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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9 | 칼럼·시평 [문화시평]
<시평>누구를 위한 축제인가?-제2회 전북미술 단체연립전-
이승우 서양화가(2003-12-18 15:44:56)


 마침 전시장을 찾아갔다가 마주한 전북일보(88. 8. 17)의 전북예술단체 연립전 아쉬움 이라는 기사에 실린 한 감상객의 전북미술단체연립전이라 해서 기대를 갖고 왔으나 오히려 실망만 했다. 물론 출품작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작품들인지가 더욱 의미있는 것이지만 전북미술을 가늠할 수 있기는 고사하고 그룹별 다양성조차 볼 수 없다. 미술인들의 향토화단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아쉽다는 혹평을 보고 이 지역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둘러보는 전시장의 쓸쓸함, 뭔가 연대의식이 없는 황량함, 어느 중학교에 다닌다는 학생이 숙제를 한다며 열심히 감상문을 적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혹함 등의 생각들이 명한 머리에 그나마 생각되어지는 것들이었다.


 미술문화 형성의 요인을 네가지만 들어보면 창작인, 전시공간, 비명가 그리고 관객권의 형성이다. 그 중에서도 물론 기본이 되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분위기에서 어떤 몸짓을 하고 있던 간에 창작하는 사람은 많아서 다양할수록 좋다. 그 다음이 전시공간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을 다양하게 제작하여도 발표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지 않으면 일반대중과의 포괄적 커뮤니케이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음은 전문비명가의 역할과 매스미디어의 끊임없는 관심이다. 올바른 비명의 척도로서 작가나 일반대중을 상대로한 각각의 비명자세를 갖춤으로서 전시의 분위기를 고조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매스미디어의 고질적인 외면이나 터무니없는 고자세, 안일하고도 닫혀진 보도자세, 혹은 일부 몰지각한 비평가의 악의에 찬 독설이나 감성적인 비평태도는 창작하는 사람과 일반대중과의 사이를 더욱 이간질시킬 따름이다. 마지막이 관객권의 형성이다. 확실한 관객권이 형성되어 그들이 갖는 구매의욕의 활성화에 따라 미술문화의 완벽한 형성이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적 여명은 항상 지역문화에서부터 시작되었음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하여 유독 정치, 경제와 똑같이 문화의 중앙집중에 의한 적채현상을 보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가일층 지방문화의 부흥을 갈망하게 한다. 미술계에서도 중앙화단에의 집중적 편향성이나 의존도에 의한 병폐는 비단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문예 진흥비의 전액이 한국화단이 아닌 서울화단을 중심으로 쓰여지는 것은 기껏 앉아서 돈타령이나 하고 있다는 핀잔을 들을까봐 차치하고라도 서울 미협의 식구들은 이제 갓 입회한 신입회원에게도 이 나라 미협 이사장을 선출할 수 있는 선거권을 주면서 지방의 미술인들에게는 미협지부의 지부장에게만 선거권을 주고있는 전근대적 제도가 숱한 개선책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대로 이행되고 있다는 점은 쉽게묵과할 수 만은 없는 것이다. 한가지만 예를 들자면 서울에 살던 노(老)대가도 이제 그만 향리에 살고파서 거주지를 지방으로 옮기면 선거권이 없어지는 것이다. 한국미협의 지부인지, 서울미협의 들러리부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가는, 이해할 수 없는 제도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이, 지역의 미술인들은 스스로 연구하고 자체적인 문제 제기가 많아야 한다. 어쩌다 한번 선심 써주는 지방미술단체 연립전에 차비 들며 찾아갈 일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서울 미술단체연립전을 개최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있어야 한다.

새삼스럽게 말꽃만 무성하고 열매하나 맺지 못하는 문화의 집중, 적체 현상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금년에 2회를 맞은 전북미술단체연립전에 대하여 반성해보자는 것이다. 누가 주관을 하던 이 지역의 미술행사 중에서는 그 성격으로 보아 전북미술대전이나 전라예술제의 일환인 미협회원전보다 훨씬 더 많은 작가들이 한자리에 어우러질수 있는 이 잔치가 그 관람객으로 하여금 서글픈 마음을 갖게 한 것에 대하여 우리 서로 조금은 아파하자는 것이다. 말과 글로도 지방 문예부흥의 주장과 실천을 할 수도 있지만 미술인들은 미술 작품활동을 통하여 향토예술의 맥을 이어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의 각오를 상기시키는 계기가 있어야 하겠다고 절감하기에 이렇게 전라북도 미술인들의 한자리 모음을 시도하여 상호 작업상 정보교환과 격려와 수용의 분위기가 서로 어우러져서 문예부흥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마련하였다. 는 호소는 지부장 한 사람의 것이 아니며 작년에만 국한된 호소는 아닐 것이다. 물론 금년 봄에 있은 전라북도 미술대전의 주관 문제에 개인적인 문제가 삽입되는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개인적이라기 보다는 옛부터 예향을 자랑하는 이 지역문화인의 자존이다. 전주의 전(全), 전주를 둘러싼 완주나 완산의 (完), 백제의 백(百)이라는 글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갖추어져 흥이 나고, 뚜렷하여 부족함이 없고, 순수하여 티가 없고, 모든 것이 어우러진 이 지역 우리들의 자존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를 묻는 이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영원한 자존을 위한 것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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