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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 | 특집
문화저널 1주년 기념특집 좌담회
전북지역문화운동의 형황과 과제
문화저널(2003-12-24 10:58:08)

참석자

곽병창 연극 기전여고 교사

김용택 문학 시인
박명규 학술 전북대 교수
임옥상 미술 전주대 교수
이종민 사회 본지 편집위원

때 : 1988년 11월 28일
곳 : 문화저널편집실

이 : 안녕하십니까? 바쁘신데 이러한 자리에 참여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저희 “문화저널”에서 1주년특집호를 준비하면서 이 지역 문화운동의 현황을 점검해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본지9월호 특집에서 문제제기의 차원으로 정리된 바가 있습니다만, 그것이 현장의 경험이 거의 없는 국외자의 원론적인 논의였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이 88년 전반기까지의 활동에 관한 것이었기에 보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여러분들의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통하여 이 지역 문화운동의 실질적 발전에 기여했으면 하는 것이 저희 기획팀의 바램입니다. 논의의 대체적인 순서는 우선 지역문화운동이 현시점에서 왜 필요한 것인가를 점검해보고 이 지역 문화운동의 현황을 각 부분별로 살펴본 다음 그 부분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 뿐 만 아니라 전체가 갖고 있는 문제점 및 과제, 이러한 것들을 정리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80년대 이르러 70년대 운동을 반성하는 가운데 운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한 것이 사회 구성체 혹은 사회성격논의와 지역문화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혁운동을 추진하는 입장에서 변혁의 내용 측 어떠한 상태를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과학적 점검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 전자의 논의라면 그러한 변혁을 실제로 어떻게 담보해낼 것인가 그러니까 과학적인 인식들이 확보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중적인 공감대를 확보하지 못할 때 소위 말하는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할 때에는 그런 논의가 관념적인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반성에서 제기된 것이 지역문화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지난 8년간의 엄청난 비리가 폭발적으로 드러나 또 그것을 규명하고 단죄하는 것이 당면과제로 부각되다 보니까 지역문화운동의 의미는 지방자치제의 문제와 더불어 퇴색해버린 듯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문화운동의 개념을 정리해보고 그 다음에 현시점에서의 의의를 점검해보는 것으로 ‘하지요.
흔히들 지역문화운동의 개념을 지역운동의 개념과 문화운동의 개념의 통합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역운동의 문화적 전개로 정의를 하고 다른 사람들은 문화운동의지역적 전개로 그 개념을 규정합니다만 쉽게 지역운동의 개념과 문화운동의 개념의 통합으로 개념을 규정하면 좀 선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역운동이 대두된 것이 80년대 운동에 있어서 대중성 확보내지는 운동의 현장성의 의미가 부각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때 지방이라는 말 대신에 지역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서울과 대비되는 측 그것에 종속되는 지방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 영위되고 있는 현장으로의 지역의 의미가 강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우선 이러한 지역의 개념과 더불어 지역운동의 의의에 대하여 박선생님께서 좀 정리해 주시지요

박 : 글쩨요 얘기를 저부터 하라니까좀 이상하네요. 우선은 이러한 전제를 하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다른 사회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지역운동이라는 것도 이론적으로 지역운동이 필요하다 해서 측 개념적 이론적 이유가 있어 가지고 지역운동이 실천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여러 가지 변화과정 속에서 변혁이라는 것이 우선적으로 출발을 하게되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또 이론척으로 정리하려는 노력 속에서 지역운동의 개념이 나오는 것이니까 논의상 이것을 먼저하기는 하지만 이게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가지고 출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학술적으로 지역 혹은 지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아까 사회자가 말씀을 하셨듯이, 서울이라는 중심부에 대한 주변적 부분, 소외된 부분이라는 개념으로의 지방이라는 말 대신에, 서울이나 농촌이나가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장이다라는 의미의 지역이라는 말이 선호되게 되었옵니다. 지역이라는 말이 그러한 의미에서 아주 적합하다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습니다만, 지방이 서울에 대비하여 지나치게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주니까 지역이라는 말이 중립적으로 선택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사와 같은 부분에서 지역은 그것이 도시이든 농촌이든, 또는 힘을 가진 곳이든 소외된·곳이든 구체적인 사람들이 자기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제반 상황들과 부딪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어떤 영역, 그것을 아주 높게 추상시키면 국가나 전체 사회가 되겠지만, 구체적인 삶이 영위되고 있는 생활의 단위라는 개념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역운동도 운동의 단위로서 지역성을 기초로 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지역운동 혹은 지역문화운동이 어떠한 내용과 방향을 가지나 하는 것을 현장에서 실제로 활동을 하고있는 분들의 말씀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얻어질 수 있을 것 같고 해서 제 이야기는 이 정도로 그치지요

이 : 여기에 참여하고 계신 여러분도 모두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지만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형수씨가 말씀을 해주셨으면 했는데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여 아쉽군요 현장성을 중시하는 논의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그것이 너무 전위적 차원에서만 논의가 되고 실제 현장과 연관되는 것이 없다는 반성하에 70년대 후반부터 학생운동의 많은 세력들이 노동현장이나 농촌에 뛰어들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지역운동의 대두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따로따로 논의를 하는 것이 이상하기는 합니다만 일단 지역운동의 개념과 문화운동의 개념을 접합시켜 지역문화운동의 개념을 도출시키려 하는 입장이니까 우선 문화운동의 개념을 한번 정리해보죠 문화운동도 80년대에 이르러 대중성 확보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하게 되는데, 우선은 그 이전 60년대 후반 및 70년대 초반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탈춤부흥운동 내지는 마당극, 마당굿 운동이 발전을 해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문화운동이 태동하게 된 배경 및 그 의의 둥에 대하여 임선생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지요

임 : 글쎄요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더구나 이 분야에 대해서는 가장 문외한일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를 해달라니 당황스럽군요 현장에서 활동을 한 곽형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듯한데…그리고 이건 사회자의 지나친 전횡이 아닙니까? (웃음) 이야기를, 사회자는 물론 나름의 구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논의를 진행시키려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자연스럽지도 못하고…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되게 하고 주제에서 크게 벗어날 때만 잡아주었으면 합니다.

김 : 맞아요 각본을 너무 치밀하게 짜면 이야기의 진행이 부자연스럽고,또 괜히 딱딱해져 가지고 어려운 말만 쓰게 되죠

이 : 제 각본대로 진행시킬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유도하기 위해 주문을 하는 것이지요

김 : 그리고 탈춤이나 마당극, 마당굿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곽형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곽: 저는 전문가도 아니고요 또 문화운동의 태동이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직접 이를 겪으신 임선생님이 더 적격일 것 같은데요
임 : 나는 그것이 진행되는 주변에 있었지 결코 그 현장에는 없었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한다면 책이나 주위의 이야기를 통하여 알게된 일반적인 얘기밖에 할 수 없을 것 같고, 이에 비하여 곽형은 현장에서 직접 뛰었기 때문에 더욱 생생한 얘기를 해줄수 있을 것 같은데…

김 : 그래요, 곽형의 이야기가 현장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곽: 저는 여기에서도 가장 연배가 어리고 또 문화운동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다고도 도저히 말씀드렬 수 없습니다. 임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도 60년대 말 김지하씨의 활동이나 70년대 초 임진태씨와 채회완씨의 서울대 문화써클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책을 통하여 접하게 되었옵니다. 제 생각에 처음의 문화운동은복고적으로 우리 것을 찾자는 식으로 진행되다가 그것이 과학적인 사회인식과 만나면서 특히 우리사회를 억누르고있는 모순 구조들의 본질을 파악해내면서 그것을 걷어 내기 위한 싸움의 일환으로 본격화되는 것 같습니다. 마당극이 대두된 것은, 사실은 그것이 탈춤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판의 의미, 임진택씨가 정리한대로 그것의 신명성, 현장성, 전투적인 요소 등을 이 시대에 맞는 내용으로 개편해내면서 극이라는 개념이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죠 이것이 굿으로 진행이 되는 것은 이것을 좀더 총체적인 양태로 파악하여, 서양식의 무대극이 갖는 극의 한정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창조하는 배우와 야를 수용하는 관객이 하나가 되어 일종의 제의적인 형태로 풀어내본다는 의미에서 굿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부터이지요 즉 굿 중에 극적인 스토리를 삽입하는 형태가 널리 퍼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극을 하기 전에 무당굿에서 하는 것처럼 신을 부르고, 부른 신하고 대화를 하는 공수걸이와 같은 것을 원용하여, 풍물로써 신명을 돋꾸어 종교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간 다음에 서사적인 이야기를 진행하고, 끝날 때에도 역시 굿 형식으로 신명을 고조시켜 풀어내고 끝낸다는 점에서 마당굿이란 개념이 도입된 것이죠 지금 까지는 물론 예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배격되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틀거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전달효과가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는 반성도 없진 않았습니다. 마당극의 개방성을 지나치게 과시하지 말고, 마당극만이 순수한 것이고 마당극이 아닌 것은 순도가 떨어지는 불순한 것이라는 단선적 사고를 지양해나가자는 자성이 일고 있다는 말이지요. 서울의 연우무대에서는 마당극만을 고집하지 않고“한씨연대기” 같은 작품을 통하여 대중적 호응을 얻어내고 있지요 무대극의 요소, 예를 들어 브레히트의 사서극적 요소도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는둥마당극,마당굿만올고집하지않고여러가지 형태적 실험들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지난 6월에 있었던 “민족극 한마당" 에서도-불행하게도 저희 지역에서는 아무 단체도 참여를 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당극과 무대극의 요소가 뒤섞인 소위 총체극의 형태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형태에 너무 편중된 이야기가 되어버렸군요

이 : 임선생님께서도 많이 목격하셨겠지만 70년대에, 문화운동을 표방한 것은 아니지만 외래문화가 범람하고 대중문화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것이 되어 건전한 비판 의식을 오히려 마비시켜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통하여 이러한 것들을 극복해보자는 취지에서 탈춤 부흥운동이나 마당극운동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러한 것이 펼쳐지는 마당, 서울대의 감나무골 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어울어지다 보니까, 문화가 갖은, 곽선생이 말한신 명성 혹은 선전선동성-탈춤이나 마당극이 현실풍자를 그 내용으로 하고있으니까-으로 인하여 그 극이 마무리 될 때쯤에는 그 열기가 고조되어 자연스럽게 시위와 연결되게 되었죠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문화활동이사회변혁운동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자각이 싹트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닌가 압니다.

임 : 이런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즉 지배권에서 횡행한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에 한정된 것이었고 더구나 그 시대가 삼엄한 독재체제였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향유되기는 너무나 많은 제약이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죠 무대극의 경우 엄청난 경제적 부담 둥으로 기획 자체가 어려웠고 설사 이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검열을 통과하려다 보면 암묵적으로든 의도적이든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구조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민족적 정서에 신명을 일으키기는 어려웠던 것이지요 독재체제가 중심부 문화를 아말감식으로 합금시켜서 만들어내는 묘한 구조였지 않습니까? “말괄량이 길들이기” 혹은 “욕망이라 부르는 전차” 둥 우리 고유의 정서와는 전혀 통하지 않는 무대극들이 당시 독재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젊음의 혈기와 같은 것을 담아내기는 전혀 불가능했다는 것이지요 결국 유격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문화운동이라는 것이 의도적으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라는 생각에서 출발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연발생적으로 출발했다가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맞닿으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아나가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박 : 문화운동은 자생적으로 지배문화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태동을 하지만 이것이 동질적인 단위를 벗어나 지역이라는 영역으로 확산되게 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매개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70년대 말 80년대 초 실질적인 변혁운동이 지역단위로 진행되면서 문화운동과 지역운동이 접합된다는 얘기이지요 그러니까 문화운동 내부에서 실제로 지역을 단위로 해서 문화운동을 해나가겠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곽: 문화운동이 지역성과 운동성을 아우르며 전형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80년 광주항쟁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이 지역에서의 문화운동은 주로 서울에서 배워온 이론을 근거로 하여 출발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백제마당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극단에서는 “1876-1894”(1981)와“의병 한 풀이”(1982)를 공연하게 되는데 전자 만해도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비판올 받았는데 그 후에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의병 한풀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마당극이라는 양식에 전혀 익숙치 못했던 이 지역 관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죠

김 : 그것의 연출을 박인배씨가 맡았었죠? 그후에는 “품바’를 초청공연합니다만.

곽: 이를 통하여 상당한 돈올 벌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만, 이것이 후에 문화방송 앞에 자리를 잡은 녹두골로 이어지지요.

김 : 그러니까 탈춤부흥운동이나 마당극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되다가 정치적 사회적 운동과 접목하게 된다는 것인데,

김 : 이렇게 생각을 해보죠 60년대 이전에는 농촌에서의 삶이 와해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그 나름으로 문화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거지요. 그러다가 사회가 점점 산업화되면서 도시의 공장으로 이전하게 될 때 농촌의 문화적 양식은 전이되지 못하여 공백기가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공백기를 채워준 것이 김민기의 노래라 할수 있을 것이고 그 전형적인 예가“공장의 불빛”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이 탈춤부흥운동과 연결되고 사회운동과 접맥되면서 문화운동이라는 틀을 이루게된다는 것이지요

임 : 우리 좌담의 주제와 관련이 없는 논의가 너무 방만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이 : 문화운동이 지역운동하고 접맥되는 것이 탈춤부흥운동 같은 것들의 한계가 구체척으로 노정되면서부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탈춤은 경상도의 대표적인 문화 유산으로서 경상도나 서울에서는 대단한 대중척 호응을 불러일으키지만 호남지역에서는 대학에서조차도 별다른 호용을 얻어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문화매체가 갖는 고유의 선전선동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역에서 구체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민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에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이러한 점에 대한반성에서 즉 문화 운동도 지역주민의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매체 개발을 통해서만 그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반성에서 제기된 것이 지역문화운동이라는 것이지요

곽 : 그러나 탈춤운동이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지역의 문화운동 단체들만 해도 이의 영향하에서 발전하였고 대학의 문화 써클들도 이를 통하여 자리를 잡아나갔다고 보아야 할테니까요. 이 지역 대학에 탈반이 생긴것이 1978년경이니까 서울하고는 10년여의 상거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 :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박선생님의 아까 말씀은 다분히 이상론적인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대학 중심의 문화운동이 지역단위로 크게 펼쳐질 수 있었던 게 지역의 자발적 역량이기보다는 서울의 영향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도를 통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박 : 제 이야기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70년대 말 부마항쟁 혹은 80년 광주항쟁과 같은 구체적 계기를 통하여 튼실한 기반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 개념 규정을 위하여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우선 이런 정도로 지역문화운동의 개념을 정리해보죠
이제 80년대 후반 소위 유화국면이라고 하는 현상황에서 지역문화 운동이 가질 수 있는 의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죠 우선은 이야기의 전개상 현 상황에 대한 진단이 앞서야 할 것 같은데, 이것을 객관적 정세와 민민운동 주체세력들의 주관적 역량으로 대별하여 진단을 해보시죠

임 : 아무래도 사회학자가 먼저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박 : 의의나 과제, 이런식으로 얘기하는 것이 어색합니다만------우선 지역성은 논외로 하고, 문화운동이 가지는 특성이 정치투쟁이나 경제적 투쟁과는 달라 주로는 사물을 보는 시각과 관련한, 측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운동양식과 접맥되기 때문에, 독재의 전형적인 지배체계가 강화된 시기가 아닌 유화국면일수록 문화운동이 갖는 의미가 훨씬 강하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정치투쟁이나 경제투쟁의 경우 그 운동의 주체가 정치적 지배피지배, 경제적 지배와 종속이라는 객관적 관계 구조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가시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운동의 경우에는 민중들이 자각하여 한꺼번에 확 일어난다는 것이 어렵거든요 결국 문화운동이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적 사회운동이 선행적으로 발전해야하고,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관건이 되는 사회의 상황적 이슈와 고리를 맺어야 하지요 그렇지 못하면 문화운동이 유화국면에서 가지는 잠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정체될 위험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현 상황의 이중성 가면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떠맡아야 하겠지요.

임 : 저도 이런 얘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즉 매번 정치적인 것, 예를 들어 사회 고발적인 것만 그리던 사람들 소위 민중미술을 표방하던 사람들은 민주화가 되면 할 일을 잃는 것이 아니냐 하는 얘기지요 물론 이는 문화의 속성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사회적 상황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박선생님의 지적은 유념해야 할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광주의 경우 구체적인 이슈와 어울어지면서 현 광주의 문화적 풍토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이 : 현재 지배세력들의 유화 정책은, 구조적 모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마당에 이러한 것을 해결해나갈 의지도 힘도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지지기반도 없어 불가피하게 취해진 호도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북방정책이나 개방외교 정책도 이와 무관하지 않죠. 7·7 선언이 민족의 공존의 원칙을 천명 확인한 획기적 조치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중의 하나인 분단의 극복이라고 하는 것하고는 전혀 무관한 것이거든요. 이는 오히려 분단의 고착화 영구화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라는 판단이죠 남북한 UN 동시가입을 추진하는 것도 결국 한반도 내에 두개의 국가를 인정하는 것 아닌가요? 이러한 지배세력들의 음모는 주변의, 주로는 미국이 되겠옵니다만, 일본, 중국, 쏘련 둥의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정책과 맞아떨어지고 있지요. 소련의 우호적 태도-올림픽 문화행사를 통하여 단적으로 확인되었옵니다만-교역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의 태도도 한민족에게 있어 절대절명의 과제라 할 수 있는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문제의 해결과는 무관한 것이며 이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지배세력들의 개방 유화정책도 실제 그 내용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김 : 그렇지요 이 모든 것이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7·7선언이나 북방 정책도 민족의 현실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그 해결을 추국하는 입장에서 취해진 조처라기 보다는 우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보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죠.

곽 : 같은 관점에서 1920년대 3·1운동 이후 일제가 폈던 거짓 유확정책을 되돌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시 문화인들이 현상파 본질을 구별하지 못하고 함몰되어버렸지요 현 상황에서도 아까 임선생님께서 극단적인 예로 말씀하셨던 무지몽매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이러한 것에 휩싸여버리는 문화예술인들의 일종의 나태함이 가장 경계해야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처럼 현상과 본질을 구별해내지 못하는 나태함이 문화인들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죄악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죠.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국내적 상황과 국제적 정세에 있어 변하고 있는 껍데기와 변하지 않는 본질을 엄정하게 구별하여 현실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 즉 그것이 유화적 국면에 맞게 바뀌어야한다는 말이지요 데모도 바뀌어져야한다는 말도 하는데 그래야 되겠지요. 과거처럼 독재권력의 비리를 폭로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들을 더 깊은 철학적 차원에서 천착해가는 작품들이 문화쪽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대중들이 갖고 있는 속기 쉬운 속성을 근본부터 교정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단순하게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타도해야할 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투쟁의식을 강고하게 고양시키는 일도 나름의 의의를 갖는 것이지만 현 상황에서는 변화하고 있는 적의본질을 보다 분명하게 규명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이유를 파해쳐내야 대중성을 확보하면서 본질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닌가합니다.

박 : 유화국면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는데. 왜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이러는 것일까하는 문제를 좀 냉정하게 따져봐야 활 것 갈아요 그것은 사람들이 심리적 속성상 아주 근원적이고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에 관해서는 인식들을 잘 하지 않으려 하고 부분이 여전히 중요한 모순구조로 남아 있다는 얘기이니까 문화운동은 이러한 부분을 일단 찾아내어 밝혀주는 역할올 해야 하겠지요 요즘 농민문체나 교육현장에서의 문제 등도 변하지 않았다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변한 부분은 인정을 하고-그것이 유화국면이니까-변하지 않은 구체적 현실을 정확하게 들추어내야 한다는 말이지요

임 : 결국 어떤 추상적 개념을 잡아내는 학문하고는 달리 문화라고 하는 것은 그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시키면서 아주 실감나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작업이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예전보다 더 정치한 도구로 새롭게 탄생해야 하는 것이지요 적이 확실할 때는 “타도하자”라는 한마디로 충분하지만 이것이 헛갈리고 숨기도하고 할 때에는 드러내는 방법이 단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김 : 이처럼 변화하는 국면속에서 우리 천혜분화운동단체들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그 얘기 좀 하지요.

이 : 지금까지 말씀해주신 젓이 객관적 정세라 합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거기에 대용하는 문화운동단체들의 전략 등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점검을 해보지요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연합하려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전체 민민운동 세력들의 추세 변화와도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선 이전에도 시도되었다가 결정적 시기에 실패를 경험한 이들 세력은 좀 더 교묘해지고 세련화 된 저들의 전술전략에 대항하여 또 다시 연합전을 모색하고 있지요 민중운동연합체의 구성이나 학생운동권의 통합움직임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는데, 이에 발맞추어 문화운동단체들도 특히 금년 하반기에 이르러 연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역학술단체들의 연합연수회개최(8. 11-12), 연합심포지움을 개최했던 서울지역 학술단체들의 학술단체협의회구성(11. 6), 언론노동조합연맹의 출범(11. 16) 등이 있으나 가장 획기적인 일은 아무래도 민족 예술인총연합의 구성(11. 26)이라 할 수있겠죠? 결국 요즘의 대체적인 상황이 진지전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즉 개량적 유화정책 및 지배이데올로기의 세련화를 통해 현상유지를 획책하는 수구세력과 유화국면을 통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유화적 재스처의 실상과 지배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 궁극적인 변화를 얻어내려는 민민세력이 거대한 전선을 형성해 나가고있다는 얘기이지요 그래서 문화운동도 예전의 유격적인 형태의 전술보다는 장기전에 대비한 전술전략을 구축해야하고 이러한 인식하에서 연합전선 혹은 통일전선의 형성을 당면과제로 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김 : 상황이 변해가니까 운동도 변해야겠지요 총체적인 싸움의 형태로 말입니다.

이 : 이러한 상황예서 문화운동의 커다란 틀은 이데올로기투쟁, 즉 개량적 유화정책의 이면에 숨겨있는 지배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더 나아가 민중을 중심으로한 튼실한 이데올로기를 확보해나가는 작업이겠지요. 사회변혁을 위한 구체적 싸움에서 선전선동의 역할을 꾸준히 수행하는 반면 실질적인 변혁을 담보해낼 수 있는 의식의 변화, 풍토의 변화를 위해 지역현장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지역 문화운동이 해야할 과제 혹은 그 의의라 정리할 수 있겠옵니다. 이제 이런 정도로 정리를 하고 주로는 올해의 활동에 촛점을 맞추어 이 지역 문화운동의 현황을 점검해 보기로 하죠. 우선의 제가 지난번 9월호에서 원론적인 문제 제기를 했었는데 이에 대한 전반적인 명가와 더불어 말씀을 해주시지요. 전반적인 명가는 대부분부정적인 것으로 1) 너무 원론적인 것으로 현장의 목소리가 배재되어 있다.2) 이 지역 외 현황으로 볼 때 격려의외미가 앞서야 하는데 애정이 결핍되어 있다. (이 부분은 제 자신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만) 3) 문화운동의 앵상은 다양할 수 밖에 없는데 너무 도식적이었다 둥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김 : 그러한 작업이 전무한 상황에서 각 부문에 그러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소개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이 : 우선 문학 쪽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하죠 전북민족문학인협회가 구성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대 아무런 구체적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 않는 듯한데, 더구나 나름으로 확실한 작업을 해 나오고 있던 동인지 “남민시”까지를 흡수하고도 그 만큼의 역할도 옷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김 : 사실입니다. 단체구성의 당위성만 인식했지 사견의 충분한 논의나 준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급조되었다는 대 그 원인이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재가 명색이 회장인데 저 자신도 이 단체가 구성될 때 어리둥절했었거든요. 우선은 제 책임이 크고요, 결국 구성원들 모두의 책임이지요.

이 : 방금 당위성애 대한 인식은 되어 있었다고 하셨는데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김 : 가령 전북의 문학현실이 우리시대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파 전혀 동떨어진 무풍지대에 처해 있었다는 반성, 예를 들어 전북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문인들이 활동을 하고 있고 나름의 동인지들을 펴내고 있지만, 그것들이 이 지역의 특성을 담아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전반에 걸친 일반성과 연결되지도 못하고, 한마디로 옛날 낭만주의적 문학운동-이것은 분명 운동도 아닙니다만-을 하고 있다는 진단하에 이률 극복하려는 작업이 집단적으로 수행해야 된다는 인식은 전체되었다는 얘기지요

이 : “전북문학” “표현” “전북수필”“문학과 의식”둥 어느 지역에 못지 않게 많은 문학잡지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김 : 난 어려운 말은 잘 모르니까 쉽게 말을 하자면 쓸데없는 문학, 자기자신에게도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문학이 횡행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일제 말의 현실 도피주의나 6·25직후의 허무주의적 패배주의적 성향이 아무런 걸림 없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지요 실제 많은 문학인들이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옛날 신석정선생님 시절만큼도 못한 한마디로 답답한 문학판이 벌어지고 있지요(웃음) 그러한 속에서 젊은 문인들이 우리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점을 접어내는 문학운동을 펴나가야 하겠다는 당위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죠. “남민시”의 경우도-사실 나중에 나도 참여를 했었옵니다만-약간은 몸부림을 해보았지만 실제로 나중에는 또 다른 하나의 잡지라는 의미밖에 갖지 못하게 된 거죠

이 : 그러나 표방하고 있는 것을 보자면-적어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하면-바람직한 것 아니었옵니까?

김 : 물론 처음은 그러했지요. 그러나 나중에는 책을 묶어내는 것 자체에 만족해버린 느낌이 들고요. 관여했 던많은 분들이 다를 분야로 빠져 나가버렸어요. 최동현은 판소리로, 박두규는 교사운동쪽으로, 박남준은 연회쪽으로 빠져나가면서 흔들리게 된거죠. 운동성도 부족했고요.

이 : 당시의 시대적 조류에 편승했다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를 들어 자실이 민족문학인협의회로 변신한 것이나, 김남주 이산하 둥 구속문인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된 것 둥 말이죠 그렇다고 형이 말씀하신대로 패배주의에 찾아서는 안 될것 같고요 (웃음), 용기를 내시고 앞으로의 전망이나 과제에 대하여 말씀올 해주시지요

김 : 물론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다. 또 없어져서는 안될 단체라는 믿음도 있고요 우선은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규합해 볼 생각입니다. 또 내년에는 무크지도 하나 낼 거고요 단순히 수 많은 잡지 위에 또 하나의 책을 보내는 식이 되지 않도록 애롤 쓸 것입니다.

이 : 이론적 틀의 부재가 하나의 문제점으로 재기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을 규합하는 김에 문학운동에 있어 이론적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포섭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요 너무 작가나 시인중심으로 하지 말고------이러다가 또 애정이 결여된 논의라는 비판을 받는 것 아닙니까? (웃음)이제 연극쪽으로 이야기를 돌려 보죠
곽: 어떻게 보면 연극은 오히려 훌가분한 편입니다. 구호를 외친 사람이 없으니 구호만 외치고 일은 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우선 면할 수 있으니까요

이 : 그렇다면 문제의식조차 없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곽: 오늘의 논의가 운동성을 표방하고 있는 문화단체들에 관한 것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연극은 거론의 대상에 끼이지도 못한다는 얘기이지요 연극인들이 어떤 예술성이나, 정치사회적 의식을 가지고 연극에 임한다기 보다는, 연극행위가 가져다주는 일종의 환각과도 같은 자기위안 내지는 자기만족의 차원에서 연극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일종의 눈이 먼 막연한 갈중상태라고 할까요? 지금전북지역에는 “시립극단”파 “황토”가있는데, 전자가 문예진흥원과 시청의 정책적인 후원으로 유지되는 극단이라고 볼 때, 자생적인 것은 “황토” 하나라고 해야겠죠 그런데 이 극단이 선정해 레퍼터리 중에는 ‘운동성’을 띠고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이것이 스스로의 진지한 논의를 통하여 선정한 것에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로는 서울 쪽, 특히 ‘연우무패’의 작품 중 인기있는 것, 예를 들어··면망에 쑤짖는 새”나 “철수와 만수”등을 단순히 리바이벌한다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어요 그러나 극단 하나 꾸려 나가기가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올 인정한다면, 여러 가지로 열악한, 인구 40만의 소도시에서 몇 년 동안 중단없이 작업을 해온 것은 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 운동성을 표방한다하더라도 존립자체가 어려우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 역사와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전망을 가미한다면 충분히 그 몫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온고을”의 건강한 운동성과 “향토”의 자립능력이 합해진다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박: 아까 문학을 얘기할 때도 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다는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이런 현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방향성이 없다거나 운동성이 미홉하다는 점은 분명 문제점으로 지척이 되어야하지만, 그런 토양 자체는 지역문화운동을 검토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극단이 갖는 생명력도 일단은 키워나가야 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 “꼭두”나“우리마당’도 한번 짚고 넘어갈만 하잖아요? 그 출발은 아주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곽: 제가 간여한 것들이라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처음부터 극단이라는 이름 대신에 ‘연회동인’이라는 이름으로 출발을 했지요 전통적 기예의 습득과 이 시대에 맞는 민족적 형식의 개발에 주력하며 지역성을 충분히 살펴보자는 게 취지였지요 그러나 인적, 물적 어려옴으로 중도하차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공동창작을 시도하여 상당한 작업의 진척이 있었옵니다만, 시간상의 여건 때문에 공동착자체제를 탈피하여, “우리동네”라는 극단으로 변신 창단공연까지는 했지요. 그것이 작년 2월의 일인데 그 이후로는 아무일도 못한채 그 한계성만 노출시키고 말았죠. 제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기도합니다만, 아까 말씀드린 황토의 대중성과 온고을의 운동성의 결합은 새로운 단체가 나타나야 가능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알고있는 바에 의하면, 그 어느 한쪽도 다른 한쪽으로의 변신을 꾀하기가 어렵다고 보거든요.

이 : 연극 이야기가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온고을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말씀드리자면, (이 자리에 정형수씨가 나왔더라면 훨씬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을텐데), 지난번 전북대 초청공연으로 “통일염원 큰 굿판”을 했었는데 열기도 대단했지만 관객도 천 여명이 훨씬 넘어 전북대내 공연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또한, 초청공연이기는 합니다만, “노동의 새벽”도 대단한 대중적 호응을 얻었지요. 그래서 아직은 미흡하지만 대중적 공감대를 획득해가고 있다고 봐주어야 할 것 같고요, 또 물적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햄들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어야 하며 더욱 많은 관심과 격려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예를 들어 운동관계자료들을 정리하여 보급하는 일은 물적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뿐만 아니라 운동의 확산이라는 의미에서도 의의 있는 작업으로 평가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곽: 단순히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온고을이 해야할 본연의 일은 아닐것이고, 그것에 의한 수입도 별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0| : 이제 문화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각 대학 문화패들의 얘기를 해보지요 문학과 연극 분야에서 말입니다.

김 : 현재 전북지역의 대학에는 각각의 문학써클이 있는데, 민족문학인협의회에서 기대를 거는 게 기성의 문인들이라기 보다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죠. 서로 정보교환도 하고 작품을 모아 공동창작집도 내놓을 계획을 하는 등 나름대로 활동을 하고 있읍니다만 민족문학인협의회가 지지부진하니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죠.

이 : 그런데 지난번 5개 대학 연합으로 기획한 시낭송회는 문제가 많았던것 같은데요?

김 : 정말 그렇습니다. 문제 정도가 아니라 ‘큰 일 났다’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그날은 이소선여사가 내려와 시내에서는 데모가 한창이었는데, 그곳을 가보니 완전히 딴 세상이더군요 기성문인들의 문학활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고여있고 썩어있는’ 분위기라고 해야할지------바로 이러한 점올 바로잡고 분산된 역량을 전북문학운동의 힘으로 끌어내야 할 책임이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에 있다 하겠습니다.

곽: 연극쪽은 제가 주로 전북대 연극만 보아와서 말씀드리기가 퍽 어렵습니다만------도내에는‘전문대를 포함하여’ 12개 가량의 대학연극반이 있습니다. 대단한 숫자이지요. 이 극단들이 모여 ‘대학연극협의회’를 결성하여 전국 어느 곳에도 없는 ‘대학연극제’를 하고 있지요 별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만 올해 막상 건너뛰니까 아쉽더군요. 전북대 연극반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연극이 갖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자각이 개안의 수준을 넘어서서 이제 깊이 있는 이론적 천착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실질적인 작업도 이루어내려고 하는 많은 노력이 엿보이더군요. 하지만 아직도 기존 연극인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으며 또 자신들의 운동역량을 현실속에서 적극적으로 발휘하지는 못하고 무대를 통해서 이루어내려는 우상심리가 있다는 점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스스로 많은 반성을 하고있는 부분이기도 하여,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운동성은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대학이 시내극단에 비하여 훨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예를 들어 공연장과 연습장이 있고 시간이나 인적 자원이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전북대 기린극회의 가능성을 제외한다면 치열한 운동의식으로의 무장 둥 기본적 바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임 : 지역문화운동은 학생운동과 구분지어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물론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겠지만 학생문화패들의 활동은 주로 학생운동의 부문운동이라는 의미를 더 갖는 것이니까 문화운동을 논의하면서 다룰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곽 : 좋으신 지적인데,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학문화패들이 사회 문화운동이 실질적인 일꾼으로 자라는 것이니까 함께 살며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임 : 그러나 상황이 전혀 다르잖아요? 적어도 대학에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가 않지만 사회에서는 스스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운동을 해나가야 하거든요. 또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만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뒤따라다니며 박수만치고 있는 팔이거든요. 장을 완전히 따로 설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구분은 짓고 논의를 했으면 해요.

이 : 예, 우리논의의 주관심은 물론사회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문화운동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학문화패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부분적으로 학교 밖의 문화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논의를 미술계쪽으로 돌려보지요 요즘에 와서 상당히 부산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는 듯 하던데요

임 : 미술쪽도 아직 미약한 수준입니다. 전에 제가 이리의 “땅” 둥에 관하여 썼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상당한 편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해요 비록 일천하고 볼품이 없지만 초기단계이니까 애정을 가지고 봐야되지 않겠느냐 하는게 제 입장이었지요. 미술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은 작년부터라고 해야할 것같아요. 대학내에서도 몇개 서클이 생기고, 이 고장에서 나름대로 사회현실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겠다고 “들, 바람, 사람들”의 모임 활동이 시작되니까요 구체적인 결과물로는 작년, 올해에 걸쳐 만들어진 세 개의 벽화 (정읍, 모래내, 전북대)를 들 수 있겠습니다. 송만규씨를 중심으로 여름캠프 둥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들을 하고있어 이제 출발단계이지만 점차 확산되어갈 전망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물적 토대의 확보가 중요한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람들이 직장이 잡히면 떠나가 버려 실제 벽면이 확보되었는데도 작업을 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지요 또‘들, 바람, 사람들’은 연배가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열의가 부족하고요. 문제는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연대하여 하려는 것인데,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각기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에 모여 공동작업을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공동작업은 익명성을 띠는 것이어서 확고한 문제의식 없이는 자본주외 사회에서 성사되기 어렵다는 점도지척을 해야하겠습니다.

김 : 그런데 미술이야말로 공동작업이 가장 용이한 분야 아닌가요?

임 :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실제로 많은 공동의 작품들이 생산되고 있습니다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의 강제적 동원력에 힘입지 않고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미술판은 요즘 살 맛나는 움직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우리 학생들이 이제까지의 살롱미술이 안고 있는 많은 부정적 요소를-가장 단적인 것이 민중들과의 용이한 접촉이 불가능하다. 결국 소시민적 소수 지식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일텐데-에 대한 반발로 그림을 시장으로 가지고 나간다거나 벽화를 시도한다던가 하는데, 이제까지 너무 부조리한 상황이 지속되어서야겠지만, 이것만이 천부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이러한 작업에만 열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주었으면 해요 벽화가 하나 환성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의미 또 그 내용 및 민중과의 호흡 등이 철저하게 점검되고 반성되지 않는 다면, 그래서 ‘화랑미술을 타도할 수 있는 역량을 이 벽화를 통하여 실현해냈다’라는 자위에 빠져버린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죠 그런 점에서 저는 출판미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벽화에 비하여 혼자 즐기기도 용이하고 또 다량의 복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출판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앞으로 새롭게 담보해낼 부분이 많으리라 봅니다.

곽 : 가령 엽서운동 같은 것이 바로 그 일환이 아닐까요?

임 : 엽서, 달력 둥이 물론 그 속에 포함되긴 하지만, 특별한 목적을 더욱 구체적으로 담고있는 본격적인 출판물을 저는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힘든 작업이 되겠지만, 저는 앞으로 문자, 그림, 사진 등을 복합적으로 활용한, 종합시각 매체를 통한 작업을 시도해보려 합니다. 그림으로 불가능한 것은 글로 표현하고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진을 이용한 등 출판미술이 새로운 현대적 매체로 기능할 수 있는 면을 시험해 보겠다는 것이죠-

김 : 그림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니까 판화 동을 통하여 농민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또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라는 의식을 심정적으로 키워주는 작업은 매우 소중하리라고

이 : 그러나 민중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야 한다는 당위야 물론 인정을 해야겠지만, 그것이 관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혹 실제 건강한 그들의 모습 대신 억압받고 핍박받는 계층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해서 찡그리고 있는 궁핍한 모습으로만 담아낸다면 당사자들로부터도 배척당한다는 점도 유념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는 민중문화 혹은 민중예술의 문제점으로 흔히 지적되고 있는 상투성, 단선주의와 연결되는 얘기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임 : 모든 것이 진정한 사랑과 애정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얘기이지요.

김 : 운동 그 자체가 운동에서 시작되어서는 안되고 굳건한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고요

이 : 그러나 현실적인 삶만을 너무 내세우게 되면 그것에 함몰해버릴 위험도 없지 않지요. 현황의 점검보다는 문제점의 도출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우선은 학술운동 얘기를 마저 듣고 각 부분이 안고 있는 문제점 및 전반적인 문제점들을 살며보도록 하지요

박 : 전국적인 차원에서 보면, 대체로 70년대 말 종속이론의 도입과 연결되겠는데요,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있어 이론적 틀의 결여가 중요한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모든 문제가 잘못된 이념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진단하에 이에 대항하는 논리를 창출해 내야 할 필요성이 부각되자 이러한 작업을 전담하는 연구자 집단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에 이르렀죠 전북의 경우에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인 분위기와 상황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지만, 그 나름대로 지역에서의 운동적인 측면과 관련하여 학문활동이 담당해야할 부분이었다는 인식이 학술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이 인식이 결국 호남사회연구회의탄생을 보게 되었는데, 처용에는 전북대학교수들로 한정이 되었다가 1주년을 기하여 도내의 여러 대학으로 확산되게 되었지요 현재 심포지움과 월례발표회 등의 활동을 실행하고 있는데, 앞서 지역문화운동을 문화운동의 지역적 전개로 볼 것이냐 아니면 지역운동의 문화적 전개를 봐야 할 것이냐 하는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전자의 경우 즉 한국 전체에 대한 학술적 논의체계가 전북이라는 단위속에서 논의되는 차원이라면, 호사연이 어느 정도 초보척인 단계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으나, 만약 전북지역이 가지고있는 제반 구조와 문제를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이론적으로 점검해내며 전북지역의 제반운동이나 변혁욕구, 혹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부분까지를 객관화하고 표출시키는 것이 전북학술운동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호사연의 역량은 매우 낮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구 지사연의 경우 3회 심포지움을 가졌지만 그 주제가 대구, 경북지역과는 무관한, 전국적 차원의 것이어서 지역적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내부적으로 거론되고 있지요. 저의 화사연의 경우는 처음 지역에 대한 검토부터 시작을 했지만 이론적틀이나 운동론적시각의 결여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지요 한두 사람이 좋은 논문을 써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결국 집다적인 논의와 토론을 통하여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데 모임자체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 상황이지요. 그러한 희망적인 것은 준회원 (대학원생)들이 보여주고 있는 열의와 적극적인 토론자세입니다. 이들은 쉽게 현장의 문제와 연결하면서 교수들이 확인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아프게 비관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토론구조가 취약했던 이 지역에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토론문화를 정착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한 논의가 지역의 다른 영역과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 것인가가 당면과제로 제기된 셈입니다.

이 : 이왕 앞으로의 계획도 말씀을 해 주시지요

박 : 사실 학술운동쪽에선 이런 논의과정속에 주저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학술단체의 전반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저희 호사연을 놓고 본다면 지역문화운동천체와 비교해 볼 때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정도나마 하고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위험부담이 타부분에 비하여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월례발표회를 더욱 충실하게 해 나가고 문화활동도 적어도 일년에 2회 이상 개최하며, 내년 5월 호에는 지역문제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위한심포지움-을 가질 예정입니다. 물론 활동상황릏 종합하여 회보와 회지를 낼 것이고요. 회지가 종합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즉 시나 소설과 같은 것도 실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희지는 학술지로의 성격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북지역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연구활동이 하루 빨리 시작하는 것과 이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학교 밖에 있는 분들과의 합동연구를 추진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현장의 문제나 중등학교 교과서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전교협 둥의 단체와 교류를 갖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 이제까지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지만 많은 다른 부분들이 빼져있기 때문에 미흡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각 부분에서 여러가지 문제점 및 과제가 제기되었는데 이제는 전반적으로 걸리는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지요. 우선 제기된 문제를 정리해보면 1) 이념적 지향성의 결여, 이를테면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데도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 다른 말로 하면 운동성의 결여라 할까요? 2) 대중성확보의 문제. 이와 더불어 제기될 수 있는 예술적 형상화 내지는 세련화 문제 3) 지속적인 작업을 위한 재생산구조의 확립 문제. 4)연대문제-이와 결부하여 분파주의적 경향의 문제 등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곽 : 분파주의를 거론하는 것은 적어도 이 지역에서 이른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파를 이룰 만한 독립척인 튼튼한 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봐야 하니까요

박 : 이론의 부재를 탓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논리화나 이론화작업이 변혁운동의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임 : 결국 전북지역문화운동의 개념이 정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이률 위해서는 우선 전북이라는 아이덴티티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미술쪽에서는 전북미술이 근간으로 하는 전북의 정서를일단 농촌정서로 전제로 하고 있지요 전북이 흔히 말하는 농도이니까요 그러나 소비지향의 폐해도 적지 않고 그러한 의미에서 건전한 도회지문화의 육성에도 많은 관심올 가져야 하리라 봅니다만, 그럼에도 농촌정서에 바탕을 두고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박 : 농업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 한국의 전반적인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농촌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 가를 구체적 현장점검을 통하여 추적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임 : 결국 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얘기이지요? 전남지역에선 몇몇 현장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 : 한 개인의 사회사를 충실히 드러내는 작업은 대단한 의미를 지니리라 생각합니다. 방학기간 둥올 이용하여 농촌현장에서 일정한 기간동안 살아가면서 여러 분야의 사랍들이 공동조사를 하는 것이 그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요

곽: 요즘 문학분야에서 민족 문학의 주체논쟁이 한창인데, 이중에서 박노해나 여기 계신 김용태선생님과 같이 현장에서 쓰는 사람만이 순도있는 민족문학가가 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방금 말씀들 하신 문제와 연관되다고 할 수 있을텐데, 저는 그런 부분에서 가장 난감한 게 연극이라 생각합니다. 연극의 경우에는 극이 담고 있는 내용하고 그 공연방식하고는 굉장한 괴리감이었거든요 이러한 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산된 작품에 관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쑥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만, “꼭두”에서 대본을 만들 때 실제김 제 만경 황산 미군기지 옆의 한 마을을 잡아 그곳을 직접 방문하여 그 곳 주민들과 직접 접촉을 하면서 작업을 했었지요 그러나 유의할 점은 잠깐한번씩 들려 가지고 현장성을 표방한다는 것이 어줌잖은 일이라는 점이지요

김 : 그것은 발상부터 틀려먹은 것이지요 
곽: 또 하나 개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데, 이런 작업을 하여 과연 누구에게 보여주느냐 하는 점이지요. 역사에서 철두철미 소외된 사람들을(사실은 주체인데)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또 그것을 예술회관과 같은 곳에서 소위 중산층이나 소시민적 지식인들에게 펼쳐 보여주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고 있죠. 그것을 가지고 농촌순회공연이라도 해야하는 게 아닌가하는 점이지요.
임 : 저는 그것에 관하여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용택선생이 시를 썼을 때 그 독자가 누구입니까? 제일 가까이 있는 동네 사람들만을 위하여 쓴 것이냐 하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지요. 또 가끔 한번씩 찾아가는 것도 찾아가지도 않고 관념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나 아예 관심조차 없는 사람보다는 훨씬 나운 것이지요. 최소한 그 순간만은 진실과 만나게 되고 이게 거듭되면 심오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고요

박 : 연극뿐 아니라 사회학 분야에서도 그렇겠지만, 결국 한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사실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인을 그렇게 만들어온 구조이며, 그 개인도 한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전 형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그것을 연극 등을 통하여 도회지의 중산층에게 보여준다는 것도 민중의식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죠. 적어도 농민들이 시위를 하거나 학생들이 통일문제를 제기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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