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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4 | 칼럼·시평 [저널초점]
저널리즘과 비판적 아카데미즘의 참된 만남
이종민(2004-01-27 10:31:37)


 저널리즘의 힘은 주로 그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신속한 보도와 해설이, 이러한 무의식적 믿음에 힘입어, 엄청난 파급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와 해설이, 언론매체가 표방하고 있듯, 불편 부당한 객관적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이는 인간인식의 본질적 속성과도 연관되는 일이지만‘신속함에 부수되게 마련인 졸속함 및 저널리즘의 선정적 상업주의와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시각의 확보가 긴요하며 이는 과학적 탐구를 통해 총체적 인식을 그 전체로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순발력의 저널리즘이 차분한 전문적 연구를 지향하는 아카데미즘과의 결합을 시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날의 엄연한 역사는 양자의 단순한 만남으로만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오히려 그 퇴행적 결합의 파행적 역사진행을 조장하여 왔음을 일제시대 이래의 곡필사가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언론매체가 살아남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택하게 된 단순한 보신책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기업경영의 원칙에만 충실하여 권력의 비호를 받아 대 언론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펼친 적극적 노력의 소산이라 해야할 것이다. 또한 전문연구자의 경우에도, 그 퇴행의 원인이 일차적으로 이들의 입신출세 혹은 명망성에의 욕구에 있으며 상황의 변화에 카멜레온 적 적응을 시도하는 기회주의적 속성과 연관되겠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안고있는 좀더 본질적인 한계와 궤를 같이한다. 이들 학문연구가 노정하고 있는 ‘무주체성’ 혹은 ‘식민생’과 서구적‘실증주의 우선의 몰역사성’이 더 심각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로 인한 역사의식의 결여와 총 체적인식의 부족은 이들로 하여금 기능주의 적 대응을 하게 했으며, 이러한 기업경영의 논리와 몰 역사적 기능주의의 결합은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은폐하고 일반대중의 의식을 마비시켜 결과적으로 독재권력을 비호하는 등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켰던 것이다. 이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긍정적 기여를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본질적 한계는 전혀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양자의 결합은 그 부정적 요소들끼리의 야합이 아니라 상호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줄 수 있는 긍정적 부분끼리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6월 항쟁이후 사회의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 자율화의 움직임은 언론의 참된 거듭남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참된 만남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80년 ‘언론의 대학살’ 이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지역언론의 경우 이 문제는 훨씬 더 절실하다. 이는 바로 언론 자체의 살아남는 일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빈약한 자본에 짧은 독자층, 게다가 광고주의 부족 등은 그것이 확고한 자기 존재이유를 입증하지 못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지역언론의 객관적 여건이다. 이러한 존재이유가 아카데미즘과의 건강한 만남을 통하여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역언론의 존재이유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들이 다룰 수 없는 지역의 고유 영역을 다루는데 있다. 이는 단순한 편집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지역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만으로는 그 존재이유를 확보할 수 없다. 이는 지역고유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실천적으로 규명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연구주의 적 편향을 지양하는‘비판적 아카데미즘’과의 진지한 만남을 통하여 확보될 수 있다. 한국사회의 독특한 모순구조를 주체적 시각에서 분석 규명할 수 있는 비판적 인식 틀을 전제로 그러한 모순의 구체적 발현인 지역문제를 과학적으로 규명함은 물론 그 해결방안을 실천적으로 모색하는 지역학술 연구자들의 연구업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기왕에 널리 알려진 명망가들을 무비판적으로 동원하는 일은 진정 살아남는 데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지역모순을 구체적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의식이 이제 이들의 공허한 논리에 현혹 당할 만큼 미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추파동이 왜 일어났으며, 농업이 중심인 이 지역이 왜 낙후하고 소외될 수밖에 없었는가 그 근본 원인과 그 궁극적 해결방안을 알고 싶어하지 대중요법 적 처방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왜 죽창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천착을 바라는 이들은, ‘모든 일은 대화를 통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한가로운 충고나 ‘폭력은 사태를 악화 시킬 뿐’이라는 ‘성현의 말씀’에 분노와 비애를 느낄 뿔이다. 각종 선거공약에 속아왔던 이들은 ‘위대한 서해안 시대’라는 허황된 구호에 편승하여 정치인들보다도 더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 아득한 미래의 무지개를 그려 보여주시는 점잖으신 교수님들의 해설이나,‘우리도 이제는 뭉쳐야 한다는 식의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명사님들의 감정적 대응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 있어 참된 아카데미즘의 부족을 탓하는 저널리즘의 변명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이는 서울중심의 정책 및 지역의 불균등 발전을 초래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연관되며 또 이 지역의 묘한 보수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재정 및 여건의 미비는 물론 동문 동의 연고를 특히 중시하는 풍토가 우수한 전문연구자들의 확보는 물론 이들의 정착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연구자들의 창조적이며 비판적인 학술활동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약한 고리가 항상 새로운 변혁 및 거듭남의 터전이 되어왔다는 아이러니가 항상 우리를 절망의 늪에서 구해주는 역사의 진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모순이 첨예하게 집적된 곳일수록 변혁에 대한 욕구가 강하며 그 당위성에 대한 인식도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이다. 이 지역의 학계에 기존학문연구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비판적 성찰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의 증거이며 우리가 상황의 불리함만을 탓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엄연한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능성을 지역의 저널리즘이 어떻게 활용, 실천의 영역으로 견인해내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저널리즘의 적극적인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아카데미즘의 기존 역량을 이용한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에 대한 연구논문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사회의 현안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문제 재기를 하며 이에 관한 전문적 연구를 의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또 종합적인 점검이 필요한 문제는 심포지엄 등을 개최함으로써 여기에서 제기된 점들을 여론화하는 동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와 전문연구를 매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서울에 있는 언론사에서는 물론 지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이며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겨레신문 등이 주최하고 있는 대 심포지엄이 그 좋은 예이며 대구지역의 지방사회연구회 주최의 심포지엄에 대구매일신문이 적극적인 후원을 해주는 것도 저널리즘과 비판적 아카데미즘의 바람직한 만남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저널리즘은 분명 그 지역의 아카데미즘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자의 상업성과 후자의 명망성에의 희구가 만나는 식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유명한 사람의 힘을 벌어 독자나 시청자를 확보하려는 것이나 신문이나 방송매체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는 자세는 하루빨리 탈피해야할 구습이다. 물론 저널리즘이 상업성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위 ‘장사가 되는’ 일에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건강한 여론의 형성이라는 저널리즘 고유의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어서 스스로의 존재근거를 허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느낌은 이러한 선정적 상업주의와 순발력만을 중시한데서 오는 피상성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 속성은 건강한 아카데미즘과의 만남을 통하여 극복될 수 있다. 아카데미즘이 함축하고 있는 비현실성이라는 부정적 속성도 저널리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하여 극복될 수 있다. 지역언론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불리한 객관적 여건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그것이 지역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그 해결에 실천적으로 기여하려 함으로써 그 존재의의를 확보하는 일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튼튼한 아카데미즘과의 만남이 역설적으로 진정한 상업성을 확보하는 일이라 할 수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지방자치시대에 걸 맞는 ‘전북인에 의한, 전북인을 위한, 전북인의 언론’으로 확실하게 터잡이를 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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