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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9 | 연재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변화의 시험기
김흥수 전북대 인문대 국문과(2003-12-18 15:46:23)


 이제 변화는 누구나 공감하는 당위이자 새로운 사조가 되고 있다. 급격한 변화를 못내 못마땅해하거나 옛날도 일리는 있었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설 자리도 눈에 띄게 좁아졌다. 바꾸자면 골치아프니 그대로 두자는 식의 현상유지론이나 바뀌면 얼마나 바뀌랴는 회의론도 그리 떳떳한 논리를 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변화의 중요한 고비에서마다 좌절을 겪었던 우리의 마음은 상황이 좋아진 지금이라 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다시금 역사 진전의 향방이 달린 변화의 시험기에 처한 것이다. 변화의 흐름을 같이 타고 있다 해서 사람들의 심중이 같은 것은 아니다. 오늘의 변화를 한가운데서 이끌고 있는 뭇 힘과 그 지지자들은 이 변화가 힘들게 싸워 얻어 낸 일정한 성과인만큼 앞으로의 변화 또한 우리의 의식과 역량을 얼마나 고양시키고 집중시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변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에 바탕을 둔 적극적 변화론은 진보와 개혁을 기대하는 이들은 물론 현실에 분노하고 회의하는 이들 속에 널리 자리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추상적 당위나 정서적 차원에서는 적극적 변협에 동조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포함하는 현실 여건을 들어 변화에 소극적인 이들도 있다. 이들은 변화에 따르는 부작용을 내세워 기존의 틀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정도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변화가 수행되기를 바란다. 한편 변화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완강하다. 기존 체제의 힘과 논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혀왔던 이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보수성향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변화에 대한 본능적 거부는 의외로 골이 깊은 것 같다. 이들 각각의 성격을 좀더 명확히 밝히고 갈래지음으로써 역사발전과 사회변동 과정에 있어서 그들의 의미와 역할을 자리매김하는 일은 이 시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변화의 방향과 추이를 분명하게 점치고 변화의 추진력과 실천방법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원화와 분화가 민주화의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는 지금 단계에서 각 태도를 엄격하고 단순히 규정하고 그에 따라 하나하나를 구별짓고 선을 긋는 일은 실천의 장에서는 물론 인식의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숙고되어야 한다. 각 부류 간의 선명한 차이가 강조됨으로써 형성기의 분위기와 공감대가 흐트러지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할 것이다.


 아직, 변화를 공공연히 가로막아 왔고 스스로 변화의 장애였던 이들이 변화를 관장하는 위치에 있고 변화를 앞서 예기하고 가장 열렬하게 밀어 왔던 이들이 불온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국민의 의식이 점차 적극적 변화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민주추진 세력이 그때그때 변화의 핵심을 짚어 줌으로써 국민의 주의를 일깨운 탓도 있을 것이다. 자체 정화가 가장 절실한 세력들이 문제의 핵심을 기피하거나 변화의 거시적 맥락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주목할 것은 국민이 좋든싫든 이제는 전체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좀더 분명하게 감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설사 닥쳐오는 변화가 자신에게 불리할지라도 그것이 필연인 한 어떻게든 감당해야 하고 그러자면 자기 위치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라도 변화 속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회변동에 대한 감이랄까 소박한 역사의식이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힘입어, 악조건에서 커 온 변화를 추구하는 힘은, 유리한 위치에서 기존체제를 고수해 온 힘과 좀더 떳떳하고 대둥한 위치에서 대립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은밀히 변화를 꿈꾸어 온 그 동안의 잠재력과 불확실한 요인들도 변화의 추진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길이 널리 트이게 되었다. 바야흐로 본격화되고 있는 두 힘의 대립 양상은 현대사를 통해 쌓이고 엃켜 온 모순과그를 지양하려는 움직임이 종합되어 나타난 만큼 심각한 부딪침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광범한 변화욕구와 참여는 극한적 대립을 조정 완충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준비하는데 믿을 만한 담보가 될 것이다. 국민이 편견과 경직성에서 벗어나시각을 조정하고 시야를 넓혀 가는 마당에 정부는 더 이상 환경이나 열강의 입김, 혼란과 무질서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직선과 쟁의, 운동과 시위가 하루가 다르게 일상 속에 정착되어 가고 있는 판에 개방과 자율과 해금과 석방에 더 인색할 필요가 없다. 운동과정에서도 당위와 충격과 구호는 절제되는 대신 설득과 합의절차와 실질이 더욱 존중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깃발 밑에 구체제를 심판대에 올리고 있다 해서 바꾸는 것이 능사이거나 사이비 변화가 허용될 수는 없다. 겉치레나 자리만 바뀌는 뒤로 정작 시급히 바뀌어야 될 것은 온존되고 있고 진정한 변화에 역행하는 퇴영적 처사도 없지 않다, 아울러 상투적 체제 ·이념론은 그만 두고라도 급진 ·강경 노선을 포용 ·통제하는 것도 긴급하다. 게다가 과연 우리는 타성과 허위 의식과 독단으로부터 벗어나 변화 속에 기꺼이 몸을 밀어넣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변화의 명분에 걸맞는 내용을 채우고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의 의식을 현실이 움직여나가는 역동적 논리에 통합시킬 수있는 길은 무엇일까. 변화의 주체와 객체, 핵심과 지엽,참과 거짓이 혼동되기 쉬운 때일수록 사실과 진실을 철저히 가리고 밝히는 일은 선결과제가 된다. 사실을 알리고진실을 추구할 의무와사실을 알 권리, 진실에 대한열정과집념, 잊을수 없고 끝까지 밝혀야 할 것에 투철한 반면 덮고 감싸 좋을 것에 너그러운 덕성이 특히 절실한 지금이다. 일시적 폭로나 고발을 넘어 구조적 악을 드러내려는 끈질긴 노력, 제한된 앎의 지평을 확대하고 편벽된 시각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 공개와 감시의 분위기를 정착시키고 제도화하는 일은 변화의 밝은 앞날을 약속해 준다.


 자료와 토론의 장이 널리 개방됨으로써 변화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일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형식의 개방만큼 논의의 알맹이와 영역까지 자유화되고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특정 이념과 시각에 사로잡힌 고정관념과 상투적 논리로는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상황과 문제의 새로움에 대처할 수 없다. 정책 ·운동·학문의 장을 막론하고 사상의 자유와 의견의 가치가 최대한 보장됨으로써 우리는 변화의 정곡을 정확하게 가늠하여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건이 성속되더라도 결국 나를 광장 위로 밀어올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다시금 어딘가에 의존하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시혜적 변화의 과실만을 쥔 채 스스로를 잃게 되고만다. 현실모순의 핵심과 예각에 처해 생존과 생활의 가장 어둡고 어려운 속에서 솟아오르는 운동의 추진력은 가장 참되고 믿을만한 변화가 어떤 것인가를 실증해 보여 주지 않았던가 극히 일상적인 무관심과 방조, 습관적인 책임 축소와 회피 속에서 그 뼈저린 역사적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온 것이 아닌지 엄숙하게 되묻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처해 있는 자리를 교권이 숨쉬고 노동권이 자리잡고 법의 정신이 빛나는, 땅의 신성함을 일깨우는 역사의 현장으로, 각자의 직분과 일의 고귀함을 실증하는 오류한 장으로 다져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제각기 참 영역을 힘들여 찾고 지켜나갈 때 그 숱한 힘의 남용은 공직의 사명감을 드높이는 자리로 전환될 것이며 국민을 소외시켜온 정치도 우리의 일상과 어둠 구석구석에까지 미칠 수 있다. 아울러 우리의 절박한 발언과 요구도 내 고유한 목소리의 연장 속에서 너르고 다양한 통로를 통해 울려퍼질 수 있다. 각자의 일에 대한 전력투신이 변화의 운동성과 연대성을 떠받쳐 줌으로써 우리는 변화의 성숙된 단계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여기 우리가 발딛고 있는 곳은 민족사의 뚜렷한 한 줄기를 형성해 왔고, 전체모순의 한 전형을 드러내 주고 있는 현장이다. 변화의 필요성이 특히 절실하고 그 잠재력이 큰 만큼 주체적 역량이 요청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마침 이곳 각계각층, 여기저기에서는 뚜렷한 변화의 기운이 일고 확산되고 있다. 시대적 요청에 발맞춘 이러한 움직임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한 번 불고 지나갈 바람은 더욱 아니다. 전시대의 유제와 만성적 소외와 결핍 속에서 변화가 유보되어 왔던 이곳도 이제는 초월의 몸짓과 미래의 청사진을 꿈꾸기에 앞서 당장 온몸으로 느껴오는 진통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절박한 현재형으로 소리쳐오는 저들과 사람들의 문제를 신문,화면, 연구실, 교실, 그 많은 기관의 책상 위로 끌어와 씨름할 때가 된 것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의 모순과 정체에서 비롯된 이들 노력은 바로 자기 앞의 과제와 그 역사적 ·전체적 의미에 충실한 만큼 지역현실의 세부와 실상을 일깨워 교정하고 그 민족사적 의미를 현재화하는 데 집중될 것이다. 이들은 찬찬하고 부지런한 손발과 담담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시험기를 밀어 헤쳐나감으로써 더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주체로서의 뚜렷한 몫을 즐겨 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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