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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7 | 연재 [문화와사람]
<작가를 찾아서>서양화가 임옥상치열한 역사의식속에 진실을 만나는 작가
문화저널(2003-12-18 14:58:52)


 화가 임옥상을 만나러 가는 길은 진선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유난히 눈이 부시었고 뜨거운 열기까지 안아 아스팔트길을 녹여 낼 기세였다. 치열한 역사 의식속에 참으로 진실한 삶을 살아가려 고뇌하는 화가 임옥상, 그림을 참으로 쉽게 잘 그리는 화가 자신의 의식을 한치 오차도 없이 조형 언어 속에 일체감으로 투영시켜내는 진실과 가까이 있는 작가. 몇 차례 그를 만나면서 또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화가 임옥상에 더해진 이미지는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작가의 대성동 자택 화실에는 그의 딸 나무와 아들 바다의 초상과 오늘의 현실을 포토 몽타주로 연작한 그림이 걸려있다. 문득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진지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잠간만 기다려 주세요. 이쪽 깃발 부분만 끝내구요."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는 화폭위에 붓을 댄다. "이 작품이 이번 개인전에 내놓는 아프리카 현대하인가요" "아프리카 역삽니다. 원래 60m쯤으로 계획했는데 50m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네요 이부분이 45m까집니다"
그러고 보니 작업실 한쪽벽이 온통 캔버스 화폭이다. 책을 든 학자. 노동자, 군인, 아이들, 여자, 모두가 흑인다. 「아프리카현대사」는 84년 그가 프랑스에 2년 남짓 체재할때부터 지속해온, 그로써는 가장 오랫동안 매달려온 작업이다. 그만큼 이 작품속에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임옥상의 철저히 천대받고 있는 흑인들의 모습이었는데 바로 그런 것들에서 서구 문명사회와 제 3세계의 갈등을 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의 「아프리카현대사」는 단순히 아프리카인들의 아픈 삶을 반영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작가정신에 의해 형상화된 아프리키인의 문제는 제3세계의 문제로 세계성을 지니며 또한 한국의 문제까지도 예외없이 함축되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바로 우리들 문제라는 인식을 일깨워준다. 일상성의 소재를 통해 매번 새로운 충격과 예감을 불어 넣어주던 그는 세계의 역사를 통해 그 일상성의 소중한 의미를 더욱 폭넓게 회복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감동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를 뒤적이고 오늘의 모습을 살피면서 나는 많은 좌절을 겪었다. 역사의 단절과 오늘의 사회현실은 絶望이자 極限이었다. 과거유산과는 너무 떨어져 있고 또 서구화의 물결에 휘말릴 수도 없다. 나는 이 모두에 소외되고 있다. 차라리 양자를 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상황만이 놓여있다. 이러한 현실인식에서나는 작품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시작해야 한다는 확인이다.」
81년9월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그는 자기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를 이렇게 밝혔다. 자아의 상실을 끝없이 견제하면서 이 시대의 진실을 담아내려 그림을 택한 작가. 그럼에도 진실에 충실하려는 의지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더욱 많은 대중으로부터는 멀리 있어야 했지 않았던가. 그러나 임옥상은 진실이 진실일 수 없는 사회에서도 자기의식을 혼을 당당하게 투영시켜내는데 게으르거나 거리낌이 없이 오늘을 이어왔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더욱 소중하다.
혼탁한 이시대에서 문제작가(?)로 주목받아온 치열한 영혼의 화가 임옥상은 1948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부터를 서울에서 보내왔다. 그가 70년대 후반부터 그려온 「땅」시리즈는 오늘의 임옥상에 있어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한데 땅에 대한 아픔이라든지, 시대상황의 진실을 땅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의식이라든지, 땅에 갖는 뿌리깊은 정서 그리고 자신조차도 억제하기 힘들다는 땅에 대한 집착까지, 이 모두가 어린시적, 자연스럽게 체득해 낸 땅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때문이 아닌가 싶다.
부유하지 못한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이 일본 노역자로 징발되어 피혁기술을 배워 나온 덕에 서울에서 성장기를 맞은 그는 용산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미대에 들어간다.
그가 기존미술계에 대한 회의와 작업에 대한 선택에의 갈등이 절실히 안게되고 또 그것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은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이었지만 미술교육의 획일성에의 불만(?)은 이미 대학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고 이 갈등은 인상주의 그림에 대한 거리감과 그림의 한계성, 그리고 그레게 콤플렉스까지 수반하게 했다. 당시 갈등의 돌파구로 그가 찾은 것은 연극에의 입문이다. 연극의 개인작업이 갖는 집착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새로운 의욕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때 경험한 연출력은 임옥상의 그림이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하는 구성상의 독특한 역량을 지니게 하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그는 대학 4학년때 들어서야 그림에 대한 거리감을 얻게 된다.
"유니트를 재구성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기법의 작업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주변의 많은 관심을 모았고 대학원까지 연결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신체계가 들어서고 정치적 압력이 피폐화된 사회상황 속에서 그는 공허감의 근원을 밝혀내는데 몰두하면서 「전통과 나」「역사와 나」「현실과 나」라는 문제의식과 끊임없이 부딪친다. 그리고는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서부터 역사를 겸허하게 직시하는 일까지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투영돼야 한다는 것을 결론으로 얻게 된다.
"서구미학을 바탕으로 한 미술은 대중과 유리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쉬운 언어를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가는 나에 있어 영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한창 우리의 진실한 이야기. 쉬운 언어로써의 그림을 찾고 있을 때 써낸 대학원 졸업논문은 그의 이런 문제의식이 짙게 투영돼 기존미술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근간으로 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절실한 연구작업 결실이 없지만 개혁성의 의지가 너무 강하게 배어있던 탓에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적당히 둔화(?)되어 마감할 수 있었다고 들려줬다. 이 갈등의 시기에 지녔던 그의 문제의식이 그림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74년 서울대동문들의 그룹전 「12월전」에서였다. 유관순 초상화와 달따는 풍경을 내놓은 그는 이때부터 문제작가로 분류됐고 개인적으로는 당시 화단을 지배했던 모더니즘의 안일함과 풍경을 내놓은 그는 이때부터 문제작 자기 도취성을 과감히 청산하고 시대적 상황을 실어내는 미술의 사회성에 작업의 근본의미를 두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당당한 자기세계를 위해 더욱 외로운 투쟁을 해야했고 그러면서도 사회를 보는 그의 눈은 철저하게 아픈 현실에의 예각적 측면을 실어냈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이 시대의 진실을 함께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항상 즐거웠습니다. 그만큼 나의 선택은 자명한 것이었지요" 그의 말은 외로움을 오히려 더욱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임옥상의 가장 독특한 경력은 공모전에 단 한번도 출품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명성을 위해 기존화단의 질서 속의 무질서에 합류하는 일을 외면해버린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76년도에 들어서 자화상이나 땅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그는 이 시대의 작가로서 보란 듯이 떳떳하게 섰다. 그리고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가입한 「제3그룹」「현실과 발언」등의 그룹전에 참여해오면서 그의 목소리는 더욱 힘차고 크게 다가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매번 신선한 충격으로 깨어있게 했다. 그의 그림은 일관된 주제에도 불고하고 늘 새롭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그것은 한 평론가의 말처럼 「한작품을 그 나름의 기준에서 완결시키려는 예술적 긴장과 엄격성을 확고해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은 82년의 「현실과 발언」발표이전이후 상당히 큰 폭으로 변했다. 그는 이를 두고 70년대가 삶과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맞서야한다」는 단순한 차원에 있었다면 80년대는 사회과학적으로 인식하면서 왜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와 맞닿은 때문인가 보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소재든 자신의 욕구대로 정확하게 그려내는 숙련된 기법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재료에 있어서 그가 획득한 자유로움은 단순히 동서양화의 라는 차원을 넘어서 기법과 양식의 고정된 틀을 새롭게 변혁시킨 미술가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량은 이미 82년부터 시도해온 부조작업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어느 작가 건 자신의 의식을 꾸준히 투영시켜내고자 하는 구체적 소재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임옥상에게 가장 큰이미지로 부각되어 있는 것은 「땅」이다.「땅」은 그에 있어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의 종착지이고, 민족이며 삶이고 과거이면서 오늘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에서 이어진 그의 땅시리즈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진실 그 자체이다.
그는 81년부터 전주대에 재직해오고 있다. 그가 전주에 눌러살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이 지방 화단에도 이른바 「민중미술」의 바람이 줄기 시작했다. 민중미술이 미술의 사회성 측면으로 분휴되는 것으로 볼 때 「美」로서의 가치성만이 인정됐던 전북의 화단이 그를 얼마나 배타적으로 지켜봐왔는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요즈음 미술의 사회성을 주장하는 젊은 세대들의 그림이 기법에 못 미치는 의식만 너무 앞선 나머지 비난받고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기법의 숙련도 이루어 낼 것이라 믿습니다."
84년의 두 번째 개인전에 이어 4년만에 「아프리카현대사」로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 (6월24일∼7월2일 서울 가나화랑) 임옥상은 이즈음 새로운 문제를 안았다. 우리 것을 찾아야 한다는 인식과 문학이나 음악 등 예술활동의 구체적 만남을 통한 문화의 건강성 회복이 바로 그것이나, 우선 전통으로부터 소외된 것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가를 모색해오면서 그는 종이부조에 한국적 채색을 도입하는 기법을 찾아냈고 이를 위해 불화와 민화를 겸허하게 공부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이제는 어떤 것 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심감이 생긴다는 임옥상은 땅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건강한 작가다.
민중적 정서를 갈망하는 임옥상과 동문이면서 도예가인 아내 한애규의 공동작업실을 나오면서부터 그의 말은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민중미술작가요? 나는 민중미술작가가 아닙니다. 아닌게 아니라 못되지요. 관심을 가진 객관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자각은 항상 고통스러운 내 자신의 윤리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가 만나고자하는 진실은 결국 민중이 아닐까. 얼마전 「들·바람·사람들」창립전에 내놓았던「형제슈퍼」사계절 풍경이 잔잔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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