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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9 | 연재 [문화와사람]
<작가를 찾아서>도예가 韓鳳林흙과 불의 장인정신
유휴열 서양화가(2003-12-18 15:4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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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마디가 굵고 찌들은 얼굴에도 청아한 눈빛과 순박한 자태를 잃지 않으며 땀 적신 옷차림으로 물레를 차던 隔藝家들은 민속박물관으로 들어간지 이미 오래이고, 모시적삼 곱게 차려 입은 隔藝家들은 가끔씩 텔레비전 화면 속에나 들락거린다. 해외의 여행길에서 隔藝하면 日本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는 그 日本이 우리의 선조를 데려가 전수를 받은 것이라며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고개를 내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실로 傳統을 바탕으로 하여 무한한 실험을 거쳐 현대의 감각을 조형화하는 작업에까지 이른지 이미 오래인 日本人들이 그렇게 평가를 받고 있음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우리 도자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독립된 박물관 하나 없음도 한스러운 일이지만 작가들의 제작하는 정신에도 문제는 있으라는 생각이 든다. 도자기의 歷史에 나타난 변화도 결국 시대속에 걸맞는 상태에서의 傳統이자 변화이고, 傳統이 곧 변화요 변화가 곧 전통이라 할 때 이러한 당연한 창작원리를 실현하고 있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있었으며 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점에서 隔藝家 韓顧林과의 만남은 큰 기쁨이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韓鳳林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쳐 15년 전 원광대학교에 내려와 도예과를 창설하기까지 참으로 큰 힘을 쏟아냈다. 실로 어느 대학에도 뒤지지 않는 시설과 교육환경을 갖추는데 앞장섰던 그는 교육자로써도 충실 할 뿐 아니라 왕성한 제작열로 옛날 우리 선조들의 장인정신을 물려받은 끼있는 작가임을 강하게 풍겨주는 작가이다. 마치 작품을 하기 위해 민속박물관에서 뛰쳐나온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창작열은 대단하다.

가을 초입 햇빛 부드러운 날 찾아간 그의 연구실에는 작품을 위한 수많은 밑그림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작업과 정의 설계와 계획은 메모되어 바닥에 깔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치밀하고 노력하는 작가인가를 알 수 있게 했다. 이 과정을 바탕으로 지금 과천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현대미술제와 8개국의 작가가 참여하는 동서도예전의 출품을 위해 제작된 작품들이 연구실 앞 잔디 위에 너무도 당당하게 서 있었다. 자정이고 새벽이고 시간과는 관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 때로는흥분해 있고 때로는 침잠되어 있는 목소리의 韓願林을 대할 때마다 얼마나 그가 고뇌와 번민과 싸워가는 작가인가를 알 수 있었던 터였다.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유화물감으로 그린 색바랜 풍경화 한 점을 만났었고 아버님께서 작고 하셨을 때 영정으로 모셨었다는 연필화도 그가 그린 것이라니 다양한 조형체험을 탄탄하게 다져온 그임을 알 수가 있다. 술로 물들인 빨간 코끝이 그의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지만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때로는 우직한 언어들이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한 우뚝 서 있는 흥송(松)처럼 당당하게 솟으리라는믿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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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隔藝係에 있어서의 韓鳳林의 존재는 매우 특이한 셈이다. 어떻게보면 異瑞的인 존재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隔藝家로서의 엄격한 정통적인 형성과정을 거친 그가 20여년을 줄곧 추구해 온 것이 어쩌면 階藝에 대한 시종일관 반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흙으로 빚어 유약을 바르고 燒해낸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완결된 隔藝作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흙의 본질을 통해 隔가 있어야 할 새로운 位象을 찾기 위해서란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는 「영원한 운동」이라는 테마로 내놓았던 작품으로 75년 韓國美術協會展 1위와 79년 空間大賞을 수상했다.
수상을 한 작가의 辯중에 그는-지금까지 나의 창작 행위의 소재는 그것이 기능적이든 비기능적이든 주위에 가까이 있는 어떠한 물체이거나, 자연스럽게 흔히 존재하는 상황 등을 흙과 불로써 다루어 그것을 조형적 차원에서 재현하는 수단을 통하여 새로운 물질성의 확인과 행위를 하기 이전의 원래 물질이나 상황을 연결시키며, 미의식과 조형성을 일반적인 것에서 계속 확인하고 다음의 기능성을 찾으려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영원한 운동」은 작가 자신이 스스로 간직하고 각오하는, 그야말로 영원한 隔藝 寶輪을 뜻하는 것이며 끝없는 변화를 통하여 現代藝의 새로운 章을 열고야 말겠다는 강한 意志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韓鳳林의 藝術世界를 美術評論家 張錫源은-무한한 精神世界를 향하여 꾸준히 움직이고 있으며, 그러한 藝術이 갖는 非構藥的인 면모는 現代藝에 있어서 새로움으로 제기되는 隔影的인 형식의 造形性 마저도 붕괴시키는 위력적인 것이다.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事像의 우연스러움을 섭리로 받아들여 전설적 原型으로 전환시키는 그의 정신성은 아직 우리의 關藝魔念에서 맛보지 못한 특수상황을 알리는 것으로 더구나 그의 작업에서처럼 성숙되고 신선한 樣態로 전개될 수 있을때, 現代藝에 부여된 未決의 課題는
쉽게 풀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명했다.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작품은 사람의 심장부와도 같은 형태로 살아숨쉬듯 있더니 이즈음엔 소의 뿔과도 같은 형태를 무수히 만들어 집단으로서 있거나 누워있는 작품을 해오고 있다. 이는 마치 평면 회화에 있어서 구획지어져 있는 면(面)보다 전체를 반복해서 가득 메움으로써 확장되어 크게 와닿는 올, 오버형식의 표현 기법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하며, 두개의 산의 형태를 우뚝 세워 손으로 현 흙을 밑부분에 쌓아 올리는 작품에서는 어릴적 보아왔던 성황당을 연상케도 한다. 또한 무속신앙파도 같은 우리네 전통적 정신세계가 현대의 조형원리를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난 듯한 싱싱한 충격으로 오기도 하더니 최근에는 프라스틱 종류와 철근으로 뼈대를 세우고 살아있는 황토흙 그대로의 질감을 충분히 살려내는 실험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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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러 소양에 갔던 날은 그는 송광사 옆에 영원히 가꿔나갈 터를 마련하더니 그곳을 보금자리로 잡고 그곳에 제래식 가마를 박아 작업장은 물론이고 도예 캠프장도 만들고 자기 작품을 중심으로 야외전시장과 실내 전시장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셜명하면서 첫 삽질을 하던 날이었다. 그날 천진스럽게 빛나던 눈빛과 꿈 부푼 미소의 얼굴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마침내 이 고장에안주를 해 주는 것이 실로 감사하는 마음까지를 자아냈다. 실로 척박하리 만큼 소박하던 우리네 땅이, 흙이 물질 문명의 발달과 함께 근대화란 명목 앞에 얼마나 더럽혀지고 수난을 당하고 있는게 또 사람들의 가치관을 얼마나 흐려 놓았는가. 중장비가 파서 쌓아올린 흙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눈은 한동안 무섭게 멈춰지더니 저 오묘한 색과 무심하리만큼 담담한 형태 앞에서 내 작품은 무엇인가 흙 저대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반문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되돌아오던 길, 산으로 쌓인 가운데엔 물이 흐르고 포크레인의 우렁찬 소리가 울림으로 돌아와 또 산에 부딛쳐오고 눈들어 올려다 보던 하늘엔 석양을 맞는 구름 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는 청녕 총남산(鍾南山)의 위엄스런 자태와 함께 이 고장에 정신적인 지주가 될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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