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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 | 칼럼·시평 [문화시평]
민중적 삶, 사회적 의미의 시현
-창작판소리 금수궁가를 보고-
최정삼(2003-12-24 11:46:31)


 근년에 들어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부하늠 관심들이 고양되면서, 이제 그것이 단순한 전통의 개념이 아니라 민족·민중예술로서의 새로운 지명을 여는 본질적 조명이 가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민족예술의 독보적 ·독창적 형태로서의 백미이며 정화라고할 수있는 판소리에 관하여 보면, 연구분야나 실천분야 모두에서 다함께그러한 징후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민족·민중예술로서의 판소리정신의 본질적 충일함과 함께 그에 값하는 독자적이고 높은 예술성은 그러한 욕구와 필요를 원천적으로 가능케 하고 있어 보인다. 이제 드디어 ‘소리와장단’ 誌의 언급을 벌지않더라도 ‘판소리가 한국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다방면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는 것 같다. 작년 연말과 금년 초에 들어서면서, 특히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몇가지 문화행사는 이러한 견지에서 주목에 값할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수궁가’의 경우, ‘문화저널’이 창간 1주년 기획으로 마련했다는점, 그리고 신작 판소리라는 점에서 두가지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자제에 이 공연의 성과를 나름대로 몇가지로 나누어 재어보고자 한다.


 첫째는, ‘판소리’의 독자적 장르面에서이다.
그것은 먼저 전통 판소리에 대해 창작 판소리의 형태가 어떻게 구체화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주목되어졌다. 그간 신작 판소리는 대개 박동진씨가 시도한 것으로 전송이 끊어진 12마당중 나머지 일곱마당의 복원작업과 박동진, 이용배씨 등의 ‘성서판소리 예수전’‘김대건 신부 일대기’또는 과거의 ‘열사가’ 등의 부류와 좀더 새로운 것으로는 김지하의 당시‘분씨물어’에 소리를 불인 임진태씨의 똥바다 등이 있었다. 이번 ‘금수궁가’는 기존의 수궁가의 음악적, 문학적 틀을 그대로 쓰면서 사설과 표현을 좀 더 사대적 구체성을 표현하는 쪽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였다. 어느것이든그것이 창작판소리일 때, 1차적으로 부딛치게 되는 문제는 판소리 음악어법 계승의 문제인데, 기존의 수궁가의 틀을 가능한 한 그대로 빌려 썼다고 하는 점에서, 대체로 무리가 없는 비교적 무난히 성공적이지 않았나 여겨진다. 사설의 짜임이나 운용면에서도 되도록 수궁가의 원형을 다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는데, 따라서 이것 역시 음악어법과 관련한 점에서,사설표현을중심으로한문학어법면에서는 판소리적인 것을 크게 위배하지 않은 것으로 명가할 수 있겠다. 다음이 동요및 대중음악, 가요 서양음악등의 수용문제인데 이점은 순수한 창작판소리에서 보다도 훨씬 적은 부담으로 수용되어질 수 있는 것이어서 기대를 모았던 부분이다. 그러나 동요 ‘산토끼’가 가사만 그대로 두고 판소리 선법과 창조로 개곡(改曲)되어 불리운 것과 대중가요 한곡이 앞부분만 잠깐 불리워진 것으로 그쳐 좀 아쉬웠다. 물론 판소리의 특성을 굴절시키지 않으려는 그 고충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그러나 기왕 창작 판소리로서의 실험성이 얼마간 있는 것이고 보면(이 점은 작년도 판소리 학회에서 이보형에 의해 논의된 바 있다) 좀 더 여러 부분에서 좀 더 다양하게, 다른 장르의 음악들을, 좀 더 여러 형태로 적극 수용해 봄직하지 않았는가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판소리는 본시 민족음악의 옴니버스였던 만큼, 어차피 이 소리 창작의 의도가 오늘날의 시대성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제 음악현상들을 판소리로 수렴해보려는 시도는 매우 주목할만큼 나름의 가치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소재였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점은 ‘이면’, 즉 사설내용과 동양철학에 입각한 운용 요소가 많은 북장단에서 어떻게 좀 더 효과적이고 독창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 ·시험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당시 가요에서 보여준 북장단은 그저 트로트의 그 분박을 단조롭게 반복했던 점도 아쉬웠던 부분이었다. 둘째로는 소리꾼(창자)의 음악적기량과 공연에의 성실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대체로 창자가 기존의 수궁가를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에게 다년간 사사받고 또 그 나 그 산맥과 같은예술성을 실감하여, 전해 받은‘바디’에 성실하려고 노력한 렛인지 눈에 떡게 미흡한 곳은 없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그가 애초부터 전문 소리꾼이 아니었던 점을 감안하면 소리공력도 훌륭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특히 주부 모친의 주부만류벼옳 같은 곳에서의 ‘세상성’의 구사 등은 눈부신 곳이었다. 특히 외모처럼 미성인 목구성도 매끄럽고 아름다운데가 있어 ‘인물치레’는 넉넉히 했던 것같고, 재치있는 재담과 익살, 그리고 풍자로 이어지는 아니리도 다수 청중의 흥미를 무대로 집중시켜냈다는 점에서 ‘사셜치레’도 훌륭하지 않았는가 싶고, 그가 연극배우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탁월히 구성진 발림은 일품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별도로 마이크를 쓰지 않은 점도 좋았고 판소리가 ‘판’예술이란 점을 고려하면 도중에 ‘진도 아리랑으로 관객들을 참여케 하여 함께 부른 점도좋았다. 다만 기존의 수궁가가 짧은 편인것이 두시간 정도 걸린다는 점을 비교하면 한 시간 30분의 시간은 다소 짧았지 않았나 싶다. 때문에 입구에서 판매한 창본(사설집)에 나온 적지않은 부분들이 공연에서는 생략되어 버렸다. 사실, 보통의 경우 창자가 1시간 30분 이상 혼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왕 그가 판소리라는 형태로 그를 시도하였다면, 창본에 있는 대목(내용)을 빼고 부른것이 청중으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새로 찢올 그 창본에 있을 때는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었을텐데 말이다. 만약 창본대로 불렀다면 대략2시간에서 두시간반정도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으로 ‘소리’에 대한 문제인데, 그의 성음은 ‘청’이 높고 속이 꽉 차 딴딴하게 느껴지는 철성기(鐵聲했보, 다는 공명이 많은 울림소리기(氣)가 많은 것처럽 들렸다. 그러한 탓인지 대체로 ‘통성’에 의거하기 보다는 ‘목구성’에 의존해서 소리를 끌고 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은 이번 소리에 비교적 ‘그늘’이 적게 느껴지는 원인으로 작용되지 않았는가 싶다. 판소리란 민중예술이고 판소리 다섯 마당중에서도 수궁가는 민중적 삶의 사회적 의미가가장 잘 나타나있는, 그래서 판소리정신의 본질에 가장 접근해 있는 ‘소리 바탕’이고, 그가 다름아닌 수궁가를 일차로 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면, 따라서 ‘금수궁가 오늘날의 민중적 삶의 사회적 의미를 시현(示騙)하고자 했다면, 이번 소리에서 왈각 ‘혈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음악적 기량이 가지는 수준의 정도를 떠나서 하나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판소리란 어디까지나 인간 개인의 목소리로 표현되어지는 얘술인 만큼 이점은 ‘판소리정신과 창작판소리의 시대적 사명’이라는 측면과 관련하여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왕 판소리로서의 골간을 갖춘 바에야, 단가(요즘의 세태를 풍자하는 창작곡이어도 좋올 것이다)하나 또는 팜플렛에도 실었던 그‘아리랑비나리’라는 것이라도 소리 ‘초앞’에 들어가기 전에 목풀이 겸하여 불렀으면더욱 짜임이 돋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세번째, 팜플렛에 관련한 것인데, 팜플렛의 일부내용중 판소리의 정의에 연관된 부분은, 물론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발생이라든가 범주 등에 대해 그것이 아직도 학계에서 논의가 다양한 부분이니 만큼 좀 더 신중했으면 좋았지 않았나 싶고,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모르나, ‘비가비’ 운운한 부분도 비전문가로서의 겸양이라면 모르되 민중의 시대를 지향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자칫, 아직도 이분법적인 의식의 잔혼이 엿보일 소지도 있어 보인 것도 불필요한 언급이 아니었나 싶다.

 

 네번째, 文學的 기량과 관련된 부분인데, 먼저 판소리사설의 재창조 문제로, 이것은 그의 사설이 ‘똥바다’ 등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본격적 논의는 유보된다 하겠다. 다만 한문사설의 국어 사설화문제인데, 예를 들어 ‘고고천변’의 사설을 가급적 전부 쉬운 우리말로, 또는 중국의 지명을 우리 지명으로 바꾸었던 점이다. 이점에는 내용면에서 문화의 사대성을 탈피하고 표현면에서도 알아듣기 쉽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일단은 내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부차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고고천변’의 사설들이 단순히 중국의 지명을 사용했다고 보다는 한시 ·한문장을 인용한 것이며, 당시 한자문화는 우리문화에 종속된 우리문화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적벽가가 중국의 삼국지의 내용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판소리의 민족예술성이 저해되지는 않는다. 또한 심청가의 배경이 중국을 공간적으로 벌어 썼다고 해서 그 또한 저해되지 않는 것처럼 판소리의 높은 예술성이 그 작은 하위개념의 소도구로서 한자문화로 수용했다고 보면 억측일까? 노랫말이란 판소리와 같이 서사성이 강한 경우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시어는 수많은 의미의 ‘외연’을 가능케하는 ‘내포’를 그 특질로 하며 따라서 보다 시적인 언어구조와 표현을 판소리 사설은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이점을 고려하고,‘새고고천변’이 ‘헌고고천변’보다 예술미의 진폭이 덜하다고 하면 지나친 개인적 강변이 될까? 앞으로 이점도 활발히 논의될 만한 문제라 여겨진다.

 다음으로 문학적 기량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사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동물로 패러디된)들의 성격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실 창자가 잡지기 자였으며 현재도 모음악전문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긴 하나, 판소리에 대해 하나의 고집을 고수하는 학자이거나 작가가 아닌 관계로 빚어진 것일른지도 모르겠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판소리는 이중적 주제를 갖고 있으며, 동일 인물에 대해서도 골계와 바장, 긴장과 이완올 통해서 오히려 그 입체적 모습과.이중성을 나타나게 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훨씬 더 생생한 삶의 실체들로 공감이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물의 전형화는 판소리에서도 그 본질을 다치지 않고자 한다면, 특히 경계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소설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하물며 판소리에서는 더우기이다. 골계와 비장의 반복이 주는 대상의 입체감을 자칫 명면화하는 위험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뒷풀이 부분의 호랑이 생매장 부분도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이어색한 부조화의 느낌은 아마도 중년에 유행한 무협소설이나 본질면에서그에 방사한 ‘O O시강같은 대중소설들이 문제를 소재로 취급하면서도 그해결을 그야말로 안이하고 황당하게 봐버림으로서 문학성과 그에 따르는 예술적 감동을 말살하는 오류를 빚고, 삶의 국면에서의 진정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게 되는 것과 비견되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끝이 설사 토끼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마무리 되더라도, 칼날같은 유음 속에서 진정 오늘의 시대적 문제를 아프게 나누고자 하는 ‘패로디’로서의 본분을 다하는쪽으로 애썼더라면하는 욕심을 가져본다. 사실, 어려운 문제에 쉬운 해결이란, 심각한 문제에 코믹한 해결처럼 비본질적이고 그런 만큼 비논리적이어서 그런 만큼 설득력이 약해지게 되는 것이므로 해피엔딩만이 능사는 아닐것이다. 과거의 판소리가 양반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양보로서 미소하나마 기형적 해피엔딩과 유교적 도덕률에 결말을 끌어다 대는 어느 정도의 그런 점이 있었던 것을 오늘날의 창작 판소리에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더 두고 볼 일이다.


 다음으로 본시 풍자란 ‘청숭’보다도 나름대로의 훨씬 더 튼튼하고 잘 짜여진 구조를 가져야하는데 이번 공연, 창본에서는 그런 풍자적 의미 구조의 튼튼함이 통일성을 갖고 집약되어 느껴지기 보다는, 물론 과거의 형식에 내용만 새것을 달아불이다보니 불가피한 현상이었겠으나, 작품이 산발적이고 다양한 현실 풍자 쪽으로 분산되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풍자가 본질적으로 유음의 칼날 속에 눈물을 갇아두는, 그래서 그 웃음 이상의 비통과 분노, 그리고 더욱 튼튼하게 직조되고 통일된 의미 구조를 갖추지 못할때, 그것은 오히려 말장난이 되고 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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