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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0 | 칼럼·시평 [문화칼럼]
<저널칼럼>빚어이룬 문화와 찍어내는 문화
李炳勳 시인 군산문화원장(2003-12-18 16:04:36)


찬물 한대접이면 넉넉하다.
찬물 한대접 떠서 상에 받쳐놓고 그앞에 조아리고 앉아 비손을 하던 한국의 여인들이 지금도 신선하게 남아있다. 치성드리는 그 모습은 외양이나 내양 모두가 가지런하고 조용하며 간절하다. 쌀한줌에 촛불하나 세워 놓으면 더없이 마음이 흐뭇하고 더 떳떳할까 싶지만 굳이 「그렇게가지야」 하는 소박함이 오히려 엄숙하게 한다.
주변은 그지없이 적막하고 침착하고 밝다. 여인네의 손은 사뭇 바램에 가득차나 그것은 지극히 순박하고 최소의 것이다. 최소의 것 그것만으로 넉넉한게 아니라 최소의 것에서 최대의 것을 이루는 크나큰 힘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그의 손은 애원히는 것이 아니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여인네의 치성은 애시 애원이 아니라 이야기였고 표현이며 대화의 모습이다.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사람이상의 누군가한테서 사람의 일을 얻어내려는 대화이다. 상호수수(相互授受)에 의해 이루어보고자 하는 일 그 일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이상의 진하고 끈끈한 영험이 분명하다. 그 영험을 얻으려는 것이다. 영험은 대화다.
대접 안은 비어있는 듯 차 있다. 투명한 찬물 속의 대접색깔은 희다못해 눈이 부시고 그 밑바닥엔 이미 하늘이 내려와 잠겨있다. 여인네는 그 하늘을 한없이 들여다본다. 하늘 안의 무한을 들여다 보며 사람속에 담아 그 무한에 취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여인네의 얼굴에는 혼들리는 물 그늘 같은 게 어려옴을 느낀다. 세상 모두가 이처럼 아기자기하고 짜릿하면 얼마나 신이 날것인가, 사는 맛이 날것인가
우리는 오래전부터 神과 동거해왔다. 우리의 울타리안에는 성주삼신, 조왕신, 문간신, 마당신, 뒤안신, 곡간신, 장광신,우물신 동 구석구석에 지킴이 살았다. 또 동네에는 동구 밖 장승에서부터 시작해서 성황당 당산 등이 있어서 어째 생각하면 동네에서부터 집안까지 神들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神 따로 사람따로가 아니라 神과 사람이 한마을 한집식구로 동거한다. 같이 어울려 허물없다. 상 하도 귀하고 천함과 깨끗하고 더러움도 없으며 베품과 바침도 없이 스스럼없이 주고 받으며 믿고사는 처지이다. 神의 포악함이나 엄숙함이 따로 없다.
음력 초사흘이면 어김없이 이 神들에게 치성을 드린다. 역시 간결하다. 떡이 아니더라도 밥 한그릇에 김치며 국이면 전부다. 기름지지 않고 담백한것이 오히려 개운하다.
성주가 으뜸이라 방안에서부터 시작한 고삿상은 조왕으로 갔다가 문간으로 문간에서 다시 마당을 거쳐 뒤안으로 그리고 곡간, 장광, 우물을 두루 거쳐 다시 방안으로 들여 놓는다. 거치는 자리마다 찬물에 약간의 밥과 반찬 국을
곁들여 조금을 남겨 놓는다. 神이 먹었다는 표시일것이다. 방으로 들여놓은 고삿상에는 다시 데운 국사발파 다른 밑반찬을 올려놓고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저녁을 때운다. 神들이 운감한 음식을 뜨는 생이다. 神이 먹고 몰려준 음식을 먹는게 아니라 神들과 그렇게 나누어 먹고사는 것이다. 이는 일찍기 사람이 바라는 이상(理웹인 神과의 동거, 사람이 에 도달하려는 추구등이 이렇게 수월하게 자연스럽게 이루고 누리며 산것이라 생각해 본다. 섣달그믐 깜깜한 밤이면 횃불을 밝히며 어둠을 태우는 현실적인 슐기도 있었다. 어둠이 들자 마을 풍장(農樂)은 마을 맨끝집에서부터 집돌기를 시작한다. 풍장잡이와 마을 사랍들은 모두 횃불을 잡아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특별히 선태되거나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안, 남자들, 늙고 젊음이 없이 어린이까지 나선다. 나는 열살도 다 안되는 어릴적 내가 해마다 이 횃불을 들고 어른들의 풍장을 따라다니며 어둠을 태우던 때의 기억이 황홀하게 되살아 오르곤 한다.
한해의 액을 청산한다고는 하나 그 실은 한해의 한을 태워버리면서 나름대로 사는 즐거움을 발산하려는 것이었다고 본다. 행렬은 한집도 빼놓지 않는다. 가난하고 부자를 가리지 않고 어느 집이고 들러 마당에서 뒤안으로 뒤안에서 우물로 그리고 문간에서 한바탕 재친다. 대접받은 막걸리의 흥이 갈수록 더하기도 하지만 풍장가락에 신이나면 누구 할 것 없이 함성을 지르며 춤추고 하늘에 솟구쳤다가 땅을 구르기도 하는 장관이 무르익는다. 이것은 놀이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다. 그렇게 거첨새없이 풍장을 치며 횃불을 밝히고 뛰고 쓰린 속이 소리쳐야만 풀리는 생활의 약동 그리고 환희이다. 그 생동력, 좋아 어찌할 줄 모르고 너울거리는 활력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세상을 살고있구나 싶다.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싱겁기 짝이 없는 세상, 참으로 건조한 세상을 살고 있구나 싶어 멋적음을 느낄 뿐이다. 어리석기 싹이없는 세상 기쁨과 즐거움이 어디 있는가?
농사일에도 귀하고 진한 문화가 배어었다. 모내기할 때 김 멜 때 농기를 앞서고 풍장이 뒤따라 들에 나온다. 농기는 길이 3~4m되는 장대 끝에 꾀꼬리털로 만든 기장을 달은 기상에다 깃폭은 큰 멍석만해서 대단한 위품을 발휘한다.
풍장은 모내기 할 때는 뒤에서 김맬때는 앞에서 울린다. 때로 느리게 때로는 자진마치로 때로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어느새 일하는 농사군의 목에서 「어이 여이 여이 여루 사앙사아디이야oh하는 노래가 터져나온다. 그러기가 무섭게 모를 든 손을 저으며 춤추며 모를 심거나 김매던 호미를 들고 춤추며 김을 매가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혼자 들에 나가면서도 지게발에 장단을 맞추며 육자배기를 부르는 슬기 삽자루에 장단을 맞추며 그 유장하고 애달픈 노랫가락을 부르며 논두렁을 가는 농사문화 이것이 단순한 생산문화일까 생각해 봄직하다. 이 정서 이 서정이 저속한 그리고 원시농경시대의 때를 벗지 못한 문화로 규정하고 업신여겨져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잔치라던가 가을의 등짐행렬이라던가 사람의 애간장을 뒤흔들어 놓는 가락이나 농사일이 우리에게는 사철 이어져 왔음을 기억해야한다. 지금 그것을 업신여기는 신문화라는 의젓잔한 주장을 내세우는 그 사람은 어느 피와 어느 가락과 어느 문화의 물림으로 태어났는가 우리가 해온 농사문화는 농사자체의 생산수단으로만 존재해 온 것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 농사자체가 생활이고 삶의 보람과 사는 환희며 이웃과 서로 용해돼 덩어리가 된 싱싱한 생활문화자체로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문화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기계적 고딕문화의 찍어내는 문화 속에 휩쓸려있는 이 시대에 생활을 빚어 이룬 문화의 참가치를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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