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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1 | 특집 [특집]
80년대 미술의 점검과 전망80년대 상황과 민중미술의 대두
김인철(2004-01-27 14:21:35)


 80년대를 마감하면서 돌아켜 보건대 지난 10년이라는 기간은 우리 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라 할수 있다. 근대 이후 70년대까지의 미술이 상투화된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탐미주의 ·복고주의에 섬취해 있거나 서구의 모더니즘에 기초한 개인주의 ·형식주의 미학이 범람하면서 자폐증적 폐쇄주의에 갇혀 제도권의 보수화된 틀안에 안주하려는경향이 지배적이었던 데 비해,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민주쟁취 군정종식의 변혁에 부용하는 민족민중미술이 태동되어 사회변혁운동에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해 오면서 질적 ·양적 발전을 거듭하여 미술운동의 새로운 지명을 여는 분기점을 마련하였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60-70년대의 군부독재체제를 거치면서 사회 전반의 모순과갈등이 구조적으로 첨예하게 심화되어 각계 각층에서 분출되는 변혁의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피맺힌 대가로 일단의 새로운전기를 맞게 된다. 이전의 운동이 을바른현실인식의 결여, 주변정세의 오판(특히 미국), 전술 전략의 미숙 등 으로 일정한 좌절을 맛봐야만 했으나그러한 좌절을 딛고 비로소 우리의 구조변동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검증, 역사와 현실에 대한사회 과학적인식을 바탕으로 변혁의 폭과 깊이, 속도가 전부문으로 빠르게 확산되면 서사회적 격변속에 민족민중운동은 모든 분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80년대 민족민중 미술운동은 70년대 말까지의 사회에 대한 미술(인)의 무관심과 방기를 넘어서서 이러한사회적 변혁기의 구조속에서 비로소 궤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문학,음악, 연극부문은부분적으로 60 ·70년대에 이미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활동해 왔었다.) 80년대 민족민중미술운동은그과정 속에서 몇 단계의 질적 전환과 방법론의 변화를 가져왔다. 80년대 미술의 전반기는 80년대 이전까지 미술계가 심화시켜온 괴리와 질곡을 극복하고 타개하기 위한 일반론적 문제제기로 시작되었다.(예컨대 미술의 폐쇄성과 고립주의 극복, 삶과 미술의 괴리감, 미술문화의 공유방식, 외래사조에의 의존, 보수 제도권의 누적된 병폐, 대중과의 소통형식, 미술의 사회적 기능회복, 민족형식의 문제, 리얼리즘의 재인식, 식민잔재 미술의청산,매체의 개발과확대등) 후반기에는 6월항쟁의 결집된 대중적 역량과 일정한 성공에 힘입어 구조적 모순의 타파와 사회 변혁적 요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면서 반식민 ·반제국주의, 반독재 더 나아가 분단상황극복, 통일실현의 방법 모색과함께 한편으로노동계급의 투쟁과 생활을 지원하는 미술운동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참다운 미술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가운데 현장미술, 계층운동으로서의 미술, 정치선전선동의 미술 등을 통해 공해추방운동, 반전반핵운동, 여성해방 운동 동 사회적 문제를 미술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80년대에는 운동의 성공과 대중성의 확보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매체의 형식과 방법론 또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판화·벽화를 통한 선전, 각종 대중집회 때의 걸개그림의 등장, 달력 ·엽서 ·책자를 통한 출판미술운동, 옷 ·손수건 동의 생활미술품 운동 등 장르의 확대와 시민판화교실 ·민족미술학교각종 강좌와 세미나를 통해 대중의 역량을 결합해 내고 소모임을 만들어갔다.
한편 각 지역은 지역 나름대로 소수의 미술인을 중심으로 지역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미술운동의 위상을 점검하고 소모임조직을 확대해 지역사업을 벌려 나갔다. 부산의 〈낙동강〉, 광주의 〈시각매체연구소〉, 전주의 〈겨레미술연구소〉 등 지역모임들은 미술대학 학생들과의 연대를 통해 학내 미술패를 조직해 가는 작업과 함께 재야운동 단체 등과의 상호 연대사업에 시각매체의 지원 및 상호교류를 통해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전북지역의 80년대 과정 우리지역 미술운동은 1982년 봄에 80년대 미술운동의 선도적 역할을했던 〈현실과 발언〉 동인인 임옥상’의 천주 정착과 함께 전추대학 미술과의 수업을 통해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제도화된 교육현장을 통해 제기한 내용들은 기폰의 미술을 정답으로만 받아들인 학생이나 주변작가들에게 인식을 새롭게 점검할수 있는 최초의 계기였다. 더불어 작가의 작업과 주위와의 교류를 통해 미술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졌다.(임옥상 개인의 활동을 언급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도 있으나 시기나 내용,여건상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의의를 인정하고 싶다.) 1983년에는 이리에서 송만규를 비롯한 5-6인의 .젊은 작가들이 최초로 사회적 비판의식을 담아내는 〈땅〉전을 조직해 지역 소모임을 시작하였다.(〈땅〉전 자체는 첫 전시로 끝나고 말았지만 80년대의 미술과제운동과의 연대투쟁에서의 역할분담과 87년 겨레미술연구소를 만들어내는 잠재적 힘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 소모임은 타지역과의 교류나 지역의 각운동단체들과의 연대를통해 80년대 사회변혁운동에 미술패로서걸개그림, 판화, 전단, 포스터 등을 제작해 내면서 운동의 주요 부문활동을 강화해내고 있으며 〈겨레미술연구소〉를 차려 지역미술운동의 중요 역할을 담당해 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87년에는 전북지역청년미술공동체가 발족되고 그 아래 각 대학내의 소모임을 활성화시켜 연대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소모임으로는 전북대의 〈푸른 나무〉,〈바람〉, 〈길라잡이(만화패)〉, 원광대의 〈너와 나〉, 전주대의 〈쥐불〉,우석대의 〈그림사랑〉, 군산대의 〈두레〉, 전주교대의 〈도량이〉 등은 10명 내외로 구성된 인원으로서 총 6개 대학에 8개 소모임으로 만들어졌고 88년 전북대 안에 최초의 벽화 〈적왜양이〉를 제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겨레미술연구소(이하 겨레로 약칭)는89년 민미연 건준위 소속 전국6개 지역의 미술단체와 학미연 산하30개 대학미술꽤와 연대하여 민족해방운동사(2.6m〉〈77m)를 제작하였 는데 겨레와 학내 미술때들은 〈갑오농민전쟁〉 부분을 담당, 제작하였다. 그 내용은 갑오농민전쟁 당시의 반외세, 반봉건 싸움을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냈다. 그외에도 겨레는 노태우 풍자전, 거리판화전, 시민판화교실 등을 통하여 대중성 확보와 대중조직의 결성을 꾀하고 있다.
87년에는 도내 최초로 벽화패〈미륵〉이 만들어졌다. 벽화는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수많은 대중에게 전달되고 누구나 친근하게 대할 수있는 장점이 있는 장르인데 첫 작업은 정읍군 용동면의 농촌마을에 자비를 들여 〈신농민부활도〉를 제작했고 1년 뒤 전주시 개인집 벽에 〈함께만드는 대동세상〉을 완성하였다. 그뒤에 재정여건과 벽화에 대한 인식부족 동의 이유로 〈미록〉을 자체 해산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편으로는 3 ·40대 회원들로 구성된 〈들 ·바람 ·사람들〉의 소모임이 만들어져 2회의 전시회를 가졌다. 이는 기존의 소모임에 비하여 나이차가 크고 약간의 보수성을 상대적으로 띠고 있어 운동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87년 온다라미술관의 개관은 타지역과의 비교에서 두드러진 성과로 나타난다. 현 수준에서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운동단계가 전시장 중심 차원의 기획이 전무한상황에서 온다라는 자체기획으로 전시 ·강연 ·강좌·공연 등 복합적 문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신학철전을 시작으로 작업성과가 두드러진 80년대 대표작가들의 전시와 80년대 미술을 소개하는 각종 강연, 80년대 민중판화전, 북녘의 산하전, 명양사징캘을 비롯하연 한글T셔츠전, 우리가 만든 그림책전 동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여 왔는데 이러한 활동은 다른 지역중 거의 유일한 성과로 평가되고 었다. 온다라의 그간 행사는 양과 질적인 면에서 지역문화에 기여한 바가적지 않으나 나름대로의 한계도 지니고 있다. 운동성을 가지고 있으나 개인이 운영한다는 측면에서 운동성의 약화와 함께 공식적 명가의 틀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앞으로 보다 합리적 인식을 토대로 한 기획과 대중성 확보를 위한 방법의 모색, 지역 미술인들과의 배타적 관계구조의 해소, 청년 미술인들의 조직과 벌굴 육성 등을 통해 참된 미술관의 기능을 확대해야 할 것이다. 90년대의 과제앞에서 살펴본 대로 80년대 전체의 미술운동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큰 비약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서울을 제외한 각 지역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주목할만한 운동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역성의 차이를 구분할만한 질적 발전도 크지 않고 양적인 운동성과도 많지 않다. 전북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민족민중미술의 양적 확보는 지극히 답보상태이고 질적인 진전도 미미한 형편이다.
사실 80년대 10년의 과정에서 위에든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의 대중운동 확산발전 차원의 논의나수명적 연대가 전무한상태여서 조직의 확대나 인자들의 생산을 거의 해내지 못했다. 8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뼈저린 반성이 요구되는 것은 각 대중운동이나 학생운동, 미술운동 동 어느 집단이든 운동노선의 과학적 인식의 토대를 통해 지역별 미술운동단체나 개인들의 상호 이해와비판적 논의의 활성화, 내부결속 등의 힘을 모아 소모임의 조직화, 활성화, 대중성 확보에 주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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