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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3 | 칼럼·시평 [문화칼럼]
<저널칼럼>땅은 살아 있고 땅도 말을 한다.
최창조 (전북대 교수·지리학)(2003-12-18 11:52:04)


 우리는 전통적으로 하늘과 땅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유기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땅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땅이 살아 있는 어떤 무엇이란 뜻이다. 이것은 별것이아닌 듯하지만 실은 상당히 심오한 철학을 내포한 얘기다. 살아 있는 그 무엇은 함부로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죽은 것은 무엇이든 보기가 끔찍하다. 길 가에 차에 치인 쥐의 시체를 봐도 마음이 평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삽질을 하닥 삽날에 두 도막이 나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봐도 죄책감을 느낀다. 하물며 사람의 시체를 봤을 대의 심정은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으로는 턱에 차지를 않을 정도이다. 등골이 오싹하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서며 힘이 몸 전체에서 일시에 달아나버리는 참담한 기분을 느낀다.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 땅 위에 살다가 땅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땅은 좀 과장하자면 사람 그 자체이다. 땅을 딛고 서지 않으면 불안하다. 다리 위에서 고층 빌딩 우에서 그네 위에서 그리고 비행기 위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몸의 일부를 떼어 놓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의식주의 어느 것 하나 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땅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땅을 땅으로 대접하는 세태가 희미해져버렸다. 땅은 흙과 돌덩어리의 집합체, 돈 덩어리 정도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땅이 유기체로 보일 까닭이 없다. 특히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땅도 마찬가지로 생명처럼 고귀한 것으로 비쳐지지가 않는다. 또 남의 돈은 아까운 줄 모르는 것처럼 남의 땅을 이용하는 사람도 그 땅을 천하게 다루는 습관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투기꾼이나 국토 개발 정책 담당자들을 두고 하는 얘기다. 투기꾼에게는 땅은 불로소득의 돈같은 존재일 뿐이고 개발꾼에게는 남의 돈 같은 땅일 뿐이다. 한갖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고 방식으로 땅을 대하니 땅이 견디어낼 재간이 없다 .불도우저로 산을 밀어내고 포크래인으로 도려내고, 돌을 터뜨리고 깨뜨리고, 이런 난리가 없다. 요즈음 세상에 땅에 손을 안대고 살아갈 수는 없다. 이건 땅을 사람에 비유하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옛날에는 수술이란걸 몰랐다. 그러나 요즘에는 별별 수술을 다한다. 땅도 마찬가지다. 개발을 수술에 비견시키면, 그렇게 제멋대로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수술을 받을 때 얼마나 재는 일이 많은가. 해도 괜찮은지. 그냥 놔둘 수는 없는지, 부작용이나 후유증은 없는지, 그런 조사를 다 해 놓고도 본인과 보호자의 승낙을 받아야 수술에 들어간다. 땅은 어떤가. 별로 심각하게 따져보지도 않고 사람으로 치면 큰 수술인 과감한 개발에 들어가 버린다. 얼마나 후유증과 부작용이 심하겠는가. 땅이란게 워낙 덩치가 크고 참을성도 많고 심성이 넓어서 아직까지 견뎌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6.25전에 산소자리를 잡았어야 했을 것이다.


 요즈음 심한 오해를 받고 있는 풍수지리를 실은 우리의 전통 지리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리산 땅의 이치를 알아보자는 학문으로 우리의 지리학 그러니까 풍수지리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땅을 정말로 사람 대하 듯 한다. 땅의 얘기를 듣는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직접 땅에 묻는다. 그렇게 하여 좋은 땅을 고른다. 혹시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땅을 쓸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땅에다 약을 쓴다. 풍수에서 말하는 裸補라는 것인데, 효과가 그럴 듯하다.

 

 필자는 바로 그런 지관 한 분을 모시고 전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 어른의 입을 빈 얘기였지만 땅이 하는 말이라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전주 땅은 몹시 피곤해 있다고 하였다. 쇠약해졌다는 것이다. 다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나마 전주가 다른 그만한 도시들보다는 덜 나빠진 셈이라는 점, 그러나 그 도시인들 내 나라 아닌 곳 없을 바에야 그런 생각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전주는 피곤하다. 승암산이 結居·束氣하여 도읍터를 만들 참에 그 기맥을 끊어 놓았으니 숨이 막힌다." 한벽루 바로 뒤에 뚫린 철길의 터널을 말함인 듯하다. "게다가 이제 세월이 흘러 한숨 돌릴 만한데, 느닷없이 목에 굵은 줄을 늘여 놓았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건 철길을 걷어 낸 뒤에 그 앞에 놓여진 다리를 한탄함이다. 목줄을 끈겠다고 하필 그 자리에 굴을 뚫은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짓이니 그렇다치더라도, 왜 바로 그 수려한 한벽당 앞에다 멋없는 다리를 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벽당, 승암산, 교동의 地神에게 물어 볼 여유는 없었을까. 그것이 허튼 말처럼 들린다면 보다 유식한 표현으로 그 다리 立地의 불합이성을 논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여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 봐도 너무나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가까운 거리에 그토록 수려한 경관과 문화재가 어우러진 빼어난 경치를 어디가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좋은 한벽당에 뒤에는 왜놈이 뚫어 놓은 굴이 시커먼 입을 버리고 있고, 앞으로는 베잠장이에 넥타이 매어 놓은 것 같은 다리가 놓여졌으니 그 꼴이 가관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왕 왜놈들이 버려 놓은 것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정말 무신경한 도로 개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름 밤 천변 평상에서 오모가리 매운탕에 소주를 마시던 날들은 이제 다시 오기는 어렵게 생겼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에 술맛도 같이 달려가 버렸으니 말이다.

 

"건지산은 모든 기록이전하는 바 전주의 진산이다. 그러니까 전주의 얼굴이다. 그 이마를 훤하게 벗겨 짐승 똥 오줌으로 개칠을 해대더니, 이제는 콧잔등에 놀이터인지 운동장인지를 만든다. 면도를 하여 허여멀끔한 미남자를 만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이 생각을 좀 해주어야 될 일 아닌가. 전주는 새파란 젊은 나이의 도시가 아니다. 연륜이 지긋한 주후·관화의 땅이다. 그러니 그 얼굴인 진산은 당연히 수염을 길러 오히려 경박성을 없애야 순리인 것이다. 여하튼 전주는 부끄럽게 되었다."

 

 건지산 일대를 가볍게 생각하고 개발해버린 결과가, 그 땅으로부터 이런 불평을 해대게 만든 것이다. 그곳은 조선 왕조의 깊은 설화가 담긴, 가벼이 동물원이나 놀이터로 만들어버릴 땅이 아니다. 나무를 심고 가꾸어, 옷을 해 입히고 수염을 길러 주어야 한다. 후덕한 할아버지의 풍모가 나게 만들었어야 할 산이다. 풍성한 나무 숲이 현대의 전주 시민들에게 나쁠 일이 무엇이겠는가. 구경도 운동도 놀이도 필요하다. 그러나 다 그 기능에 맞는 땅이 있는 법이다. 운동은 종합운동장에 적절히 수용할 수 있고 놀이는 시내 여러 곳에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며, 동물원은 황방산 넘어 서고사 아래 만성동 일대가 적격일 것이다. "공업단지는 왜 하필 지금의 자리인가. 그곳은 전주 코 앞인데, 그렇게 코 앞에서 연기를 내서야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엉덩이 뒤쪽에 두어야 냄새도 안나고 등도 따뜻할텐데, 그저 손쉽다고 그래 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벌판이란 터가 넓고, 전주·이리·군산을 잇는 연담도시권이니까 그곳에 잡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할테지만, 겨울철 공단의 연기가 어디로 날아 오는지를 살펴 볼 일이다. 산업 기반 시설을 설치하는 일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다. 공업 외적인, 경제 외적인, 그리고 뭔지는 모르지만 어뚱한 이유에 의하여, 땅을 혹사해가며 억지로 자리를 잡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대로 땅을 유기체로 생각한다면 땅에 대한 모든 몹쓸 짓은 불식될 수 있다. 땅은 살아 있고 말도 한다. 못 믿겠으면 산에서 조용히 하루 밤을 혼자서 보내 볼 일이다. 틀림없이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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