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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 | 인터뷰 [문화를 짓는 사람들]
순간에서 영원을 혁명해내다
사진작가 박승환
문신 편집위원(2023-03-16 11:11:25)



순간에서 영원을 혁명해내다


문신 편집위원









“저는 피사체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진 찍을 일이 있으면 그 대상을 꼼꼼하게 공부하죠.


내가 찍고자 하는 대상과 친밀해져야 

비로소 카메라를 들 수 있어요.”


카메라는 사라졌지만, 사진은 쉬지 않고 생산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일견 모순이다. 카메라 없는 사진이라니! 그러나 이 주장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사진이 카메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 그리고 카메라는 사진에 자유를 주었다는 것. 아날로그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 사진은 아무나 찍을 수 없었고 카메라는 아무 때나 가지고 다닐 수 없는 비싼 장비였다. 그랬다. 그 시절에는 카메라가 하나의 멋진 장비였다. 세상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장비. 그러다가 일회용 카메라가 보급되었고, 이후에는 일명 디카를 거쳐 지금은 카메라라는 장비를 몇몇 마니아층을 제외하면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사진은 쉬지 않고 생산되고 유포되고 소비된다.





사진_혁명을 작당하다

사진이라는 말. 이 말에서는 지나간 냄새가 난다. 이 말에서는 한 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고, 이 말에서는 언젠가는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귀향의 감정이 묻어난다. 한때 우리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처럼, 한때 우리가 만난 적 있었다는 기억처럼, 사진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자꾸만 머물러 있다는 말을 좋아하게 된다. 무정하게 흘러 가버리는 것 사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를 혁명하려는 은밀한 작당 같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혁명의 작당 같은.


이것이 박승환 사진작가(전주대 교수·시각디자인학과)를 만났을 때 빠르게 머릿속에 인화된 생각들이다. 봄이 아직은 멀리 보이는 날이었다. 전주 서학동 작업실에서 만난 박승환 작가의 이미지는 낯익었다. 어느 자리에서 마주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저만치 스쳐 가면서 무의식에 서로의 인상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사진에 취미가 생겼어요. 그래서 남대문 근처 사진 학원에 두세 달 정도 다녔습니다. 거기서 사진을 시작했죠. 학원 출신 선배들도 많았어요. 그분들이 대개 잡지사에 근무했는데, 출장을 가거나 사진 찍을 일이 있으면 아르바이트 삼아서 많이 쫓아다녔어요. 선배들에게 사진도 많이 배우고. 그게 사진에 발을 들인 계기였어요. 그러다가 군대 갔다 와서 형님 소개로 충무로에 있는 광고 사진 회사에 다녔어요. 회사에 다니면서 늦게 대학에 진학했는데, 학업과 일을 병행했죠. 그때 행사 사진이라든가 인터뷰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사진에 대한 최초의 충격은 형의 친구에게서 받았다. 특이하고 특별한 재주가 있던 그 형이 보여준 얼렁뚱땅 사진 인화 기술을 보고 작가는 사진의 매력에 빠졌다.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형이 커다란 양은 밥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전구를 넣어 사진을 인화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지만, 그때의 강렬했던 사진에 대한 기억이 지금까지 사진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주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다.


사진이 귀하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1970-80년대만 해도 카메라는 특별하고 비싼 물건이었다. 각급 학교의 졸업식을 비롯하여 중요한 행사에는 사진을 전문으로 찍어주는 일명 ‘사진사’ 아저씨들이 있었다. 사진사 아저씨에게 사진을 찍고 주소를 적어주면 며칠 내로 사진이 배달되었다. 현상소에서 카메라를 빌려 가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카메라는 지금처럼 자동으로 조리개와 셔터를 조절하는 기능이 없었다. 현상소 주인은 맑은 날이면 ‘맑은 날’로, 흐린 날이면 ‘흐린 날’로 카메라 버튼을 조작해서 주었는데, 중간에 날씨가 바뀌게 되면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을 얻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런 이유로 사진 예술은 종종 기술적인 걸로 치부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사진은 사람의 영혼과 카메라의 기능이 만나 피사체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예술이다.


“사진에서 중요한 게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누구는 빛이라고 하고, 누구는 구도라고도 하지만, 저는 사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대상입니다. 피사체죠. 그렇다고 피사체의 모양이나 형태가 중요한 게 아니라, 피사체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진 찍을 일이 있으면 그 대상을 꼼꼼하게 공부하죠. 가령 전통시장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카메라 들고 시장으로 곧장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냥 장 보러 나온 사람처럼 며칠 동안 시장을 느끼고, 시장에 온 사람들을 사귑니다. 그렇게 내가 찍고자 하는 대상과 친밀해져야 비로소 카메라를 들 수 있어요.”


박승환 작가에게 사진은 상담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피사체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피사체의 본질을 끄집어냄으로써 비로소 물질과 형상에 갇혀 있는 피사체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래서 사진은 한 컷의 ‘순간’에서 한 존재의 ‘영원’을 발굴하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컷_아는 눈, 보는 카메라

표현하는 일은 대상을 보이는 대로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그것의 본질이 뭔지 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표현은 곧 앎이고, 알아야만 진짜를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오랫동안 예술 영역에서 강조했던 명제다. 사진이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다.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보이는 만큼만 우리는 안다. 박승환 작가의 사진 작업에서 특별히 ‘앎’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일기획에서 광고 사진을 찍을 때, 그는 상품을 찍으러 현장에 가는 게 아니라 그 상품을 제대로 알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풀무원이나 동원, CJ 식재료 사진을 찍었거든요. 마트에서 가면 식재료 앞에 걸어놓은 사진 있잖아요. 그건 순간적으로 소비자들 눈을 사로잡아야 하는 거예요.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진이죠. 그래서 단순히 사진만 찍는 게 아니라 감각적으로 신선하게 보이도록 재료를 배열하고 만지고 다듬어야 해요. 그걸 하다 보니까 식재료를 먹거리가 아니라 볼거리로 보게 되었어요. 버섯이나 야채 등을 볼거리로 접근하니까 너무 예쁜 거예요. 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색조의 색감이 깊이 있고 뭔가 색다르게 보였던 거죠.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식탁의 정원’ 같은 제목으로 시리즈 전시를 많이 했어요.”


그의 설명을 듣다 보면 사진이라는 영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도 있는 세계라는 걸 알게 된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되는 상업 광고 사진도 소비자의 욕망과 감각을 자극하는 세심한 연출이 필요하고, 그걸 한 컷의 이미지로 만들어내기 위해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진의 첫 번째 작업으로 작가는 리서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학생들에게 사진 강의를 하면서도 사진을 찍기 전에 대상 연구를 우선으로 작업한다. 그럴 때 사진의 결과물은 한 장이지만, 과정에서 사진보다 더 결정적인 순간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 장의 사진에는 이러한 맥락들이 반영되기 때문에 최근에는 사진 치유, 즉 포토테라피도 중요한 사진 작업이 되고 있다.


“졸업생 중에 아버지가 중학교 선생님이었던 친구가 있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사진과에 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당연히 관계가 서먹서먹했죠. 그런데 이 친구가 4학년이 돼서 졸업작품 상담을 하는데, 아버지를 찍고 싶다는 거예요. 평소 대화도 없던 아들이 아버지를 찍겠다고 하니까 아버지도 뜨악했을 거예요. 그래도 이 친구가 아버지 학교에 가서 수업 장면도 찍고, 아버지 동아리 활동도 찍고, 아버지가 다니는 봉사활동도 사진으로 찍었어요. 몇 달을 아버지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다 보니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해요. 아버지도 아들의 사진 작업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자지간이 훨씬 가까워졌어요.”


포토테라피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기도 하다. 옛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포토테라피에 해당한다. 좋은 곳과 좋은 사람 그리고 좋은 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 자체가 치유 활동이기도 하다. 사진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고 감정을 회복하는 영역을 아우르는 예술이라는 것. 사진은 알면 알수록 미궁을 헤매는 기분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장의 사진에 담겨 있다는 걸 박승환 작가의 설명을 통해 간신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박승환 작가는 20세기에 작업했던 작품을 21세기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신문 광고를 오려낸 작품을 하나씩 넘겨보면서 박제된 시간을 현재로 소환하는 중이다. 처음 출시되는 이온 음료 광고 사진에서 분출하는 물 이미지는 여전히 생동감 있었다. 이러한 작업뿐만 아니라 2008년부터 이어온 전주국제사진제도 좀 더 다양한 기획으로 지역 주민들과 만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파괴된 도시에 조화(造花)를 얹은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폐허의 자리에 인공의 꽃을 놓는 작업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사라진 시대의 이미지다. 그의 작업은 사진 예술의 본질을 구체화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기획이 시대의 감수성을 재해석해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탈바꿈해내는 작업이야말로 작은 혁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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