘게 걸린다. 막상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다. 망망한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절벽과 언덕 위의 빨간 등대와 비석 하나만 달랑 있다. 그런데 그게 기막힌 절경이다. 거센 파도가 쉼 없이 부딪히는 절벽에 서서 대서양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가 정말 대륙의 끝에 섰구나’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먼 길이 아깝지 않다. 볼거리가 많은 곳도 아닌데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은 ‘관광안내소’가 있다. 이 안내소에서 돈을 받고 ‘땅끝까지 왔다’는 인증도장을 찍어준다. 내가 갔을 때는 10유로쯤이었다.


[루이스 카몽이스의 글귀가 새겨진 비석]


사람 키 두 배가 넘는 비석에는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의 글이라는데,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었던 그 옛날의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이곳이 ‘세상의 끝’이었을 것이다. 바다 너머에는 끝 모를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터이니.


어쩔 수 없이 신항로를 개척하고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국토 면적이 92,090㎢로 땅 넓이 세계 113위다. 우리나라(남한)보다 약간 작은 나라다. 이렇게 좁은 나라인데 동쪽에는 강대국 스페인이 가로막고 있고 서쪽은 대서양이다. ‘이면초가(二面楚歌)’로 고립된 형국이니 바다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뱃사람들과 상인들은 일찍부터 바다로 나아갔다. 중세 이후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에 교역거점을 확보했고 북쪽의 잉글랜드와도 교역 활동이 활발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의 왕자였던 엔히크는 더 적극적인 해양 진출을 시도했다. 우리가 흔히 ‘항해왕 엔리케’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인물의 포르투갈어 발음이다. 엄밀히 말하면 왕이 아닌 ‘왕자’였고 직접 배를 탔던 것이 아니라 국력을 쏟아 항해를 독려하고 후원했던 사람이다. 이때부터 포르투갈은 대서양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해안을 점령해나갔고, 1488년 포르투갈 사람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까지 가서 희망봉에 도착했다. 스페인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보다 4년이나 앞선 것이었으니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포르투갈인 셈이다.


사실 콜럼버스가 자신의 항해에 대한 후원을 먼저 요청했던 것도 해상 진출을 선점하고 있던 포르투갈이었다. 알다시피 당초 콜럼버스의 목적지는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었다. 그는 지구가 둥근 모양이니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에 아라비아반도와 지중해를 거쳐 인도의 향신료를 수입해오던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일부에서는 ‘향료’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후추, 생강, 계피 등 향신료가 맞다.) 그는 1484년에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에게 자신의 제안을 설명하고 후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미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진출했던 포르투갈로서는, 무작정 서쪽으로 가서 인도에 도달하겠다는 발상보다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는 항로 개척이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에서 후원을 거절당한 콜럼버스는 8년 뒤에야 스페인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후원을 얻어내서 선단을 구성하고 항해에 나섰다.


[호카곶의 등대]


한때 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했던 포르투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엄밀히 말하면 대륙이 아니라 카리브해 연안)에 도착한 후 스페인도 본격적으로 해상 진출에 나서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 해상 분쟁이 잦아졌다. 그러다가 1494년에 교황의 중재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 ‘토르데시야스조약’이 맺어졌다. 아프리카 서쪽의 서경 46도 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의 식민지 주도권을 서로 인정한다는 조약이었다. 이 조약을 통해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포르투갈은 아시아 쪽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498년에 포르투갈 사람 바스코 다 가마는 316일의 항해 끝에 인도의 캘리컷에 도달해서 역사에 ‘인도항로의 개척자’로 기록되었다. 왕복 2년이 걸린 이 항해 과정에서 두 척의 배와 수십 명의 선원이 희생되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바스코 다 가마는 이후 두 차례 더 인도를 향했고 인도에서 생을 마쳤다.


포르투갈은 신항로를 통해 인도와의 향신료 교역을 독점하면서 상당한 부를 쌓게 되었고,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동쪽으로 계속 진출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말레카 해협을 지나 중국 땅 마카오와 일본까지 교역로를 개척했다. 1592년 임진왜란을 도발한 일본의 신무기 조총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화승총을 일본이 ‘국산화’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남미가 원산지였던 고추, 밀가루로 만든 빵 등도 포르투갈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었다. 사실 빵의 어원 자체가 포르투갈어 pão인데, 실제로 발음이 ‘빵’에 가깝다.


자국 땅보다 백 배 넓었던 식민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 주도권을 동서로 나눈 토르데시야스조약으로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을 완전히 포기하고 아시아 쪽으로만 진출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조약에서 경계선으로 정한 서경 46도 자오선은 현재 브라질의 수도인 상파울루를 지난다. 즉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브라질 땅은 포르투갈의 영향권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중남미 나라들 대부분이 지난날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오늘날에도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유독 브라질만 포르투갈어를 쓰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자기 나라 땅의 93배에 달하는 브라질을 식민지로 300년 넘게 지배했다. 이 밖에도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인도의 고아지역, 인도네시아 인근의 동티모르, 중국의 마카오 등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면적으로 따지면 포르투갈 본토 면적의 백 배가 훨씬 넘었다.


[리스본에 있는 발견의 탑]


포르투갈은 15세기에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16세기 중반까지 해상강국이었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의 타주강 하구에는 이를 기리는 ‘발견의 탑’이 있다. 거대한 기념비에 항해왕자 엔히크, 바스코 다 가마 등 대항해시대의 선구자들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이웃 나라인 강대국 스페인의 위세에 짓눌렸고 영국, 네덜란드 등이 본격적으로 해상 진출에 나서면서 포르투갈은 점점 그 영향력을 잃었다. 포르투갈이 쇠락한 것은 무엇보다 국력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포르투갈의 인구는 약 천만 명인데 15세기 당시에는 백만 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해상교역과 식민지 경영에 치중하면서 자국 내의 산업 발달에 소홀했다. 본국의 국력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해상 교역로에 대한 장악력과 광대한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자기자본이 없는 사람이 큰 사업을 일으켜서 영위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 아닐까.


호카곶의 절벽에 서서 대서양을 내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유럽 대륙의 가장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 망망한 대양에 가로막혀 고립되었던 그들의 유일한 선택, 짧았던 해상제국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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