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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 | 연재 [세대횡단 문화읽기]
살풀이에 대한 고찰
박소현(2003-12-24 11:53:05)

태초부터 인간은 신비에 쌓여 생과사가 이루어지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나 부모와 자식간에 좋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때 우리는 “살이 끼었다.”는 표현을 한다. 또한 여자가 설겆
이를 하다가 접시를 깨었을때도 “살이내렸다”라는 말로써 그 여자의 무안을덜어 준다. 이처럼 “살이 끼었다.” 혹은“살이 들었다.”라는 표현을 하면서 그살이 왜 드는 것인지 또 인체에 들어와 어떠한 영향을 주며 살이 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해내는지 모르고 있다. 먼저 ‘살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이나 물건 등을 해치는 독하고 모진 기운, 곧 악귀의 짓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천간과 지간이 합해져서 사주팔자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운명 이다. 주역을 보면 사람이 태어나면 12장성 즉 12별이 사람을 지켜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사람에게 해가 되도록 유도를 하는 별을 무속신앙에서는 ‘살’이라 표현한다.
우리 주변에 ‘살’이라는 단어가 쉽게 들어왔으나 미신이라는 미명아래 그것과 인간과의밀접관계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의 토속신앙인 무속에서 ‘살”이 어떠한위치를차지하고 있으며 ‘살’로 인해 인간이 어떤 장애를 입고 있는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무속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적지않은 현지조사자료와 연구논문들이 발표되어 왔고 한국무속에 관해서 본격적인 연구결과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살풀이’에대한 독자적인 연구는 아직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살풀이’가 어떤 성격파 의의를 가졌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회박하다고 할 만하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살풀이’는 전북지방에서 채록된 것으로써 무속의 유래와 아울러 인간에게 있어서‘살’이 어떤 기능을 가지며 그 풀이방법에 있어서의 의식절차에 관해 고찰하기로 하겠다.
‘살풀이’굿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무속의 유래와 아울러 굿을하는 무당의 유형을 고찰하기로 하자.
1. 무속의 유래
1〕 무속의 기원
무속의 원초척인 것은 단군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음력 9월 9일 삼성사 〔경상도 태백산〕에 제단을 마련하고 신을 받아 접신을 시켰다. 이때 접신을 시킨 사람은 환용〔국가단골〕이었는대 솟대 혹은 신대를 도구로 하여 강신을 받아 하산하여 봉화를 봉송하듯 주자
〔지방단골〕로 하여금 접신을 시켜 각지로 보냈다. 부락이나 국가에서 공동적으로 단골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신성한 산이나 물가에 당집을 형성하였다. 부족국가시대까지 부락에서 선정된 사제자로 하여금 대물립을 시켜주었다 완전한 국가형태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일관〔해를 바라보고 점을치는 사람〕무꾸리〔장님 점장이〕 등으로 형성되었고 당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고 불교, 유교 등 타종교가 들어오면서 토속종교를 말살시켜야만 틈을내어 유지해 을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혼적은 산신이나 용왕이 본래 토속종교에서 비롯된 것인데 불교에서 이를 홉수해 가서 지금은 사찰에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반상계급이 완전히 성행되고 단골은 상민중의 상민으로 전락했다. 점차 계충사회의 소외로 말미암아 다른 계충의 사람과는 생활의 연계가 지어지지 않으므로 당집이 쇠퇴되고 단골이 점차 전업을 하거나 사라지게 됨에따라 강신무, 판수〔강신무를 따라 다니며 경을 읽으며 장단을 쳐 주는 직업〕 등이 생겨 제사 주관이나 당굿주관보다는 사람의 운명을 예언하는 기능을 가졌다. 단골이 하단 굿을 강신무자 맡아서 하기 시작하면서 통청을 무당이라 일컬었다.
2〕 무의 유형
〔1〕 세습무
ㄱ) 의의
세습무란 글자 그대로 무업을 배워서 내려온 사랍으로 단골 혹은 세습무라 일걷는다. 단골형은 혈통을 따라대대로 사제권이 계숭되어 인위적으로성무한 세습무로서 일정한 지역과 이
관할 구역에 대한 사제권이 갱도상으로 혈통을 따라 계숭된다. 호남지역의단골은 ‘단판’이라는 일정한 관할 구역이 있고 단골은 ‘단골판’안에 사는 주민인 신도들과 단일외 집합적 거래 관계를 맺으며 이 ‘단골판’안에 대한 무속상의 사제권이 제도화하여 혈통을따라 대대로 세습되는 조직성을 갖고 있다. 단골들은 자기의 영역에서는 모든 신을 봉송하는 사제자로서 절대권자인 지위에 있었으며 나라에서도 신을 모시는 당을 지어 주어 도단위의 큰당과 부락단위의 작은당이 구별되어 있었다. 이 당에서는 크게는 국태민안의 굿과 작게는 부락의 무운과 개인의 소원성취를 비는 굿을 1년에 몇 번씩 좋은 날을 골라서 국가의 공식행사나부락의 공식행사로서 모두 참여하고 협조하여 굿을 하고 신을 봉송하는데이 행사의 주관자가 바로 단골이었다. 부족국가시대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등 하늘에 제천제를 지낼때 그 제를 주관하고 신대나 솟대로 신을 접신시킨데서‘단골의 맥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단골들은 우리나라의 북쪽보다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남부지방에 많이 있었다. 지금도 서해안 선유도에 오룡당이라고 하는 옛날부터 용왕을 모셔오던 당이 있으나 단골이 떠난 지 오래되어 그대로 폐허가되어 있다.
ㄴ)명칭
단골을 부르는 명칭도 각기 다르다. 장가률 간 남자 단골은 단골애비, 시집을 간 여자 단골은 단골에미라 부르며 세습을 받아 배우는 사랍으로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않은 단골은 애당이라 부른다.
ㄷ)세습무의 굿
세습무의 굿은 해원풀이, 철성풀이, 장자풀이와 같이 하나의 영채를 아주 좋은이야기로만들어영혼(넋)을위로하며 달래는 풀이로 이루어졌다. 세습무의 굿은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순수한 우리말로 춤, 가락, 장단을 넣어 애원성 있게 풀어냄으로 대중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특정이 있다. 세습무가 굿을 할 때 간혹영의 대화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거의
가짜여진 각본그대로 굿을 한다. 보통 당사주 책이나 기타 점술 서적으로써 길흉화복을 점 쳐서 굿날을 받아 굿을 띠어낸다.
ㄹ) 무복(굿을 할 때 입는 복장)
세습무의 무복은 강신무의 무복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 않다. 원삼이나 쾌자가 가장 많이 착용된다.
ㅁ) 단골의 쇠퇴
사제자로서의 단골의 권위는 이조시대에 들어와 천민의 계급으로 전락되었다. 또한 단골의 영역 싸움이 잦았는데 이 싸움은 일제말기와 대한민국 건국초기까지도 아주 심했다. 타지역으로 굿을 나갈때면 그 지방 본당의 단골에게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약 이 허락이 없이 굿을 하다가 들키게 되면 심한 구타를 당하고 그곳에서 벌은 모든 재물을 빼앗기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단골의 가계는 거의가 단골끼리의 혼인으로 그 혈통이 이어지는데 이때 사돈간이라 할지라도 영역침범 싸움에는 예외될 수 없었다. 이영역 싸움은 육지의 단골과 섬지방의 단골과는 더욱 심하여 때로는 자기들끼리의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글을 배우지 않고 절대권자인 신의 사제자의 능력으로 혈통을 따라 단골의 대를 이어나가니 학문적 정립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천대받는 서러움에 전업을 하여 점차 그 수효가줄어들었다. 더우기 1960년대의 “새마을 운동”은 농촌의 근대화를 가져다주긴 하였으나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부락의 당집을 헐어버리니 생활의 근거를 잃어버린 단골들은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이사롤 하고 자손들의 명예를 위해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며 대화를 꺼리니 그 옛날 단골세계를 연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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