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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 | 연재 [문화저널]
백제문화의 원류를 찾아서1
윤덕향(2003-12-24 11:51:43)


 문화는 인간의 발자취이고 문화가 있으므로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화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되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칼과 포크로 빵을 먹을 때 우리는 수저와 젓가락으로 밥과 김치를 먹는다. 이는 "먹는다"는 점에서 공통되나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서 차이가 있으며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수저와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나 어머니때부터 창안은 아니며 그것은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때부터 오랜 시간을 두고 지녀온 문화인 것이다.
백제문화도 그 뿌리를 그 이전단계의 문화에서 찾아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문화에는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 있으며 그 외래의 문화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본디의 문화를 몰아내고 주인행세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주가 되는 문화의 줄기는 사회집단의 주체를 이루는 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그 문화를 유지하고 그 문화를 발생시킨 토양으로서의 문화에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같은 문화, 사회성원의 대다수가 가지고 있으면서 밑바탕을 이루는 문화를 기층문화, 또는 토착문화라고 하자.
전북돔니의 노래중에 "인정도 아름다운 마한 옛터에...." 하는 구절이있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옛터로 알려진 전북지방이 다시 마한의 옛터임을 밝히는 것이고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첫째 백제 이전시기 전북지방에 마한이라는 집단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백제라고 할 경우 우리는 경기도와 충청남도, 전라도지방을 영역으로 하는 삼국시대의 국가를 생각하게 된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지방까지 백제의 영역에 통합된 것은 대체로 백제 근초고왕때의 일로 생각되며 이는 4세기중반경에 해당된다. 주지하다시피 백제의 건국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한강유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기원전후에서 4세기중반이전 사이의 전라북도지방에는 백제문화가 아닌 문화가 있었다는 의미가 되며 이를 도민의 노래에서는 마한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앞으로 백제문화에 대하여 몇차례에 걸쳐 살펴보기에 앞서 토착문화의 형성이 어떠했을가를 간단히 알아보겠다.
현재까지 나타난 바로는 전북지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발단된 황토층과 홍적세지층의 존재에서 앞으로 그같은 유적의 발견이 있을것임이 분명하다. 구석기 다음 신석기시대의 유적에는 고군산군도와 금강줄기를 따라서 약간의 조개무지유적, 그리고 부안의 해안을 따라서 역시 조개무지유적과 계화도산위에서 발견된유적이있다. 그나마도 유적들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탓으로 그 정확한 성격을 알 수가 없으며 발견된 유적의 수도 매우 적은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신석기 시대에 전북지역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륵사지의 발굴조사에서 부수적으로 조사된 바에따르면 익산군과 김제군그리고 완주군일대에 폭넓게 형성되어있는 토탄층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며 앞으로의 조사활동이 기대되는 것이다.신석기시대 다음의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 갑자기 전북지역에서도 많은 유적이 나타나며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인돌을 들 수가 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은 한반도의 거의 전지역에 분포되어있으며 특히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비롯한 서해안주변지역에 집중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북지역에서 대표적인 고인돌떼는 고창 상갑리에서 볼 수 있다.
고창읍에서 선운사로 가는 길옆에 있는 매봉의 기슭에는 1,OO0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줄을 지어서 자리하고 있어 장관을 이루며 한 지역에 이처럼 많은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볼 수 없다. 고인돌은 땅 위나 아래에 매장을 위한 관을 돌이나 나무로 마련하고 그위에 매우 큰 뚜껑돌을 덮은 것이다. 뚜껑돌중에는 그 무게가 몇1Okg에 불과한 작은 것도 있으나 수십톤에 달하는 거대한 것도 적지 않다. 수십톤에 달하는 뚜껑돌을 채취하여 이를 무덤을 만들 장소까지 이동하고 관의 위에 올려놓는 작업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이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하며 많은 사람을 조직하여 일을 시키는 조직력이 요구되었다. 뚜껑돌의 무게가 1O톤인 고인돌을 만드는데 몇 사람이 동원되었을까를 참고로 알아보겠다. 보통 1톤의 돌을 16명의 사람이 동원되어 움직일 수 있으며 그 사람들이 하루 8시간의 노동으로 1.6km를 운반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기준을 산술적으로 도입하면 10톤의 돌을 움직여서 작업하는 데에는 160명의 사람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사람들이 모두 동원되었다고 하고 그들에게 부양가족이 1인당 요즘같은 핵가족시대를 기준으로 3인이 있었다고 한다면 1O톤의 고인돌을 만들 수 있는 집단은 640명의 인구집단이 된다. 또
160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있는 돌을 들어올려서 만든 것이 아니고 바위암벽에서 돌을 깨내어 원하는 장소까지 운반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조직이나 분업이 있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돌을 깨내는 기술자도 있었을 것이고 돌을 운반할 때 철도의 레일처럼 통나무를 두줄로 깔고 그 위에 역시 통나무 굴림대를 가로질러 놓고 돌에 줄을 매어 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끈을 끄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굴림대를 앞쪽에 놓는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노동에 맞추어 소리나 노래를 메기는 사람도 있었음직하다. 이들 중 어느 한사람의 역할도 생략될 수 없는 것이며 이같은 협동작
업에는 필연적으로 조직이 요구된다. 위에서 1O톤의 고인돌을 예로 640명내외의 집단과 조직을 상정하였다. 이같은 집단은 청동기를 기반으로 혈연에 기반을 둔 부족국가 (Chiefdom,
성읍국가)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이같은 집단의 확대와 결합에서 마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마한에는 54개의 작은 국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고창 상갑리의 고인돌떼는 그같은 집단의 존재를 잘 보여준다. 전북지역에는 마한 54국 중 10여개의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같은 집한의 존재는 고인돌과 지역내에서 출토되고 있는 청동유물에 의하여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다. 남원 세전리에서는 고인돌 이후의 부락터가 조사된 바가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마한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인데 그중에는 수정으로 만든 구슬도 있었으며 아이들올 위한 장난감으로 보이는 작은 토기도 있었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우수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의 물질문화와 별다름이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올 알 수 있었다. 이런 류의 유적은 도내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또는 집단을 이루며 사는 근거지로서 토성을 마련한 집단 거주지도 발견되고 있었다. 또 마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진 김제 벽골제는 당시 농경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그를 위한 관개시설을 마련할 정도임올 잘 보여주는 것이다. 고인돌을 무덤으로 사용한 집단의 확대에서 연원되는 마한 집단은 이미 말한 바와같이 도내에 10여개의 소국이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그에 편입되지 않은 보다 작은 집단도 있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마한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 동장한 백제가 그 영역을 전라남도의 남쪽 해안까지 확대한 과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역사기록은 없다. 그것이 무력을 앞세운 군사적인 정복이었는지 아니면 마한의 지배계층에 일정한 정치적, 경제적인위치를 보장해주는 비군사적인 협상의 결과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그같은 백제영역에로의 편입이 어떤 정치적인 구속과 영향을 토착사회집단에 미쳤는지에 대하여서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정치적으로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이후에도 마한의 문화, 또는 이를 다르게 표현하여 토착의 문화가 곧 백제의 문화에 홉수 통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백제의 문화 유적이 전북지방의 경우 익산지방을 중심으로한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분포되어있는 것에서 분명하다. 또 백제의 무덤인 돌방무덤이 백제가 멸망하기에 얼마간 앞서는 시기에야 비로소 전북지방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한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백제에 편입된 이후에도 토착의 문화는 계속되면서 차츰 백제문화와의 홉수와 동화작용이 전개된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 문화에 대한 관심에 앞서 그 백제 문화와 흡수 동화되어 나타나는 이 지역의 토착문화가 있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 문화의 맥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한 관심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랬을때 비로소 익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백제의 문화유적이 없는 점이나 공주나 부여에서 볼 수 있는 백제의 상층문화가 나타나지 않는 저간의 사정을 이해할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백제의 상층문화가 이 지역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이 지역이 문화적으로 후진 지역이었다거나 백제시대에 문화를 남길만한 사람들이 살고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토착문화의 맥이 잘 보존되어온 전통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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