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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 | 칼럼·시평
전라도의 긍지와 민족의 긍지
천이두 문학평론가·원광대 교수(2003-12-18 10:46:22)

전라도라 하는 데는 신산(神山)이 비친 곳이라.
이 농부들도 상사소리를 메기는데
각기 저정거리고 잘도 논다.
어이 여이 여이여루 사앙사아디이야아

농(農)이 천하의 대본(大本)이던 지난 나에 있어서, 나라의 곡창(穀倉)이었던, 전라도는 가장 소중한 곳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신산(神山)이 비친 곳으로 여겨졌었을 것인고, 농부들도
한결 흥겹게 상사소리를 메기며 흥에 겨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농부가 뿐만 아니라, 남도민요라 일컬어지는 흥타령, 육자배기, 진도아리랑 등만 하더라도 한국 민요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터요, 특히 민족음악의 정화(精華)라 할 판소리예술 또한 전라도의 비옥한 토양 위에서 온존 육성되어 온 것임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전라도인은 두루 예술에 능하다는 정평이 나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런데 근거하여 전라도를 예향(藝鄕)이라 호칭하는 것이리라. 각 고장마다 그 고장 특유의 개성과 장점을 갖고 있기 마련이요, 이런 개성과 장점을 잘 살리는 노력에 의해서 이른바 지방문화는 탄력 있게 발전되는 것이며,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여러 지방문화가 활발하고도 줄기차게 뻗어나감으로써 민족문화라는 상위(上位)의 문화 또한 풍성하게 형성되어 나갈 것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전라도인은 자신과 긍지를 가지고 우리 자신의 개성과 장점을 살려 나가는 노력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고장의 문화를 가꾸는 일인 동시에 더 넓은 의미의 민족문화를 가꾸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라도인이 전라도 문화를 자신과 긍지를 가지고 가꾸고 북돋아 가기에는 문화외적(文化外的) 조건이 반드시 좋은 편이라 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언제부터인지 <전라도 푸대접>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작금에는 <지역감정>이라는 낱말이 누구의 입에서부터인지 나돌기 시작하여, 이번 대통령 선거의 회오리바람과 더불어 뜨거운 쟁점으로까지 부풀어오르기에 이르고야 말았다. 어느 지역에서는 특정후보를 과반수도 훨씬 넘는 몰표로써 지지를 보내는가 하면, 또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특정후보를 거의 백프로 가까운 몰표로서 지지를 보내기에 이르고야 말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매, 가능하다면 자기 고장 출신의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한다는 것도 반드시 나쁜 일이랄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그래도 그것은 어디가지나 정도의 문제이다. 70프로다 80프로다 하는 단계에 이르면 이는 결코 예삿일일 수 없다. 애향심의 발로라고만 낙관적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지역감정의 문제 운운의 차원을 넘어서서 심각한 민족 전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지 않아도 국토가 양단된 마당에 그나마 남은 반쪽마저 이 지경으로 갈라서게 된다면, 이는 이미 지역감정의 문제가 아닌, 심각한 민족사적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지난 30여년의 우리 역사를 돌이켜볼 때 저어도 민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끊임없는 좌절의 연속이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4.19도 실패요, 80년의 봄도 실패였다. 그런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임한 이번 12, 16의 선거에 있어서의 결과는 오히려 더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패자(敗者)없는 전민족의 승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이다.
사태가 이에 이른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은 무엇이며, 또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이런 문제에 해답을 구하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나는 전라도의 자랑, 전라도의 긍지에 관하여 이야기 해보고 싶었던 것인데 엉뚱히도 정치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패자(敗者) 없는 전민족의 승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 선거의 결과를 앞에 두고 있는 지금, 내가 전라도의 자랑이니, 전라도의 긍지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한다고 할 때, 비(非) 전라도인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일게되기 때문이다. 전라도의 자랑이 전민족의 자랑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전라도의 긍지가 전민족의 民族正氣를 세우는 한 소중한 기틀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마찬가지 이유로서 가령, 경상도의 자랑, 경상도의 긍지가 민족의 우수성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다른 고장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시기와 빈축을 자아내는 요인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또한 어떻게 될 것인가? 전라도의 긍지와 경상도의 긍지가 한 자리에 만나, 민족의 긍지를 드높이는데 창조적인 상승작용(相乘作用)을 하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서로 비웃는 일로써 소모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전라도의 자랑이니 전라도의 긍지니 하는 말을 운운한다는 것이, 오늘의 시점에서 볼 대 지극히 객쩍은 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전라도의 자랑과 경상도의자랑이 각기 그 고장의 자랑이면서, 그런 각 고장의 자랑들의 창조적 상승작용을 통하여 더 크고 더 높은 민족의 자랑 조국의 자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점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민족적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민족적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첫째로 요청되는 것은, 민족 전체가 깊이 참회해야 한다는 사실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감으로써 덕을 보려 한 사람, 실지로 덕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참회가 더 많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앞으로 출현될 정권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나갈지는 모르지만, 이번 사태의 원인(遠因)·근인(近因)을 깊이 헤아려 획기적이고도 근본적으로 이를 치유하는 작업이야말로 지금의 時點에 있어서 소중한 과제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 남원 四판이라, 어이하여 사판인고,
우리 골 원님은 농판이요, 상청(上廳) 좌수(座首)는 뒷판이요,
육방(六房) 관속은 먹을 판 났으니
우리 농부는 죽을 판이로다.
어허이 여이 여루 사앙사디이야

이는 춘향가에도 나오는 작은 농부가이다. 神山이 비친 곳이라는 전라도가 이처럼 <四판> 타령을 하게 된다면 이는 이미 전라도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그것이 오늘의 시급한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민족사의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정권을 담당하는 쪽에서는 이 점을 당대 최상의 민족적 과업으로 설정하고 나아가야 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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