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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헤어질 결심
자기 파멸을 무릅쓰는 사랑에 대한 우화
김경태 영화평론가(2022-08-10 11:37:27)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헤어질 결심

자기 파멸을 무릅쓰는 사랑에 대한 우화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간병인으로 일하는 중국인 ‘서래(탕웨이)’는 남편이 산 정상에서 의문의 추락으로 사망하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일로 치부하며 침착한 반응을 보인다. 이에 형사인 ‘해준(박해일)’을 비롯한 경찰들은 그녀를 용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를 벌인다. 해준은 그녀를 취조하거나 그녀의 일상을 밤낮으로 감시하며 서서히 그녀에게 빠져든다. 서래 역시 여느 남자들과 다르게 자신을 ‘품위’있게 대하는 그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해준과 서래는 취조의 형태로 대화를 나누면서 비관습적이고 비규범적인 친밀성을 쌓아간다. 물론 애초에 그들은 친밀한 교류를 목표로 서로를 배려하는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형사와 용의자라는 각자의 위치는 성적 긴장감을 배제한 채 서로를 냉정하게, 나아가 적대적으로 대하도록 가정한다. 특히 형사는 용의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피의자로의 전환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해준은 서래를 심문하고 의심하면서 그녀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 서래는 해준의 친절에 마음을 놓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해준의 의심은 진술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심리적 기제가 아니라 서래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는 계기이다. 또한 그녀의 진술이 거짓이라도 상관이 없다. 진실은 아니더라도 상대방에게 가닿기 위한 진심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문과 진술의 상호작용은 그저 그들이 친밀해지는 의례적 과정으로서 유의미할 뿐이다. 영화는 잠복하는 해준이 수시로 그녀의 공간 안으로 침투하거나 그녀의 일상에 개입하는 상상 장면을 통해 그들의 심리적 근접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나아가 실제로 서로의 집을 번갈아 방문하고 점유하면서 각자에게 부과된 임무와 역할을 초과해서 서로의 삶에 개입한다. 


해준과 서래는 너무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기에 형사와 용의자 관계가 아니었다면 마주 앉아서 내밀하게 소통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계층/계급과 편견을 비워낸 비개인적인 조우이다. 또한 형사가 아닌 이상, 잠복근무라는 형태로 누군가를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진득하게 관찰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개인의 역사로부터 벗어난 주체의 오랜 응시에서 기원한다. 결국 해준은 남편의 죽음을 자살로 종결 짓고 서래를 무혐의로 풀어주는 실수를 범한다. 그의 말대로, 그는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치고, 형사로서의 자아는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그런데 원래 사랑이란 자신의 견고한 틀을 무너트리고 깨트리는 것 아닌가. 사랑에 빠진 이는 모든 법과 도덕률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자기 파괴적이다. 그리하여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그의 선언은 진심 어린 사랑 고백에 다름없다. 그때부터 서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해준의 부인인 ‘정안(이정현)’은 그에게 금연을 강요하고, 그와의 섹스를 정기적으로 하는 운동으로 취급한다. 금연과 섹스는 사랑이 아니라 오롯이 그들의 건강을 지향한다. 그리고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은 담배를 밖에서 피우라고 말하지만, 해준은 그녀가 피우는 담배의 재를 대신 털어준다. 이처럼 해준은 그녀의 흡연을 막거나 불쾌해하지 않으면서 그 고유한 세계에 기꺼이 동참한다. 반면에, 서래는 죽기로 결심한 후에야 비로소 해준에게 첫 키스를 한다. 죽음을 끌어안은 키스는 삶을 향하는 섹스보다 강렬하며 그만큼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사랑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것이며 그 극단에 자기 파멸, 즉 죽음이 기다린다.

 

해준은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을 살해한 범인을 검거한 후에도 끝까지 서래를 의심한다. 이제 그 의심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된다. 서래는 죽음을 넘어 죽음의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행방불명을 통해 해준의 미결 사건으로 남고자 한다. 그것은 그녀가 해준의 의심/사랑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그 모든 감정을 벗어 던진 사랑에는 누군가를 간절히 향하는 마음이라는 원형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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