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88.6 | 특집 [특집]
<저널특집>백제기행우리는 녹두새를 보았다.
이병천 소설가(2003-12-18 14:10:16)
백제기행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큰 희망으로 여긴다. 끝없이 펼쳐진 논과 들, 산과 바다에 우리가 꿈꾸어 온 역사와 노래가 살아 숨쉬고 있으며 이 땅을 함께 딛고서 있는 공동체임을 뿌듯하게 자각하기 때문이다. 문화저널이 실시하는 백제기행은 지나간 시대의 유적지를 찾아 헤매는 한가로운 여행이 아니고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땅 한반도를 절실하게 둘러보아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우리 시대와 우리 삶에 환원시키고자하는 눈물겨운 바램에서이다. 제1회 백제기행 특집은 소설가인 이병천씨가 다루어 주었다. -편집자 주- 그날의 들불처럼, 천지사방에 봄빛이 지펴져 있던 지난달15일 우리 일행 서른 한 명은 낡고 털털거리는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제1회 백제기행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아침 8시에 전주백화점 앞을 출발하기로 했던 버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두 사람의 무례 때문에 30분이나 늦어졌지만 늦어지는 것이며 고물버스가 아무래도 무슨 대수랴.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우리는 지금동학의 유적지를 따라 녹두새를 찾으러 간다. 버스 안의 분위기는 그 사명감과 크고 숭엄했던 당시의 뜻을 생각하며 혁명정신의 무게에 압도됐던 때문인지 맑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러울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그 꼬리만 만져본다고 해도 천삼백삼십년을 거슬러 올라야하는 저 역사 속의 푸르게 잠자는 백제, 그 위에 어떤 왕조가 다시 들어서고 무너지고 또 들어서기를 반복했든 우리는 모두 백제의 이름으로 하고 그것을 찾아나선다. 그렇다면 이 땅의 우리에게 백제는 무엇인가·성급할 필요도 없이 앞으로 계속될 백제기행에 무엇이든 드러나고 그것이 우리 가슴에 언젠가는 전성시대의 왕초처럼 굳건하게 정립될 터이지만 어쨌든 채1회 백제기행은 동학혁명의 중량감과 함께 조금은 무겁게 시작되고 날이 차츰 대낮쪽으로 밝아지면서야 비로소 일행들의 마음도 서서히 풀어졌던 것이다. 버스가 아마도 동학농민군들이 전주 입성을 위해 마지막 인원점검을 하고 심호홉을 가다듬었을 금구쯤에 이르렀을 때 차례로 각자자기 소개가 있었다. 인원 점검이라고 했지만 군대는 출전을 앞두거나 상황이 끝났을 때에는 어김없이 그런 것, 점고(點考)를 한다. 변(卞)군수가 남원땅에 당도하자마자 실시했던 기생점고가 그것이었고 조조장군이 적벽강에서 물러나면서 했던게 또한 그것이었다. 아아, 그날의 삼월(三月)이며 춘월(春月)이며 미회·인숙이, 그리고 덜레뱅이 ·곰배팔이 ·재규 ·지철이 ! 우리들 자신의 점고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나는 잠시 농민군들의 점고 마당을 상상해 보았다. 선돌(立石)의 황바우 ·뱁새 ·코훌째기도 왔고 지금실의 박서방 ·육손이 ·덩쇠 ·강장사도 자기들 선조 때부터 길러온 뒤 울안의 대나무를 예리하게 깍아들고 왔다. 불쌍한 것, 새터의 서운이는 장(大)독에 부풀어 죽은 즈이 남편을 묻어주지도 못한 채 남장으로 변복하고 따라나섰으며 부평(富平)의 이 영감은 굶어 죽은 제 손자를 무슨 점심 샛거리 주먹밥이라도 되는 양 괴나리 봇짐으로 싸들고 왔다. 역사는 흘러, 우리들은 대부분 전주 근방에서 모였는데 멀리 해남에서 왔다는 여선생님도 있어서 죽창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환대를 받았다. 솥 뚜껑을 운전하거나 바늘로 자박자박자박 혜진천을 기우며 신부수업을 한다는 사람, 국토방위, 교육현장의 역사며 국어 선생님들, 학생,시인, 수필가, 화가들,방송인, 기자, 대학 교수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차안에 와 있었다. 방송인 안 모국장은 사윗감이나 며느릿감을 고를 속셈으로 아들과 딸을 다 데리고 왔노라고 내숭을 떠는 바람에 모두 웃었지만 우리는 안다. 그 날의 흰 옷 입은 농민군에도 그러한 제폭구민군 ·보국안민군 ·척양척왜척화군이 어찌 한 둘이었으랴. 어쨌거나 우리 젊은 사람들 몇몇은 그 다복하고 자상한 모습을 대하며 마누라는 고사하더라도 올망졸망한 새끼들이나 대동할 것을, 후회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정주시에서 최현식 선생을 만나 곧 바로 황토현 전적비와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회비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엄살에도 불구하고 주최측에서는 2백원짜리 음료수 하나씩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이어서 크게 환심을 샀다. 우리가 거출한 돈을 아끼고 쪼개느라고 전세버스도 그 모양이었고 채 힘으로는 갈성싶지 않다는 진작의 위구심이 적지 않았던 우리에게 그 음료수의 청량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해 보라. 최현식 선생은 혼자만의 열정과 사랑으로 동학혁명사를 연구하고 그것을 갑오 동학혁명사라고 저서를 엮은 재야 향토사가이다. 일거수일투족이 문제되던 한 야당 정치가가 갑오 동학제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고 해서 이 지방의 도지사가 찬서리를 맞고 권좌의 잎자루가 잘린 일이 있다. 그런 와중의 세 월을 아는 사람이라면 최현식 선생의 외로운 노고가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도 함께 알 것이다. 참으로 썩은 놈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지금이라고 해서 예외라고 할 수 있으랴. 아직도 샅바는 저들만이 잡고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갑오 농민군들의 그 빛나는 후예인 민중들이 마주 서서 샅바의 한쪽 끄트머리라도 붙잡게 되는 날이 다시 온다면 멋진 한 판승의 들배지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다 아는대로 황토현의 전적비는 그곳에서는 황토재나 황토마루라고 불리우는 곳에 세워져 있다. 작은 문제지만 민간에서 세웠더라면 왜 그런 명칭을 쓰지 안 했을 것인가. 관에서 보면 그게 현(縣)의 단위였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눈에 띈다. 그쪽에서는 왜 자꾸 전봉준 장군의 초상화를 사대부나 양반 ·선비의 모습으로만 새기려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역대 왕조의 권력 내부에 있어 왔던 숱한 권력의 다툼들, 그것의 한 연장선상에서만 파악했으면 하는 게 오늘날 뒤가 구린 사람들의 속마음이다. 민중이라는 이미지를 자꾸 강조한다면 속되고 철없는 것들이 배우고 흉내낼까 제 발이 저려 있는 것이다. 뒤늦게라도 추종하듯 전 녹두를 양반의 반열에 당당히 올려줬다고 생각한다면 단순한 오산이 아니리라.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 갑오년과 을미년 그리고 병신년의 여러 사건과 정황을 묘하게 조합해 놓은 듯한 이 글귀는 전적비의 뒷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말 다음에 새긴 것이다. 매를 맞다가 병신되면 못가리. 끝내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다 병신되면 못가리 그런 뜻으로 우리가 새기고 있을즈음 최현식 선생은 보국안민의 보(輔)자가 보(保)로 잘못, 아니 의도적으로 오식됐음을 일러준다. 그것은 주체의 문제다. 전자(前者)가 외향성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내포한다면 후자는 내성적인, 당시의 상황을 권력자들이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여긴 발상의 글자라는 것이다. 해발 7O미터 황토마루 전적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간디 ! 처음에 농민들은 점잖게 이르고 알아듣게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방구 뀐 놈이 역정낸다고 되려 매를 때리고 주모자를 잡아 가둔다기에 부득이 몸을 일으켰다. 조정의 바른 방책이 그때도 늦지 않았건만 안일한 무리들은 관군들을 동원해서 단숨에 초토화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초토사가 파견됐던 것인데 농민집단이 농민군이 된 마당에 관군들은 황토재 건너편 사시봉에 진을 친 다음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한다. 농민들을 그저 땅강아지 정도나 목 비틀어 놓고 명령하면 손님왔다고 으례껏 온몸으로 마당 쓰는 (강구) 쯤으로 알았던지, 아니면 그 이후 일본군들과는 달리 민족적 연민과 양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농민들군들은 이 승리 이후 당당하게 포고문을 선포하였다. 우리는 비록 초야에 묻혀 있는 유민일지라도 국토에 몸 붙여 살기 때문에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노라. 팔로(八路)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인민을 모아 이제 이곳에 의기(義旗)를 들어------ 우리 일행은 이 순례지. 아니 성지(聖地)에서 서거나 앉고 쭈그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근방의 찌들고 못난 현세의 농민들이 소주 두 박스와 코카콜라 세 박스를 들고 소풍을 와서 숲 속 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머지않아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흰 옷 입고 춤추며 노래부를 수 있는 날이 오게될 것이다-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만석보는 지금에는 남아 있지 않다. 고부 관아를 점령한 이후 성난 농민들이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운 아득한 들녘에서 못자리 준비에 한창인 농민들이 우리를 이따금 건너다보고 적벽가 새 타령 중 원조(免鳥)의 하나로 등장하는 꼭 그 때의 종달새가 노고지리 ! 노고지리 ! 울면서 날아올랐다. 현세에 우리들의 원성을 듣는 만석보들이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 일행들이 그것은 부숴져야 한다고 속으로만 공감하고 있을 때 버스는, 꼴 같지 않은 이상주의의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현실 개혁의 장(場)으로 뛰어나왔던 전봉준 장군의 생가 앞에 당도했다. 우리가 생가라고 알고 왔던 조소리(새둥지)는 사실 그의 생가가 아니다. 그곳은 그가 살던 옛집의 하나였던 것이다. 서양의 정원을 연상케 하는 상식을 벗어나는 잔디밭의 뜰이 조성되긴 했지만 그 집은 기껏해야 초가삼간이었다.(물론 초가삼간에도 남새밭이 없으란 법은 없다.) 바야흐로 이런 초가삼간에서도 큰 그릇의 진정한 애민 애국주의자는 날 수 있구나. 여행은 그래서 즐겁다. 우리는 모두 초가삼간의 별 볼일 없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부의 한 작은 음식점에서 함께 나누던 점심은 얼마나 즐거웠는지 ! 고부의 신중리 언덕배기에는 갑오혁명 모의비가 서 있다. 그 유명한 사발통문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주최측의 한 회원이 사발이 무엇이냐고, 물어와서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화기애애한 우리들을 한바탕 웃게도 했다. 그러자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변하며 변명하는 그를 우리는 이해하였다. 혹시라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는 자상함을 보인 것이다. 사발통문은, 우리에게 제도기며 분도기 콤파스가 없던 시절 사발을 놓고 원을 그렸듯, 사발을 종이 위에 엎어놓고 그 둘레에 서명자의 이름을 연명하며 쓴 성명서이다. 모양도 좀 좋지 않은가 ! 현대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이런 멋을 좀 부렸으면, 나는 권한다. 사발로 밥만 퍼먹을 생각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대나무로 매양 피리만 불 생각만 해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힘과 기운과 머리와 입으로도------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본 곳이 백산성지였다. 눈에 띄는 사방이 모두 평원이어서 가까이 멀리 보이는 낮은 산비탈이 모두 무덤으로 변한 이 근방의 모습은 상상력이 풍부해진 우리들 모두에게 이곳에서의 치열했던 전투를 떠올리게도 했다. 성지에 오르며 누군가가 농담을 했다. 기념으로, 두패로 나누어 기마 전이라도 한판 하자고-. 백산 성지에서 보낸 시간은 즐거웠다. 정상의 육모정에 둘러앉아 일행은 여러 얘기들을 함께 나누었다. 당시의 조정에서 양식있는 사대부들이 사대문을 열고 농민군들을 기다린 얘기며, 대원군이 밀지를 보내어 농민군 대표부에 연락을 띄우기도 했다는 얘기를 최현식 선생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전북대학교 사회학과 박명규 교수에게서 집강소의 역할과 실제적 활약, 그리고 고집스레 동학난이라고 불리던 그것이 왜 난이 아니고 혁명인지를 학술적으로 들었다. 해박하고 애정 어린 박교수의 얘기들은 경상도 억양에 실려 우리들에게 묘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리라. 백제 기행의 뿌리가 어디에서 뻗었으며 어디로 향해갈 것인지를 말이다. 그것은 백제 기행이 끝난 뒤 전주에 돌아와 여남은명이 인삼 막걸리 집에 모였을 때에 반복된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백제 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주류성이며 사비성 ·한성, 아니면 백제 왕조 삼사백년만을 염두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케케묵은 기왓장에만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부 태인땅에서 오늘 경운기를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나기도 해야할 것이며 입석리 마을의 농가 부엌들이 어떻게 변모됐는지 그 자체의 가치만을 살피기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역사라는 까마득한 함정에 빠져 오늘을 놓친다거나 현·재의 사람들을 그냥 흘려 보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때 한창 돋아나던 마늘 쫑과 두부를 안주로 해서 우리는 백산에서 이제 막 성을 함락시킨 농민군들처럼 탁배기 한잔씩을 나누었다. 뻐꾸기는 뻐꾹뻐꾹 울어대쌓고 장끼는 꿩꿩 울며 제 새끼를 키워 줄 까투리를 목메어 찾는데 우리는 저 앞선 우리 조상들의 한(恨)과 그 다부진 한풀이를 생각하며 고시레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즐겁고 유쾌했음을 감추지 않는다. 즐거웠으니까 우리 입속에 고시레를 했을게 아닌가 ! 일정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을 때는 나른한 여독과 한 잔 술만큼의 달콤함이 우리 일행에게 밀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잠이나 자둘려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한약방(韓藥房)이 있고 자전차포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앞을 마악 날아오르는 녹두새를 그 만큼의 취기와 그 만큼의 노곤함으로 보게 되었다. 참으로 눈 깜짝할 새였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그 사실에 대해 발설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또 일부는 너무도 값지고 소중한 목격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침묵해야 했던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바로 그 새가 어디로 깃들었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가 본 새는 다 큰 새가 아니었다. 그 새는 아직 울 줄도 몰랐으며 몸에는 마치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을 당한 듯 온몸이다. 푸르딩딩한 새새끼였다. 그 새는, 새새끼는 어디에 깃들었는가? 그렇다. 바로 우리 자신속의 가슴에 들어와 박히듯 깃들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녹두새 새새끼를 우리가 모이주고 물을 떠 주며 키워야 한다. 아아, 그 새가 자라서 힘차게 울고 이무기 승천하듯 요란뻑적지근하게 비상하게 될 날은 언제일까? 그것은 이제 분명히 우리 의지의 몫으로 남은 셈이다. 그런 상념의 끝으로 어둑어둑해지는 논둑길을 따라 그 고물버스가 전주 입성을 하기 위해 갑자기 난데없는 힘을 내기 시작하였다.
 백제,  기행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