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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1 | 특집 [특집]
외형적 다양한 양적 팽창, 삶에 관한 본질적 갈등은 외면
김정수(2004-01-27 14:22:16)


 연극이 그 자체의 예술성 이외에 분명한 사회적 기능을 갖고-었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술이라 이름지워진 모든 장르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종합 예술로서의 연극은 각 예술분야의 특징을 효율적으로 취해, 조합할 수 있으며 행위자와 관람자가 현장에서 직접 맞부딪혀 의식을 교류할 수 있다는 특유의 강점을 가지기에 그 사회적 기능의 폭과 깊이는 더욱 커진다 할 수있다.
하나의 예술품이나 예술적 행위가 단지 물리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감동을 수반하게 되려면 그 자체의 美의 추구로서만은불충분한 것이다. 예술이 그 시대롤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본질에 가장 밀접하게 접근하여 있을 때만이, 그리고 그들의 문화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보다 나은 바람직한 삶의 전망을 모색하는 데 기여할 때만이 연극의 사회적 책임 역시 막강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대전제 아래 80년대의 전북연극을 돌아보며 몇가지 문제들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1980년대는 전북 연극이 양적으로 크게 확장된 시기였다. 「朴東和」, 혹은 「創作劇會」로 대표되는 60, 70년대의 전북 연극 상황에 비하면 누가 뭐래도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엔 조금 벅찬 이 성장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첫째로는 전라북도 연극 제2세대라고도 부를 수 있는 대학연극반 출신들의 대거 사회 진출에서 찾아볼수 있다. 1979년 전북대학교 「기린극회」, 전주대학교 「였단」, 원광대학교「멍석」 등 6개 대화으혹r 구생된 전북대학연극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이 협의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교류를 갖게된 학생극운동의 주축들이 80년대 사회로 배출됨에 따라 朴顆선생 타계 이후 침체되었던 기성극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전북 연극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이들은 「예인」이나 「황토」, 「우리동네」처럼 극단을 직접 창단하기도 하고 「창작극회」나 「시립극단」에 가세하기도 하면서 80년대 전북 연극 활성화에 큰 세력으로 작용했다. 다음으로는 외형적으로 많은 극단들이 창단되었고 연극인구가 크게 확충되었다는 점으로도 설명되어진다. 이것은 앞서의 원인과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문제로 「합죽선」, 「예인」, 「백제마당」, 「갈채」, 「황토」, 「우리동네」 등 전주지역만도 많을 때는7~8개의 극단이 동록하고 있었고 정기적인 활동을 하는 대학연극반도 10여개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 외형적으로는 풍성한 공연이 곳곳에서 전개되었고 직, 간접으로 관계된 연극인만도 수백명을 혜아리게 되었다. 물론 이같은 극단의 난립이 대부분 건실한 재정과 조직, 전문성 동을 결여하고 있었기에 꼭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었고 오히려 역기능을 초래한 점도 있었다.
셋째로 지적할 수 있는 변화는 기존의 서구적 개념의 연극을 과감히 해체하고 고급 정신놀이에 치중하는 무대예술을 원래의 주체자에게 되돌려놓는 연극의식의 반전과 함께 새로운 우리劇의 방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녹두골」이 전용소극장을 갖추고 행한 일련의 작업들과, 성과 없이 무산되고 말았지만 연회동인 「꼭두」의 시도 등을 예로 들 수 있으며 각 대학에서 전개된 마당극 운동과 더불어 노학연대의 현장작업 퉁에서 건강한 연극의식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연극의 새로운 개념 정립과 함께 그 영역을 확대시키고 일상속에서 보다 친숙하게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80년대 전북 연극의 전개 속에서도 가장 큰 기등으로 남는 것은 「황토」와80년대 중반 창단을 본「시립극단」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80년대에 출발했던 대부분의 극단들이 한 두명의 뭇이 맞는 연극인들에 의해 치밀한 고려 없이 창단되었거나, 설사 뛰어난 개인적인 역량을 갖고 있었다치더라도 1, 2회의 공연으로 죄잔해버려 사실상 유명무실의 극단으로 전락했던 점에 비추어보면 「황토」의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공연은 상상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것으로 80년대 전북연극의 큰 수확으로 남아 있다. 1982년 이태우, 김병준 동 대학연극반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2회 공연까지 마쳤던 극단 「藝人」이 1984년 1월, 박병도의 「황토레파토리 시스템」으로 재정비 강화되면서 본격적인극단 활동에 들어간 「황토」가6년동안 보여준50회에 달하는 공연과86, 89년전국연극제의 대통령상 수상 등의 대외적인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지방이라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처럽 빛나는 성과를 얻기까지는 현재까지 실질적으로 「황토」를 이끌어나온 박병도의 뛰어난 조직력과 기획력, 연극에의 투혼, 그리고 지속적인 공연작업을 통해 강화된 단원들의 역량이 이의 뒷받침이 되었다. 이러한 개인적 역량의 결집이라는 「황토」의 강한 힘은 지금까지 지방연극의 고질적인 취약점으로 거론되던 관객동원과 재정난을 극복해내고 ‘하환된다’는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하면서 「황토」를 과거 「창작극회」가 그랬듯이 명실공히 전북연극의 대들보 자리에 위치하게 했다.
「황토j는 ‘진정한 예술성 추구’라는 명제 아래 ‘번역극과 창작극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고급 연극’을 표방, 다양한 연극적 욕구를 한몸으로 감당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철저한 자기 관리로 관객의 충을 두럽게 했다. 한편 1985년 5월에 광주, 포항에 이어 전국에서 세번째로 창단된 「전주시립극단」은 「황토」에 비하면 잦은 공연을 통해 관객들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로서도 큰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시립’이면서도 단원들의 확실한 신분보장제도가 미비된 상태에서의 출발이었지만 창단공연인 ‘까스띠야의 연인들’(원제 : 르 시드)의 공연을 톡해서도 보여주었듯 안정된 연기과 극 해석의 정통성은 「시립극단」의 존재를 고무적인 일로 느끼게 했다. 탄탄한 연기를 기반으로 전통적인 무대극 양식을 소화해내는 시립극단이 존재함으로써 타극단의 심리적 부담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것이며 보다 활발한 실험극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초대 상임연출가였던 장성식의 연극에의 열정과 창단 공연의 연출로 인연을 맺은 나상만의 탁월하고 진지한 연기지도는 「시립극단」을단 기간내에 본궤도에 을려 놓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시립극단」의 위상정립이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1989년초 상임연출이 바뀌면서 어떤 발전을 꾀하는가는 전북연극의 발전을 위해서도지켜봐야할문제이기 때문이다. 황토의 왕성한 활동에 비해 20여년의 전통을 갖고 었던 「창작극회」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박동화 타계 이후 대표를 맡았던 박길추가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전성복」,「유영규」, 「박의석」, 「신상만」 등으로 수 없이 대표들이 바뀌면서 공연의 맥은 끊기지 않았지만 사실상 방향감각을 상실한 극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주지역 이외에도 군산, 이리, 남원등지에서의 극단 설립은 80년대 전북연극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차지하지만 대부분 대학연극을 주도해온 몇몇을 축으로 어려운 환경속의 작업을 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아마츄어 극단의 면모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었다.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80년대 전북 연극의 일단 외형적인 면에서는 다양해지고 왕성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연극현상 모두가 긍정적인 면으로만 평가될 수는 없다. 지방의 연극을 논할 때 언제나 기다린듯 끼어드는 ‘열악한 환경’이라는 보호막을 걷어내게 되면 곧바로 80년대의 전북 연극은 그 탄계를 노정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연극은 왜 하며 연극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아주 초보적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연극이 인간에게 유익한 교양의 터를 제공하며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서 당연히 발전해야만 한다는 지극히 소박한 예술론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분명 예술의 주체가 인간이고 창작자의 자족이든 감상자의 위안이든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한 시대의 산물로서 그 시대의 삶을 대표하는 사명을 ale는다면 전북 연극은 그 의식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안일하고 스스로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문화적 사치를 즐기는 부류와 야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한예로 연극보다 더 극적인 형태로 다가왔던 이땅의 삶에 관한 본질적인 갈등들은 외면한 채 중앙 무대에서 갈채를 받는이 연극의 복제 재생산에 주력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전북연극뿐만 아니라 한국연극계 전체가 겪고 갖는 진통의 일부로 파악되어야겠지만 「황토」로 대표되는 전북연극의 전국적인 활동을 감안해보면 더 이상 지방연극이라 해서 안전지대가 허용될 수 없는 인식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녹두골」의 작업은 비록 대중속에 크게 부각되지 못했지만 주시할만한 일이었다. 출발이 ‘연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민중의 삶을 고양시키는 건장한 운동으로서의 일련의 작업은 기폰 연극 단체들이‘연극적’인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90년대를 바라보는 전북연극은 그를 양적인 쟁탕과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도 예술성과 운동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수준높은 연극으로 변신을 꾀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길만이 유서깊은 전북연극의 명예를 지켜나가는 길이며 그 자체의 역동성으로 향토문화와 한국극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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