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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 | 연재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의 이야기]
전쟁식량 미숫가루의 활약기
마시즘(2022-08-10 11:15:54)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의 이야기 4 미숫가루

전쟁식량 미숫가루의 활약기


마시즘







‘치킨인줄 알았지만 백숙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에 남긴 어느 네티즌의 평이 가슴에 콕 박힌다. 신파적인 요소를 거세하고도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야기, 저 사람이 이병헌인지 최명길인지 모르겠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저조한 관객 수 빼고는 정말이지 완벽한 영화였다. 뭐, 관객수가 벼슬은 아니니까.


딱 하나, 음료적인 표현이 아쉬웠다. 영화 속에 병사들은 “아껴서 먹되, 너무 아끼진 말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식량을 제공받는다. 전쟁통에 남한산성으로 쫓겨 온 그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아니다. 마셨다. 오늘 마시즘은 조선을 넘어 중국, 몽골까지 전파된 전투식량 ‘미숫가루’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다.



조선, 쌀과 가마솥 대신 미숫가루를 챙겨라


김훈 원작의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은 미숫가루 덕후(?)처럼 표현된다. 행장 속에 책과 벼루를 버리고 미숫가루 다섯 되를 챙길 정도니 말이다. 사실 그 시기에는 피난을 가거나, 전쟁을 나갈 때 필수로 챙겨야 하는 것이 미숫가루였다. 마치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하면 우리가 라면을 사재기하듯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쌀이나 찹쌀 등의 곡물로 만든 미숫가루의 시작은 ‘삼국시대’ 정도로 예상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요긴하게 쓰인 기록들이 많다. 특히 조선의 건국 초기 여진족들이 국경을 자꾸 넘나들자 군사들은 미숫가루를 충분히 챙겨서 만주까지 행군을 한다. 밥은 먹어야 하는데, 가마솥을 들고 갈 수는 없으니까. 미숫가루는 간편할 뿐 아니라 한 번 만들어 두면 보존성도 뛰어났다. 1533년에는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나라에서 보관 중이었던 미숫가루를 배급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만선은 이를 들어 ‘한 번 실컷 먹으면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며 과장 아닌 과장을 하기도 했다. 어차피 미숫가루를 마시지 않아도 백성들은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는 시대였다.



중국, 밥 먹을 때는 쳐들어오는 게 아니지


미숫가루는 조선에서만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다. 바다 건너 중국에서도 미숫가루는 요긴한 전투식량이었다. 중국의 이순신이라고 볼 수 있는 명나라의 척계광(심지어 그를 다룬 영화 풍운대전은 중국의 명량이라고 소개된다)은 자신의 병서 ‘기효신서’에서 미숫가루를 왜구 토벌에 기여한 음식으로 표현한다.


16세기 중엽 중국 동남부 해안은 왜구들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70~80명 정도의 소수였지만 빠르게 마을을 약탈하고 빠지기로 유명했다. 이에 명군도 물량전이 아닌 몸이 날랜 소림사 승려들을 보냈지만 일본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래서 척계광이 나서게 되었다. 그는 군기가 떨어진 부대를 정비하고, 일본도에 대비한 무기와 방어구를 만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군량의 혁신이었다. 그는 기동성이 뛰어난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식사 시간을 빠르게 줄이기로 했다. 그래서 배급된 음식이 미숫가루였다. 기동성을 갖춘 척계광의 군대는 5년 동안 중국 연안의 왜구 근거지를 모두 쓸어버렸다.



몽골, 여기 힙한 고려의 가루가 있다


조선과 중국뿐만 아니라 미숫가루를 즐겨 먹었던 곳이 있다. 아시아와 유럽까지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던 몽골이다. 심지어 이름도 ‘미스가라’이다. 다만 음료의 형태가 아닌 버터와 우유를 조금 넣어 뭉쳐먹는 떡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농사가 아닌 유목 생활을 하는 이들이 어째서 미숫가루를 즐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곳저곳 안 쳐들어간 곳이 없는 몽골의 특성 때문이다. 당시의 명나라와 치고받았던 몽골은 1570년에 들어서 문화교류를 시작했다. 약탈보다는 무역을 통해서 얻는 이익이 더욱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족들은 몽골지역에 거주하며 생활용품을 건네어 주었는데 그중에 미숫가루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혹은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냐는 추정도 있다. 13세기 몽골은 고려의 옷과 음식을 따라 하는 ‘고려양’이 가장 힙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숫가루와 이름도 비슷하다(물론 당시는 미수, 미식, 미싯이라고 불렀다). 여하튼 그들이 우리에게 소주라는 문화를 전달해줬으므로 쌤쌤이라고 쳤으면 좋겠다.



미숫가루는 미래형 음료다


미숫가루는 요즘에는 잘 찾지 않는 과거형 음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숫가루가 지극히 미래지향적인 음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미래 식사라고 주목받는 랩노쉬에 들어가는 재료 역시 여러 곡물을 볶고 빻아서 만든 파우더인데, 이 녀석의 필요를 들어보면 미숫가루를 찾았던 이유와 다르지 않다. 시간을 빠듯하게 쓰지 않으면, 도태돼버리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고 미숫가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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