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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 | 연재 [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이 죽일 놈의 사랑|백치
(2021-09-10 10:20:18)



죽일 놈의 사랑

이휘현 KBS전주 PD



하나의 살인사건이 이야기의 변곡점이 된다는 점에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장편소설 <백치> 그의 전작 <죄와 >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살인행위가 작품에 개입하는 방식의 질감은 전혀 다르다. <죄와 >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 계획을 서두부터 공개하며 무시무시한 사건의 이전과 이후의 이야기를 일종의 추리 소설 느낌으로 풀어낸다면, <백치> 작품의 과정에 걸쳐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주다가 거의 마지막에 여자주인공의 피살로 파국의 드라마를 펼쳐낸다. 그런데 살인사건이 전하는 감정의 파장이 어마어마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백치> <죄와 >만큼 탄탄한 서사구조를 보여주지 못한다. 책장을 펴든 순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가독성 면에서도 <백치> <죄와 > 성취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에 기꺼이 투신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백치> 도달했을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세계는 훨씬 풍성해진다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의 여운과 감동은 도저히 감당이 만큼 짙다고. 누군가 나에게 <백치> <죄와 > 하나의 작품을 선택해야 숙제를 건넨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백치> 움켜쥘 것이라고.



사랑을 이야기하다

1866 동안 <죄와 > 집필을 통해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의 자리에 등극한 도스또예프스끼. 그는 2 하나의 장편소설 <백치> 발표한다. 작품은 그의 5 걸작 시기적으로는 번째에 속하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소설을 통해 <죄와 > 성공이 단순한 운이 아니었음을 러시아문단에 증명해내었다. 

그렇다면 <백치> 어떤 소설일까. 어려운 질문이다. 그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하듯 <백치> 또한 다양한 인물 군상이 복잡한 관계와 이야기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곤의 심리학(가난한 사람들), 자기애와 자기모멸(분신), 박탈당한 자유의지(죽음의 집의 기록), 세상과의 단절 그리고 분노(지하로부터의 수기), 도박의 치명성(노름꾼), 윤리와 죄의식의 문제(죄와 ) 방점을 찍어둔 테마들이 작품들에 존재한다는 감안하면, <백치> 또한 복잡한 이야기 속에 오롯이 중심 테마 하나를 숨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얄팍한 소견으로 중심 테마를 끄집어내 보자면, 그건 아마도사랑 아닐까. 적어도 눈에는 사랑이라는 흔하디흔한 감정이 소설의 중심 테마이자 주요 소재로 보인다. <백치> 다양한 인물들은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각자의 색깔을 지닌 본능적인 끌림이 여러 관계 속에서 욕망과 질투, 광기와 집착, 희생과 헌신, 혹은 허영과 절망 등으로 뻗어 나간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도스또예프스끼가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듯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소설 <백치> 사랑이라는 죽일 놈의 감정 특유의 천재적 감각으로 적나라하게 파고든다는 점에서 엄청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그리고 중심 테마를 탄탄하게 받쳐주는 근대화(유럽화)라는 미명하에 급속한 변화를 맞이한 19세기 중후반의 러시아 자체일 것이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격동기 사람을 변하게 하고 윤리라는 관념마저 바꿔버린다. 

젊은 시절 한때 혁명을 꿈꾸었던 청년 도스또예프스끼는 다양한 인생사 곡절을 겪고(투옥과 사형 선고, 시베리아 유형으로 보낸 10, 도박과 외도 그리고 아내와의 사별 등등) 사십 후반의 중늙은이가 이즈음에 이르러러시아적인 강변하는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시선이사랑 테마로 삼은 소설의 곳곳에도 포진되어 있는데, 깊은 이야기는 잠시 미루어 두고 일단 <백치> 어떤 이야기인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백치이야기

이십 중반의 미쉬낀 공작은 몰락한 귀족 가문의 가난한 청년이다. 간질 발작 여러 병마에 시달린 그는 지난 스위스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요양을 해오다 급작스레 뻬쩨르부르그행 기차에 몸을 실은 상태다. 혈혈단신인 그는 뻬쩨르부르그의 친척뻘인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 부인을 찾아간다. 그녀는 뻬쩨르부르그 재력가 예빤친 장군의 아내로 슬하에 결혼적령기에 이른 자매를 두고 있기도 하다. 리자베따 부인 가족은 초라한 행색의 미쉬낀 공작을 시큰둥하게 맞이한다.

한편 나스따시야 필리뽀브나는 어린 시절 불의의 화재로 부모를 잃고 이웃 부호인 또쯔끼 아래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일찌감치 또쯔끼에게 농락당했다. 하지만 속물 중의 속물인 또쯔끼는 결혼적령기를 맞이한 나스따시야를 외면하고 많은 어느 여인과의 결혼을 꿈꾼다. 

나스따시야의 아름다움은 뻬쩨르부르그 사교계에서 항상 위력을 발휘한다.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려 노력하는데 중엔 자수성가한 상인의 아들 로고진도 포함되어 있다. 나스따시야를 향한 그의 사랑은 유난히 맹목적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우연한 기회에 나스따시야를 처음 미쉬낀 공작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는다. 하지만 마음은 여타 남성들이 가진 욕망과는 애초에 결이 다르다. 나스따시야를 향한 미쉬낀 공작의 감정은 일종의 숭고함에 가깝다. 미쉬낀 공작의 심성은백치만큼이나 순결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나스따시야에게 청혼한다. 그러면서 놀라운 소식을 하나 전한다. 미쉬낀 공작의 친척인 어느 대부호가 죽으면서 그에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는 !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란다. 미쉬낀 공작을 향한 태도도 금세 바뀐다. 하지만 나스따시야는부자 미쉬낀 공작 별다른 관심이 없는 보인다. 그녀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청년 로고진과 함께 자리를 뜬다. 

나스따시야를 찾아 떠난 미쉬낀 공작은 개월 다시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온다. 소식이 퍼지자 당연한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중에는 미쉬낀의 친척 리자베따 쁘로꼬피예브나의 막내딸 아글라야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철부지에 가깝지만 명민하고 예쁜 처녀 아글라야는 미쉬낀 공작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 미쉬낀도 아글라야가 싫지 않다. 하지만 사이에는 나스따시야가 여전히 장애물로 자리하고 있다. 나스따시야가 미쉬낀 공작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연적이 아글라야와 나스따시야는 어느 서로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으면서 크게 싸운다. 일을 계기로 그간 소극적이었던 나스따시야가 미쉬낀 공작에게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순결하고 똑똑한 데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처녀 아글라야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불안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나스따시야를 선택할 것인가. 미쉬낀은 헌신의 마음을 담아 가슴 상처가 많은 나스따시야의 손을 잡는다. 하지만 결혼 전날 나스따시야는 로고진과 함께 사라진다. 나스따시야가 로고진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미쉬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나스따시야는 로고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 미쉬낀 공작은 로고진의 집을 찾아간다. 어두침침한 로고진의 안쪽 침실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나스따시야. 그녀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로고진이 그녀의 몸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 로고진은 나스따시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잠든 누워있는 나스따시야.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인다.


완벽한 () 혹은 러시아의 예수

<백치> 방대한 이야기를 개의 문단으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줄거리를 정리하면서 일부러 많은 여백을 남겨두기도 했다. 소설은 직접 책을 읽어야 감동과 전율을 만끽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작품을 만만하게 보면 된다. 쉽게 읽히는 책은 결코 아니다. 요약한 줄거리만 보면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의 하나로 보이겠지만, 안에서는 인간 내면을 향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예리하면서도 복잡한 탐구가 더욱 깊이 있게 진행된다.

우선백치 명명되는 미쉬낀 공작은 도스또예프스끼가 그간 번도 선보인 없는완벽한 ()’ 추구

한다. 살인자와 노름꾼, 협잡꾼, 미치광이, 술주정뱅이, 세상과 단절한 지하인간 온갖 어두운 내면의 페르소나들로 가득했던 문학세계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이 한번 구현해보고 싶었던바보 성자 자체로서 미쉬낀 공작을 창조해냈다. 



속물근성을 가진 예빤친 장군이나 또쯔기(어린 시절 나스따시야를 농락한 부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도스또예프스끼가 그간 소설 속에서 만들어냈던 수많은 악인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구현해 나스따시야와 로고진 사이에서 미쉬낀 공작의 존재가 빛을 발하는 이유이기도 것이다. 미쉬낀 공작으로 인해 소설 <백치> 기존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이 가진 톤을 유지하면서도 나름의 색깔을 뿜어내게 되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감싸 안는 미쉬낀 공작의 박애정신은 2 ()이자 인간이었던 예수의 러시아적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성적(性的) 노리개로 전락했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남자들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나스따시야는 미쉬낀의 그러한 숭고함을 일찌감치 간파한다. 나스따시야는 미쉬낀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를 떠나려 한다. 자신의 해묵은 상처와 분노가 미쉬낀의 순결한 영혼을 더럽힐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자신의 소녀 시절 순결함을 더럽히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스따시야는 미쉬낀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 그의 주변을 맴돈다. 그녀의 순결한 영혼이 미쉬낀의 숭고함을 갈구하기 때문이리라. 가까이 가면 멀리하고 싶고, 멀리 떠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아이러니한 마음 풍경. 나스따시야는 절망스런 상황에서 끝내로고진에 의한 죽음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나스따시야의 죽음, 로고진의 감옥행, 다시 병자가 되어버린 미쉬낀 공작의 모습을 통해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비극들과 달리 <백치> 유독 가슴 먹먹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하는 이유는 숭고함을 향한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 아닐까. 


1868년은백치

<노름꾼> 집필을 통해 인연을 맺고 결혼(1867 2) 이른 도스또예프스끼와 안나는 노름빚 독촉과 친척들의 부양 의무에 시달리다가 유럽으로의 도피행을 결심한다. 계획은 젊은 아내 안나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었다. 이후 그들 부부는 내리 4년간 유럽 곳곳을 전전하며 생활했는데(1867-1871), 시기를 통해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은 안정되었고 문학세계는 넓고 깊어졌다. <백치> 유럽생활 기간 동안 쓰인 작품이다. 그러니까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있어 1868년은 ‘<백치> 기억되어 마땅할 것이다.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리라는 예감은, 이제 타인들의 촉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또한 하나의 확신으로 자리 잡으며 그에게 여러 문학적 야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제 야심을 펜촉으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뒤늦게 근대화 대열에 합류한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백치>라는 방대한 사랑 이야기 속에 19세기 격동의 러시아 풍경을 촘촘하게 박아내었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차기작으로정치(政治)’라는 테마를 자신의 작품 전면에 내세우기로 마음먹게 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걸작 <악령> 그렇게 그의 마음속에 웅크린 세상 사람들에게 선보일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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