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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 | 특집
창간 1주년 문화저널에 바란다
전북 노련 전주지역 협의회 기획부장(2003-12-24 11:09:38)

문화의 대중을 위한 잡지 - 위행복 (전북대 중문과교수)


문화저널이 벌써 통권 11호를 기록했다.
먼저 척박한 풍토에서 지금까지 잡지를 이끌어온 편집진에게 경의를 표한다. 문화운동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가 수고하는 편집진에게 드리는 말이 억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몇 마디 한다.
문화 저널을 대하면서 필자가 느낀 점은 스스로가 추구하는 문화에 대한 개념을 확립해야 하겠다는 점이다. 무엇을 위한 문화이며 누구를 위한 문화인가?
문화가 문화 그 자체를 구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대중에게 뿌리박은 그래서 그들의 피와 눈물이 표현되는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문화저널”이 추구하는 바라면 이 잡지는 보다 선명한 방향성을 드러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잡지는 그들의 언어로써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을 대상으로 한, 그래서 그들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창조를 시도해 봄직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백 번 양보해서 잡지의 독자층은 차치 하더라도 잡지가 추구하는 문화를 향유할 주체는 이 땅의 대중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 운동이 인간의 정서적 차원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문화창출의 담당자들은(호소 대상들의 정서가 뿌리박고있는 우리의 것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우리의 것을 탐구하고 천착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잡지가 연재물로 엮고있는 기획시리즈나 백제기행 둥은 의미 깊은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 만족한다면 약간은 현학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창조의 선행단계로서 의미를 부여받아야 한다. 어찌 초가집을 다시 지어내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이겠는가? 그렇다면 이제 잡지는 자신의 성격규명을 보다 분명히 하고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의 대중에게 보다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문화의 창조까지로 논의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질박한 대중들의 삶을 건강하게 표현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 사회를 올바로 인식하고 당차게 살도록 이끄는 ‘아름다움을 갖춘 문화야말로 운동의 차원에서 추구해야할 문화일 것이다. 전달 할 내용이 여과되지 않았거나 대중에게는 생소한 형태로 전달된다면 우리가 바라는 선전선동의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 대중을 매료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형태의 원천은 민중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민중들이 집단적으로 만들 낸 문화에는 그들의 삶이 살아 숨 쉴 뿐만 아니라 그들이(아끼고 바라는 형식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전통문화는 대중과 밀착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창조의 원천으로서 쓰여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 써서 손에 익은 부대에 새 술을 담아보는 시도를 본 잡지가 적극적으로 주도해 보는 것이 어떤가?
끝으로 이 지방의 문화를 소개함에 있어서도 전문가의 비명을 소개하는 것만이 아니라 엄선된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 지면을 할애하여 독자가 스스로 읽으면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대중에게 뿌리박지 못하는 서구문화의 아류들을 소개하는 지면을 아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필자가 말한 것은 잡지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민족과 민중에 뿌리를 둔 주체적 문화창조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제는 잡지가 스스로의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문화저널을 아끼는 독자로서 문화저널이 출판의 홍수 속에 표류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잡지가 대중과 함께 어우러져 어깨춤을 둥실대는 신명나는 한판을 만드는 날을 기다린다.



칼을 뽑아라 허위문화의 거대한 뿌리를 향해 - 한긍수(전주시 인후동)

작년 6월, 뜨거운 함성이 세상의 光度를 바꾸고 있을 때, 한쪽에서 전북지역 문화에 관한 어떤 정기적인 팜플랫 간행을 준비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오라, 또 웬 문화병자들이 준동하는구나”원두커피 맛있게 마시면서 바이올린소리에 지긋이 눈감을 줄 알고, 국악의 고장답게 판소리도 한 가락, 시는 이럽네, 연극은 저럽네 주접 떨다가 스스로 도취되면 뜸금없이 문화 운동론까지 펼치며 난도질하는 예술의 병이 깊은 사람들. 이런 문화병자들이 간혹 솟구치는 열정과 사명감을 억제치 못하여, 몸소 ‘문화운동' 을 실천하겠다고 크게 나서기는 하되 그 뒷 소식은 통 알려주지 않은 일들에 어지간히 질려있던 터라 소문을 접한 첫 느낌은 대수로울리 없었다.
떠오르는 문화병자들의 면면도 가관이었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 방송 PD, 연극연출가 미술계 무용가 등등에 시인까지, 얼씨구 골고루 구색용 다 갖췄구나. 이 사람들아 당신들 대낮부터 벌건이 취해 써내려 가는 사이비 예술가들은 아니어서 다행이로되 당신들 하고자하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았더냐, 그 일만 가지고 매달려도 될 둥 말 둥 인대 당신들 바쁜 볼 일 다니면서 틈틈이 취미 삼아서 ?
찬바람은 날지언정 뜨거워진 선거정국이 흥미진진 딴 데 한눈팔 틈이 없던 작년 11월 중순.
책상 위엔 얄팍하나마 날씬하게 잘빠진 책자 하나가 어엿하게 놓여 있었다. 문화저널 창간호였다. 빗나간 예상. 문화저널은 표지부터가 도저히 지방지답지 않게 모던하고 스마트했다. 정확히 20쪽의 문화저널은 또 편집의 세련미가 전통있는 중앙지 뺨칠 경지였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적어도 특히 활자 매체에서 우리가 지녀왔던 촌스러움에 대한 컴플렉스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충분’을 넘어서 차라리 촌놈 상당히 주눅들게 하였다.
흥분 ! 기대에 찬 흥분은 그러나‘문화저널’이하는 제호를 되씹으면서 상쇄되기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저널의 속성에 대해 아예 혐오스러워 하는 축이며 그것은 저널(리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보수성 때문이다. 이들의 보수성은 가끔씩 돌출하는 반동들의 저돌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진보를 가장한 저널리스트들의
흔들림없는 보수성, 그 지긋지긋함이란 !
그런데 실상 수상쩍은 것은 문화저널이 ‘창간사를 싣지 않은 점이다. 대저 어떤 것이 새로 태어날 때는 ‘그것이 무작위에 의한 것이 아닌 바에야 작위의 뜻을 밝혀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문화저널이 왜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 아니 어째서 나와야만 하는지 그 당위성을 당당히 내세웠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략한 것은 겸손이 아니라 매우 무책임하고 무정견한 짓이다. 문화저널은 제2집에 가셔야 ‘문화예술정보지’임을 표방했지만 그 기초는 창간호의 권두칼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창간호 권두의 저널칼럼은 “지방문화가 정체돼 있다. 이를 극복하기위해 뜻있는 젊은이들의 문화저널을 펴내게 되었다. 이는 향토문화 창달을 위한 ‘문화운동’이다”라고 전제한 후 지방문화 정체성의 이유를 ‘官의 정책부채로 인한 문화의 중앙 집중화와 그로 인한 지방의 문화공간 부족과 시설미비”에서 찾았으며, 결론적으로“높은 수준의 문화시설을 통한 지역적 평준화”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였다. 그런가? 지방문화의 정체가 지방 문화 공간의 빈곤과 시설 미비, 문화정보의 부재에서 기인하는가?
문화는 여가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의 산물이다. 참된 문화는 일상의 삶과 유리된 색다른 체험에서가 아니라 치열한 짧은 포양애서 빚어진다. 문화는 소비가 아니다. 창조 행위이며 그 결과 외 산물이다. 우리 삶의 차원을 벗어나서, 삶을 규정하는 사회 ·경제 ·정치의 총체적 구도와 별개로 하는 그 어떤 것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행세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허위 문화’이다. 삶의 문화가 아니다.
딱히 언제부터라고 짚을 수는 없지만 오늘날 5천년 전통의 한국문화, 또 예향이라 불리는 전북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불행이도 허위문화이다. 서구문화, 식민지문화, 지배계급의 문화, 이런 허위문화가 전통문화, 민족문화, 민중문화 등 삶의 문화를 몰아내고 서울의 문화를 지배해 왔으며, 이같은 중앙의 허위문화는 반도 구석구석까지 범람해 모름지기 중독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판에 그나마 가치 기훈 조차 명확하지 않는 문화정보의 제공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지금 요구되는 것은 제도권 문화에 대한 정보나 이를 수용하기 위한 공간, 시얼, 매체가 아니다.
문화저널의 몫은 허위문화와 삶의 문화의 대결 속에서 양자간을 구별짓는 혜안을 키워주고, 그리하여 문화에 대한 중독된 허위 개념을 해독시켜 주며, 싹트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들풀같은 민중문화에 자양을 주고 북돋는 일이다. 이 몫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으로 새롭게 기여할 수 있단 말인가. 
문화저널은 ‘작가를 찾아서’, ‘백제기행’, ‘카메라 기행’ 등이 전라도의 기골찬 정신과 숨쉬는 정서를 전해주고, 전북지역 문화운동의 현황을 점검하고 방향을 모색해내는 몇몇 기획물이 나름대로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문화저널이 허위문화의 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한 인상이다.
문화저널의 사설 격인 저널칼럼은 통일된 시각을 견지하지 못하고, ‘문화정보’란은 지방지의 문화면 차원과 다르지 않으며, 시평(時評)은 주로 소위고급예술에 맞춰져 있다. 지난 6월호 이래 문화저널은 문화 운동적 지향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문화정보지’임을 표방하는 한 문화주의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어쨌든 문화저널은 창간 1주년을 맞기까지 전북지역외 문화가에 신선한 새바람이었다. 이제 질적인 도약을 선언하라. 그리하여 맨 먼저 정보지의 탈을 벗고 비명의 칼을 갈아라. 결연한 자세로 허위문화의 거대한 뿌리를 향해.


문화저널에 바란다. - 오정요(전주시 고사동 1가 23-1)

“문화저널에 바란다”라는 제목을 잡아놓고, 그 간와 문화저널 11권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우선“벌써 이렇게나-----” 싶은, 그간 외 많은 분량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그냥 독후감 정도라 해도 좋고, 몇가지 바램을 적어 보고자한다. 문화저널이 앞으로 더 보탰으면 하는 것, 또 더 자세히 다루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것 등을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내 바램의 첫번째는 문화저널의 정보 전달이 조금만 더 친절해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 일어나는 문화예술 정보를 모두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우리는 문화저널을 보면서 “어디에서 무엇이 전시된다”는 단순한 정보보다는 이러저러한 설명도 곁들여 그 행사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어떻고 문화저널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그런 소식을 전달받고 싶다. 이런 것을 “흔히 말하는 ”목적의식적인 기사’라고 한가보다. 보는 삶의 필요에 따라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시요 보다는 문화저널의 입장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도록 애썼으면 한다. 물론 문화가이드나 시평을 통해서가 아닌 전반적인 기사가 그리됐음 싶다.
둘째로 오늘 문화 예술 행위에 대한진단과 평가를 너무 조급하게 서두를 것도 아니며, 또 그 자체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는 진단과 평가를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진단 방향을 조금 바꾸어 보는 것이 어떨런지 한다. 예를 들어 6호의“저널이 본다”에 실렸던“중동학교 무용교육에 있어서의 창작무용”이라는 기사가 우리에게 주는 힘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문제는 쉬워진다. 그 기사에는 문제에 대한 대안이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어떤 문화매체에 대해서 또 그 내용에 대해서 많은 문제점이었다는 지적을 하여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문제점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럼 어떻게 하지 ? ” 하면 막연해지고, 그 만큼 그런 문제의식은 쉽게 퇴색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좀 이러저러하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일들 사실 이런 작업은 좀 힘겹고 비참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러저러해야 하는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잘 안되고 바램만 있다보니 슬퍼지고 비참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아니라, 그 문제점에 대해서 대안이 나오면 그거야말로 참 듣기도 쉽고 이해도 쉽고 그렇다. 놀라운 것은 그 대안의 실천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새로운 것에 대한 자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다만 그것을 찾지 못 한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우리들의 문화”를 찾아내고 소개하는 그런 기쁘고도 기쁜 일들을 찾아 조금만 더 바빠졌으면 하는게 나의 또 하나의 바램이다.
마지막으로”백제기행”에 대한 생각이다. 물론 백제기행을 한번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취지나 그 동안의 기행들은 문화저널 지면을 통해 알고 있다. 먼저 그 취지에 대해서 이 지역의 한 사람으로 반갑게 생각하며 그 첫 기행으로 고부를 잡았던 것도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첫 기행 경우 ‘고부’ 그 자체가 지니는 의미에 부담을 가진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기행문을 쓴 작가도 말미에 ”우리는 캐케묵은 기왓장에만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부 태인 땅에서 오늘경운기를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나기도 해야 할 것이며 ”라고 했다. 진정 그렇다. 그런데 지면을 통해본 고부기행은 고부와 녹두장군의 무게 때문인지 참말로 경운기를 끌고 가는 오늘의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거만 같다. “옛날에 녹두장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하다가 죽었는데 ”가 되면 안된다. 이 이야기는 “황토현에 서면 얼마나 가슴 벅차오르며 다시 한번 마음을 곧 추세우고 그가 자랑스러운지. 그리고 그의 혁명정신을 오늘에 일깨워” 하는 그런 마음이 안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역사는 쉽게 잊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럼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세번째 기행문인 “쌀의 수난사”톨 읽으며 진정 잊어먹지 않을 자신이 있는 “지난 시간”을 만났다. 이 기행문운 감동을 주었다. (어떻게 다 말하지 ! ) 땅 사람들은 어떻게 밥을 일 구워 왔는지”가 낱낱이 전해오고 있었다. 물론 쌀의 수난이 오늘날에야 없어진 것이라면 이 기행 자체가 의미가 없었겠지만, 적어도 이 기행은 막연히 “계속되고 있다”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이어 받아야한다” 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무슨 경로를 거쳐 이어져오고있으며,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았으며 그 아버지외 아들들은 또 그것을 어떻게 매꿔 살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담담하게 조리있게 말하고 있었다. 기회가 있다면 혼자라도 가서 만나보고 싶은 땅이고 사람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두번째 기행인 지리산은 그 내용에 있어 미흡한 것 같았다. 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답한다는 것은, 그리고 백제기행이 지리산에 오른 것은, 지리산의 풍수나 그 주위사람들의 삶도 중요하지만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일들, 불과 얼마 전에, 녹두장군 시대보다 훨씬 더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던 일들, 그것을 알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었을까? 분단조국이 만들어 놓는 몹쓸 망령들에 갖혀 오늘도 밝혀지지 않은, 녹두장군만큼이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주는 지리산의 역사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외세에 의한 한반도 분단의 기도를 가장 전면적으로 나서서 거부하던 땅,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해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땅, 지리산은 그렇다. 녹두벌판의 애국이 죽음으로 이어진 곳이며, 분단조국을 거부했던 모습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싸웠는가 또 분단을 정착 시킨 엄청난 학살로 인해 좌절된 민족해방의 역사 그리고 분단조국의 오늘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 오늘 우리가 지리산에 오르는 이유이며 그 의 의가 아니겠는가 지리산은 다시 갑시다.
이제 마지막으로 문화저널에 대해 나의 바램은 문화저널의 작업 자체를 좀 더 넓게 집단화시켜갈 수 있으면, 그래서 한 달에 한번씩 손쉽게 (공짜로) 문화저널을 받아볼 수 있는(많은 독자 그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돈을 내는 작은 실천행위라도 담보해 낼 수 있는), 그래서 그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잡지, 그리고 그 사람들을 더욱 넓혀 가는 문화저널이 되었음 싶다. 불특정 다수는 추상적 숫자일 뿐 “현실적 힘” 이 되지는 못한다. 이 현실적 힘을 넓혀가는 것, 문화저널의 취지와 사업이 고정 편집진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저널이 가진 소망들을 넓혀가기 위해서는 적은 수의 사람들끼리라도 현실적 힘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우선 이것도 저것도 다해야 하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야할텐데 하는 욕심과 조급성을 조심하면서, 작지만 책임성 있는 잡지로, 그래서 한사람씩이라도 이 잡지의 책임자가 되어가는,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이것저것 쓰다보니 편집진들의 수고는 생각하지 않고, 철없는 바램만 늘어놓는 것 같아 부끄럽고 죄스럽다. 너그러운 용서 바란다. 문화저널을 아끼고 사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 속에서 '향토에 대한 사람'이 계속되길. - 이승희

우연히 ‘문화저널’이라는 소책자를 보게 되었을 때 제목에서 풍겨지는 인상이 무슨 고급스런 문화에 대한 소개책자인 줄 알았다. 그냥 훑어보는데, 낯익은 얼굴들의 글도 실려 있고 내용도 만만치 않아 몇 권 보게 되었다. 그런데, 책자 곳곳에 써있는 표어 ‘문화에 대한 따뜻한 인식과 사랑이 문화저널의 흐름이라는 느낌보다는 지역 또는 향토에 대한 풋풋한 사랑이 이소책자 속에 작은 냇가처럼 흐르지 않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히 글에서 노동운동 (돈 ·빽 ·학벌 중심의 사회를 일하는 사람 중심의 사회로 바꾸어나가는 운동)에 대한 몰이해를 접하기도 하였다. 가령 저널의 어떤 칼럼에서“노사분규는 근로자의 강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었다. 각자가 처한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쟁의’는 밥 한 숟갈 더 먹느냐의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을 포함하여 인간으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억압과 굴종의 굴레에 매여 사느냐의 절박한 것이다. 노예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신의 일이 보람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순히 생명력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시각은 이 소책자가 끊임없이 견지하려는 어떤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그 전반에 흐르는 ‘문화’에 대한 시각과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의도하지 않게도 여기에서 문화는 문화 전문인들의 시, 연극 등의 양식만을 지칭하고 있다. 작년 7,8월 노동자투쟁 이후로 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나름의 문화적 표현양식이었고 하루하루를 자기 나름의 문화양식으로 절박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우리 나라와 같은 반봉건성이 유지되는 식민지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중소자본가는 논의로 한다해도 독점재벌의 횡포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끊임없이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계층이 소자산층이며 노동인텔리까지 포함하여 이들 모두 민중인 것이다. 항상 자신도 노동자라는(또는 민중의 한 부분인 소자산층이라는) 인식에 서서 문화저널이 새것을 만들어가고 사물을 변화시키는데 기여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저널 속에 흐르는 ‘향토에 대한 풋풋한 사랑이 자주성에 기초하여 가장 가까운 벗인 생산직 노동자의 숨소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주었으면 한다. 생산직 노동자들도 쓰고 읽는 데 대한 공포로부터 서서히 벗어나 자신들이 손수 쓴 글과 그림으로 노동조합회보(노보)라는 형태의 소책자를 만들어가고 있다. ‘햇살, ‘비둘기의 함성’, ‘현장의 소리’ 등 단위 노동조합 회보에서부터 ‘전북 노련 신문’이라는 선전지에 이르기까지 기름때 묻은 자신들의 얘기와 주장을 싣고 있다. 비록 서툴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살아있는 삶의 몸부림이 거기에 베어 있다.
우리 나라와 같은 사회에서 새것을 만들어 가는 변화의 중심은 결코 중앙(서울)만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문화저널’과 같은 지역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작은 흐름은 무척이나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자신의 목소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 가는 ‘자주성’에 기초한 사상이 저널 편집방향의 주된 측면이었다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자주성에 기초한 향토에 대한 풋풋한 사랑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재인식 속에서 가장 가까운 벗인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애정과 함께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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