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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 | 연재 [제 4회 백제기행]
민족의 설움이 엉킨 이 江, 이山이여
섬진강의 문학과 회문산의 삶
이시연 시인/군산수산대학 교수(2003-12-24 11:21:43)

-민족의 설움이 엉킨 이 江, 이山이여-


百濟紀行을 나서기 꼭 한 주일 전에, 이 고장의 獅土史冊究 팀을 따라 금구 ·원명 ·칠보 일원의 유척탐사를 가질 기회를 얻었었다. 그 날도 일행 속에서 孤雲과 不憂幹같은 내 고장의 큰 어른들께 대한 자신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명색이 國文學올 공부하고 詩를 쓰면서, 그것도 馬韓파 百濟의 삶과 얼을 새롭게 빚어내 비추고자 하는 내가 아는게 무어란 말인가.
「문화저널」이 전북의 종합문화예술 정보지로서 문화에 대한 따뜻한 인식과 사랑을 바탕으로 애쓰고 있음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 또 이들이 기획하고 있는 〈百濟紀行」이야말로 회보간행 못지않게 값지 활동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은 출발단계라서 그 성과를 논의하기는 이른 느낌이지만, 동학의 길과 지리산 문학, 그리고 세번째로 다녀온 '쌀의 수난사' 의 추적들을 결코 젊은이의 패기로만 넘길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11월 20일 아침

우연히 신문을 넘기다가 네번째 백제기행의 기사와 만났다. 한국시문학회 세미나 참석을 위하여 멀리 부산을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알맹이 없는 문인들의 잔치보다는 살아숨쉬고 있는 내 땅과 역사의 숨결을 더듬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섬진강이내 고향 任實의 젖줄이고, 내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며, 내 詩의 산실의 대부분임이랴--.
2시 약속보다 약간 늦게 내 고향 가는 길, 全州 南原간 4차선 국도를 따라, 호기심과 기대에 들뜬 우리들 마음을 싣고 차는 경쾌하게 달린다. 초겨울답지 않게 화사하고 쾌청한 하늘 아래, 추수를 끝낸 좁은 들녘은 평온한 휴식을 느끼게 하였고, 막 성장을 벗어낸 가까운 산의 단풍도 들뜬 마음을 비껴서서 다소곳이 다가온다.
기행팀과는 거의 면식이 없는 터라 서먹서먹하기도 했지만, 단순한 관광이 아닌 百濟외 숨결을 함께 더듬어본다는 점에서 쉬 공감대가 형성된 성싶었다. 음료수와 과일도 서로 나누고 곧 대화도 이루어진다.
차는 임실 삼거리에서 오수 ·남원길을 벗어나 순창·광주로 향하는 국도로 접어들었다. 임실 모래재를 넘고 청웅을 벗어나자 원통산과 백련산이 좌우로 바싹 다가서고 냇물을 따라 길은 가늘게 이어져 갈담에 다다랐다. 차는 다시 강진교를 지나자 오른편 산길을 따라 우리의 첫 기행지인 섬진강댐을 향하고 있다. 
지금은 바닥까지 드러난 섬진강, 돌과 자갈과 이끼만 질펀하고, 하얀 갈대가 초겨울 바람 속에서 일행을 손짓하고 있었다. 저기 오른쪽 봉우리가 좌도 농악의 대명사로 불리는 필봉(筆鐘), 그리고 왼쪽으로 약간 널찍한 명전이 빨치산 수기 「南部軍」에 간혹 지명이 나오는 히여터란다. 우리는 지금 이 길을 달리며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의지를 다질 것인가?
비포장에다 요철이 심한 자갈길, 그것도 굴곡이 험난한 비탈길을 오르는데도, 우리의 박종호 선생은 당시의 회상을 더듬어 열심히 설명해 주신다. 여기서 박선생을 잠시 소개해 둘 필요가 있다. 선생은 6·25전란 당시 전주근교에서 농사를 짓다가 스물 다섯의 나이로 북괴군에게 부역되어 소위 빨치산으로 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3년후 아홉발의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사상범으로 20년 동안옥중생활을 치르고, 73년경에야 겨우 자유의 햇빛을 본 전형적인 전란의 피해자이시다.
우리가 소속된 부대는 벼락군단이었어요. 대장은 백암 사령관으로 기억되는데,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던 사람이었어요 그 당시 구빨치는 대부분 고용살이하던 사랍들이었지요 이 산생활에서 가장 참기 힘든 일은 인간의 가치가 송두리째 무시된 거였습니다. 별로 구타는 없었지만, 언어로 자행된 난폭 행위지요. 밤을 세워 잠 못 자게 하고 자기비판을 계속 시키는거에요.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일은 동지의 부상인데요, 작전 중 부상당한 동지가 바지 가랭이를 잡고 ‘나 좀 데라고 가라고 애원하는데 이를 뿌리치고 온 기억들이지요 산 속에서 지낸 3년동안 이런 일은 수없이 거듭되었는데, 지금도 꿈을 꾸면 그런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됩니다. 박선생의 고뇌에 찬 비극적 삶은 댐에 다 이를 때까지도 쉬지 않고 계속된다. 우리는 박종호 선생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형극의 길과 참담한 죽음의 수렁으로 몰고 갔던 이데오르기의 대립과 전쟁의 상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저들의 삶의 어디에 이념의 갈등이 비집고 들어설 수 있었으랴.
극심한 가뭄으로 거의 바닥만 물이 고인 옥정호의 운암댐 위에서 차를 내렸다. 60년대 후반 당시의 통치자 박정희씨가 그의 치적이라며 거창하게 수선을 피우던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맛을 지울 수 없다. 이 댐을 막은 이래 저수량이 가장 적다는 주민의 말을 들으며, 목타는 생령과 내년 농사를 걱정하시던 고향의 형님 생각도 스친다.
짧은 초겨울 햇살은 어느결에 쪼각만큼 남고, 댐 위에 선 우리들의 그림자가 건너편에까지 길게 드러눔는다. 6·25전란 당시 원혼이 된 이들의 울부짖음인가 구경을 하고 설명을 듣기에는 을씨년스런 댐 위의 바람소리가 심난하다. 그새 다저녁때가 돼서인지 날씨도 쌀쌀하고 예정시간도 약간 지연된 터에, 섬진강의 시인 용택이형 집에 잘 빚은 농주가 기다린다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입 안 가득 군침을 삼키며--.김용택 시인의 집은 임실군 덕치면 장산리마을에 있었다. 기행팀에서 대절한 차량이 대형 관광버스인데다 좁은 시골길을 운행할 수 없어서, 일행은 상큼한 시골 냄새를 맡으며 걷기로 했다. 물이 말라 도시 강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뱃가를 따라 모퉁이를 돌자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오랜 유래를 말하듯 꽤 우람한 정자나무가 서 있고, 그 곳 가까이에 김시인의 고색이 풍기는 작은 기와집에 닿았다. 작은 키와 까만 안경의 둥그스럼한 얼굴에 파카 차림의 시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호기심 많은 일행 몇은 집 안방과 서재를 둘러보고, 담쟁이가 오르다 멈춘 시인의 집담도 바라본다. 곧 집 앞 텃논에 짚 다발을 깔고 멍석대신 비닐 포장으로 자리를 장만하여 술판이 벌어진다. 부산하게 술잔을 서로 건네며 김시인의 얘기를 듣기로 했다. 얇은 공책에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마을 현황과 유래를 소개하는 그는, 자신의 이 작은 마을에 대하여 퍽도 깊은 애정을 쏟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 길게 펼쳐진 산으로 인하여 ‘긴뫼’, 또 이것이 구개음화를 일으켜 ‘진뫼’라 불리고 한자식 개명 이후 長山里 라고 부른단다. 몇 해 전까지도 337가구였는데, 70년대 이농현상은 여기도 예외일수 없어서 현재 257가구 87명이 마을 식구란다. 그나마 노인부부만이 살림을 꾸리는 가정이 8가구나 되며, 이럴 경우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시면 가정이 해체되는 농촌문제의 심각한 면도 조명한다. 이 마을은 지금부터 4백여년 전, 임진왜란 직후 양씨 ·김씨 ·문씨 세 집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심은 것으로 보이는 마을 앞 정자나무에 대한 설명이 자못 흥미로웠다.
이 나무는 효용가치가 대단히 큽니다. 우선 이 마을에는 강물에서 미역을 감다 익사한 어린이가 없는데, 그건 이 정자나무 아래서 항상 감시하는 노인이 있기 때문이지요 또 이 나무 아래 모여 시름을 하고 낮잠도 즐기고 장기도 두고 명절에는 그네를 매고 놀지요 특히 이 나무 아래에서는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나 애경사의 공동체적 삶의 논의와 함께 각종 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는데, 말하자면 우리 동네 민주주의의 메카인 셈입니다.
金시인의 간간이 섞여 나온 익살과 자연스런 어조는 자못 흥미로웠고, 마을의 갖가지 지명-꽃밭등 ·절골 ·명밭 ·야산길 ·우골 ·연다니골 ·홍두째날 ·각시바위 ·뱃마당 등을 얘기할 적에는 삶의 현장을 깊고 뜨거운 애정으로 보듬는 그의 속마음을 알 듯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가 제일 강조한 얘기는 농촌文化에 대한시각이었다. 그것은 “일과 놀이가 하나로서 일이 곧 놀이이고 놀이가 곧 일”야는 우리 민요 중 노동요에 관한 견해였는데, 노래가 곧 일의 고통과 힘겨움을 극복하려는 해학과 풍자의 덩어리라는 점이었다. 특히 그의 어머님께서 평소 잘 부르신다는 구름은 둥실 비 실러 가고/바람은 살랑 꽃 따러 가고」의 예화에서는, 술안주 장만에 분주하신 어머님을 자연 무대에 모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의 열화같은 요청에 선뜻 응해주시는 노래,
저 건너오시는 거 우리 님이 아닌가
아롱아롱 호박꽃이 날 속였네

〈아리랑〉의 변조 개사곡 일절을 듣고 나자, 金시인의 예술적 재능은 순전히 어머님 덕분이라는 일행 중의 얘기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산골의 해는 이리도 짧은가 술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어둑어둑하자,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이미 시야가 막힌 밤길을 걸어나오면, 백제기행은 百톨가아닌 白夜의 기행이 되었다.
밤 7시가 다되어 다사 차에 오른 일행은 순창읍을 경유하여 팔덕면에 위치한 강천사를 향한다. 그런데, 오늘 일진은 끝내 걸음마의 날인가 얄궂게도 경내 보수공사와 진입로 포장공사 덕분에 입구에서부터 걸어야 했다. 산골의 어두운 밤길. 조금씩 심난한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지만, 우리의 길이 한가롭고 화사한 관광나들이였던가.
다늦은 시각 강천사 입구 민박에 들어 시장이 더 좋은 반찬이 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절 구경은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 낮에 다 듣지 못한 박종호 선생의 얘기를 경청하기로 했다. 그가 살아온 60평생 가운데 태반시 연루된 빨치산의 한파 고뇌와 연민, 우리는 도무지 상상도하기 힘든 그의 온몸으로 맞선 삶을 들으며 아무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우리가 회문산에 주둔한 것이 그해(1950) 10월경이었지요 처음엔 꼭 집안에서 마냥 평온했어요 첫 습격이 금구지서, 두번째가 원명지서였을 거예요 이 때 보급로는 금산사→무악산→참시내를 통파한 길이었는데, 보급투쟁이야 말로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는 빨치산 최대의 과업이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기억을 되살리기도 섬뜩한 그들의 삶의 방식은 우리를 아연케 하였지만, 내일이면 그 현장을 직접 밟을 수 있다는 기대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선생은 가슴 깊은 곳의 응어리를 몽땅 토하실 양으로, 사회자가몇 차롄가 중단을 요구해도 쉴새없이 달변으로 이어 내려갔다. 급기야 선생께 창 한가락을 청하자 쾌히 응락하시고, 전라도 삶의 진원이라 할 육자배기 한 자락을 펼친다. (참선생은 全州에서 창을 지도하고 계시기도 한단다.
좌중은 금새 노래판이 되었고, 용택이형네 동동주가 바닥이 나자 막소주 되병까지 등장하여 흥은 점입가경이었다. 金시인의 섬진강 문학과 민중적 삶의 찬양이 꽤 오래 이어졌고, 간간이 〈투사의 노래〉같은 것도 섞여 나왔으나, 대부분은 피로와 취기 때문에 자리에 들었다. 아니, 내일의 산행을 예비하려는 이유가 더 컸을 것임은 물론이지만-.

11월 l3일 일요일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는대로 강천사 경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경관이 수려하고, 무엇보다도 관광지로서 아직 오염이 덜 되어 소박한 면모가 정겨웠다. 지금 막 경내 보수공사가 한창인 것으로 보아 개발이 진행되는 듯 싶지만, 대부분 관광명소처럼 난장판 돗대기시장같은 꼴은 제발 경계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개발 욕구보다 컸다.
아침을 들고 밤에 걸어온 길을 내려가 차에 올랐다. 바야흐로 회문산 등정이 시작되나 보다. 여러 가지 등산로를 협의하다가 일중리에서 오르는 길을 택하여, 다시 순창읍을 경유 임실군 덕치면 일중리에서 하차하였다. 결국 임실과 순창의 경계인 노령(갈재)를 밤을 사이하여 왕복한 셈이다.
종일 산행이 예정된 터에 본부에서 주는 빵과 과자, 우유 등속을 나누어 들고 행군이 시작되었다. 저 밤의 피로와 멀리에 지친 일행 두 분이 버스에 남게 되어 조금 서운했지만-. 마침 그곳에서 이곳 순창이 고향이고 詩人이며 사진작가인 권진희 선생님을 만나서 나는 그 분의 차에 편승하였다. 다시 노령을 넘어 인계에서 구림으로 가는. 지방도를 따라 구림소재지에서 ‘베트레’협곡을 지나, 미륵정이쯤에서 일행과 다시 만났다.
예전에 李泰 선생의 빨치산 수기 「南部軍」에서 익히 들었고, 어제 내내 박종호 선생으로부터 들은 지명들이 처음길인데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그런 대로 경치가 어우러지고 극심한 가뭄에도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을 따라서 안시내마을을 경유한다. 산비탈에 매달린 마을모습이 야릇한 생각을 일으킨다. 이 마을과 산안동네, 그리고 대수말 들이 저 전란 속에서 소위 빨치산들의 해방구였단 말인가 또 한때는 낮에는 국방군, 밤에는 빨치산으로 통치권이 바뀌면서 수탈과 곤욕의 비극적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터전이 아닌가. 일행은 회문산 아래 첫 동네인 대수말 앞 정자나무 아래서 긴 휴식을 가졌고, 휴대한 빵과 우유랑 음료수로 점심을 대용하며 마지막 진격( ? )의 의지를 다졌다. 
이제부터는 등산길이다. 마을 진입로나 농로도 아니고 간신히 발길이 난 오솔길을 오르는 것이다. 나는 첫발부터 팍팍함을 느꼈으나, 가녀린 여성들은 물론 육순의 박종호 선생까지 나선 길을 뒤쳐지기 싫어 맨 뒤를 따라 허우적거리며 올라갔다.
초겨울 하늘은 솜사탕같이 부풀고, 산자락을 거슬러오르는 바람은 한결 상큼하였다. 저절로 가빠오는 숨결에 심호홉을 하면서 갈꽃의 한들거림 속에 긴 대열이 산훌·오른다. 어쩌면 51년 2월 9일께 저들이 회문산을 떠나 먼날의 그 심야의 행군대열도 이러했으리라. 문득 온갖 어휘가 어지럽게 머리 속에 맴돌고 있었다.

동무, 보급투쟁, 호상비판, 비트, 문화부중대장, 호주기선요원, 보루대, 유격대, 전진 ·천진 ·전진…

정말이지 이젠 우리 역사에서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아니 될 악령들이리라. 아니, 그렇다고 그냥 묻어버릴 수는 없는 처절한 우리의 한때의 삶의 형태들인 것을. 이런저런 생각에 머뭇거리다 보니 회문산 장군봉을 오르는 일행은 저만큼 멀어져버렸고, 나 혼자만 이름 모를 능선에 멍하니 멈추어져 있음을 알았다. 저 능선에 돌격대가 내닫고, 금방 이곳에 포화가 퍼붓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아우성과 비명들. 나는 문득 노트를 꺼내어 몇 자 끄적이고 있었다.

누구인가
부르는 소리
회문산 골짜기를 거슬러
초겨울 바람결에 떠돌고
서걱이는 갈대꽃만
눈송이처럼 한사코 나부끼는데
돌아보아도 돌아보아도
그 날의 피멍만 질펀하게
단풍으로 타오르는가
어찌어찌하다 헛디딘 발길
그 길은 천 길 벼랑으로
잡목 우거진 가시덩굴로 이어지는데
숨이사 정수리까지 차고
허기진 배와
얼어터진 상처자국은 한량없어도
저렇게
마흔 해 남짓 떠도는
그대 외로운 넋은
초겨울 텅빈 하늘에
몇 점구름으로 흐르고 있다.
따스한 아랫목과
어머니 포근한 품을 그리며
지친 꿈으로 녹아 흐르고 있다.

여기서 나는 「南部軍」의 한 구절을 입 속으로 중얼거려야 했다.
우리들 마음의 성채(城홈)이던 회문산. 꽃다운 젊은이들의 피와 살이 수없이 뿌려지고 묻힌 너 회문산아 -먼훗날 조국분단의 비극이 끝나고 오늘의 싸움을 나제(羅濟)의 옛 얘기처럼 역사 속에 묻어버릴 날이 온다면, 저 상봉 높이 금석의 기념비를 세우리라. 이곳은 약소 민족의 설움이 엉켜 있는 곳. 수많은 젊음들이 조국분단의 아픔에 몸부림치며 호곡하던 비극적 민족사의 현장이었다고------.
돌아오는 길. 산행의 과로와 어젯밤의 수면 부족파 약간의 술기운 등으로 차 안에는 별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우리의 삶이, 그것도 민중의 끈끈한 삶이 오늘의 역사를 열어 가는 월동력임을 무언중에 서로에게서 확인하고 있었다.
어쩌면 잘못 뛰어든 기행인가 싶어 주저되기도 하였지만, 산을 내려오면서 대수말 촌가에서 만난 노인 부부의 얘기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하였다. 줄곧 여기서만 살아왔다는 그분들은, “이쪽 저쪽에서 죽살나게 혼만 났었지요. 죽지 못해 살아 왔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전혀 형체가 잡힐 것 같지 않은 미미한 이 삶의 증언-. 그러나, 이 작은 것이 모여 도도한 역사의 강물을 이루고, 그리하여 우리의 오늘을 이루고 있지 아니한가 .아직도 ‘민중’이 무언지 잘 모른다. 더구나 백제적인 삶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이 작은 기행에서, 그것도 주마간산격으로 스쳐온 기행에서 무엇을 얻었다고 얘기하지는 않겠다. 다만, 기회 닿는 대로 민중과 백제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을 다집하며 어설픈 붓을 접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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