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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7 | 문화현장 [문화저널]
<제2회 백제기행>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지리산 일대)
김은정 본지 편집위원(2005-01-25 14:26:08)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큰 희망으로 여긴다.

민족적 비극의 상정인 지리산을 찾아 가는 날, 장마의 시작답지 않은 쨍쨍한 햇빛으로 우리의 설레임은 더욱 컸다. 이민족의 애환과 저항의 역사를 안고있는 지리산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찾고자하는가 이 시대에서 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계곡마다 봉우리마다 그 수많은 이야기는, 역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질 것인가.
어차피 지리산은 시작부터가 끝없는 물음 속의 역사 바로 그것이었다.
막연한 설레임으로 지리산을 잡으러( ? ) 나선 백제기행일행은 그러나 한결같이 이 끝없는 물음에 대한 한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만들어진 역사가 아니라 이루어진 역사의 모습으로 지리산은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설 것이라는 것을.
푸르디 푸르다못해 아예 검은색을 띤 7월의 산과 뙤약볕아래 드넓게 펼쳐지는 이 나라의 들판을 보면서 나는 백제기행을 시작하면서 밝혔던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큰 희망으로 여긴다」는 말을 새삼 가슴깊이 절절하게 새겨 넣었다. 호사스러운 전세버스는 바깥의 무더위를 비양거리듯 살 돋게하는 찬바람을 쏟아내며 한동안 묵묵히 달렸다. 백제기행 두번째 길이었다.


……백제기행에 참여하신 여러분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문화저널의 백제기행은 지나간 시대의 유적지를 찾아 헤매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고 우리가 딛고 서있는 이 땅 한반도를 절실히 둘러보아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우리시대와 우리 삶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바램에서 기획된 작업입니다. 이번 지리산기행은 방대하고 깊은 지리산의 역사와 그에 담긴 정신사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하는 시작단계입니다. 우리는-지리산기행을 4차쯤으로 계획하고 있는데 이번 1차에선 지리산을 둘러쌓고 있는 각 지역을 찾아 돌며 산의 밑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있어 지리산의 의미는 무엇이고 지리산의 생생한 역사가 이시대, 그 산과 가장 가까운 삶에선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버스가 관촌쯤을 지나왔을때 시작된 진행자의 인사말로 일행모두는 창밖의 광활하게 펼쳐지는 산야로부터 감동적인 시선을 거둬들여야 했다. 그리고는 자기소개.  저는 1회 백제기행때부터 한번도 빠지지 않은 이병천입니다 .  이기행이 몇번짼데.  …두번째…. 차속에선 한바탕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공동체적 삶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우리역사와 우리문화를 찾아내고자 하는 성실한 스스로의 다짐이라는 것을.인자(仁者)와 덕성을 갖춘 지리산은 한반도의 남쪽지붕이다. 백두산의 산맥이 바다를 앞두고 멈춘산이라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리웠던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민중의 이상을 담은 삼신산으로 더욱 우러름을 받았으며 오랜적부터 인간의 힘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자연의 조화를 하늘의 섭리로 여겨왔던 사람들에겐 외경스런 산으로서 완벽한 역사를 지닌 무속과 이상향의 고향이었다.
우리국토의 남부중앙에 위치하는 전북 &#8228;전남&#8228;경남의 3도와 남원 &#8228;구례 &#8228;산청 &#8228;하동&#8228;함양 등 다섯개군에 걸쳐있는 고산준령 지리산은 덕스런 어머니의 자태로 서로 연이어지는 산줄기를 뻗어내리면서 한반도 남쪽 구석구석에 그 정기를 담아낸다. 지리산의 높이는 1915m로 한라산보다 35미터 낮지만 그 넓이는 한라산의 세곱절을 넘어서 439km나 된다. 지리산은 가장 높은 봉우리 천왕봉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전북과 경남을, 서쪽으로는 전북과 전남을, 남쪽으로 경남과 전남을 가르는 세갈래의 산줄기를 뻗어내렸는데 그 길이는 140km에 이르며 그 산줄기는 저마다 곁가지를 쳐서 사이사이가 깊고 긴 골짜기를 수없이 이뤄놓고 있다.

이 골짜기를 타고 지리산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경남 함양군과 산청을 거쳐 진주에서 남강을 이루며 낙동강의 한가닥인 남강은 경남을 가로질러 흐르다가 창녕에서 경북쪽에서 흘러나온 낙동강의 다른 한가닥과 합쳐져 부산을 거쳐 바다로 빠져나간다. 경남의 넓은 들은 지리산의 물로 기름지고 살찌는 셈이다. 또한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남원을 거쳐 지리산을 서쪽에서 감싸고도는 섬진강과 한몸이 되어 전남 구례와 광양에 젖줄이 되다 남해로 빠져나간다. 전라도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이갈래 저갈래로 나뉘어 흘러나가 버린다는 것이 아무리 자연의 섭리라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서쏟아져 들어와 너른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 전라도 땅을 흠뿍 적셔줄, 억눌리고 빼앗기고 소외받아온 맺힌 한
을 넉넉하게 받쳐줄 물줄기는 없는가

지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은 행정구역상으로 경남 함양과 산청의 경계에 들어있지만 그 주 능선은 전북과 전남의 경계로 뻗어내리고 있고 주된 수많은 봉우리들은 전남에 빚어놓았으니 산세로 보자면 전라남도의 산이 된다. 또 한편으론 예부터 지리산의 생김새가 소가 누운듯하다 하여 와우형(歐牛形)이라 했는데 그 모습이 구례군쪽을 바라보며 있어 사람들은 구례쪽을 내지리, 경남쪽을 외지리라고 하여 산의 안과 밖을 갈라놓았다. 그뿐인가 천왕봉과 함께 지리산 3봉으로 꼽히는 반야봉, 노고단은 지리산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와 수많은 사연들을 품은채 구례에 몸올 담고 있으니 아무래도 지리산과 구례, 지리산의 민족 민중 정신사와 구례사람들의 삶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음이다.

지리산 기행엔 풍수지리학을 연구해온 최중두 선생과 전북대 장호교수가 동행했다. 풍수이치에 매료돼 혼자 즐기며 40년여동안 풍수를 연구해온 최중두 선생은 「젊은이들이 풍수에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하여」 이번 기행에 혼쾌히 나서준 은행원 출신의 사업가이다. 역시 우리땅을 뒤적이며 현장에서 역사를 확인하는 모임이었다는 것에 큰 반가움을 나타냈던 장호교수는 이땅 지형을 구석구석 탐사한 지리학자로 「섬진강 상류의 단구상 지형의 연구」등의 귀중한 논문을 발표, 그 업
적을 높이 평가받은 바 있다. 아까 우리가 올라온 공원관리사무소가 호경리라고하는 곳인데 거기서 쭉 오면서 깊은 계곡이 왼쪽으로 보였었지요 그것이 바로 요천상류입니다. 이길이 정령치길인데 이물이 구룡폭포, 육모정을 지나 섬진강이 되고 또 한쪽으로는 남원 고기리 &#8228;덕치리에서 운봉&#8228;피바위 &#8228;인월 &#8228;산내 &#8228;마천 그리고 진주 남강이 되어 낙동강으로 빠집니다. 남원 운봉 고기리와 덕치리가 아주 낮은 골짜기인데도 불구하고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계가 되는 셈이지요  지리산과 섬진강의 지리학적 특성을 장교수는 섬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는 백제기행을 떠나기전 자료로 써 달라며 보내왔던 「리산지의 자연지리」와 지리산도가 이미 인쇄물로 복사되어 일행모두에게 넘겨진터였으므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육모정에서 정령치, 천은사까지 이르는 고개를 거만하게 넘어섰다. 불과 얼마전 아름다운 지리산의 경관을 해친 상식이하의 개발이라고 어느 자리에선가 목청 높혔던 기억을 쓰디쓴 웃음으로 되살리며.

정령치에 이르러 마주한 지리산, 운해(雲海) 속에 잠긴 지리산, 아름다움의 극치에 대한 찬사마저도 앗아가버리는 자연에의 경이로 인간됨이 차라리 허탈했다. 저 계곡과 아름다운 능선에서, 험준한 봉우리에서, 이 민족의 젊은 세대들은 왜 피를 뿌리며 죽음으로 앞서야 했던가 왜 지리산은 끝없이 가혹한 고난의 무대여야 했는가 이병주의 장편소설 「智異山」의 상징적 의미가 떠오르면서 내앞의 지리산은 민족적 대립의 처참한 비극의 산으로 달려왔다.
하오 2시 30분 전주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6시쯤 천은사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 산채 요리 전문식당에서 호사스런 저녁 식사를 했다. 그곳은 구례여중 교사 박두규시인이 고향사람들을 위해 선약을 해둔 집이었는데 맛깔스런 전라도 산채요리로 우린 즐거웠고 막걸리대신 소주잔을 돌려가며 그릇을 비웠다.
구례는 사실 이번 기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기왕에 지리산의 밑자락 사람들의 삶을 만나고자 했던 것이 목적이기도 했을 뿐 아니라 박두규씨나 선생을통해 우리가 모시기로 했던 구혜문화원 김무규 원장이 구례문화의 절실한 모습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였다. 김원장은 여든살의 노옹이면서도 이름난 궁사이자 거문고와 북을 다루는 솜씨도 빼어나고 단소로 문화재가 된 구례문화의 터줏대감으로 익히 알려진 터여서 시간의 어긋남으로 그를 못 만나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이란 더욱 큰 것이었다.

구례를 거쳐 쌍계사로 가는 국도는 왼쪽으로는 지리산동성이를 오른쪽으로는 섬진강을 끼면서 이어졌다. 섬진강은 진안군 백운면에서 오는 것이 제일 깁니다. 중간에 들어온 것은 장수 수분리에서 내려와 남원을 거쳐오는 것과 장수 번암에서 순창을 지나오는 것이 있읍니다. 이것들이 모여 강다운 강이 되는 것은 곡성쯤에 이르러서인데요 어느 하천에 비해서도 섬진강의 특정은 그랜드 캐년만은 못해도 협곡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런 강을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까지 이용할 수 있느냐, 그것을 지리에선 소강종점이라는 것인데요, 다시 말하자면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배가 어디까지 올 수 있느냐면 섬진강 같은 경우 구례구 정도가 됩니다. 때문에 구례는 임진왜란당시나 그후 철도등 도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을때는 남해에서 거슬러 올라올 수있는 소강종점이었기 때문에 일본과도 교역이 가능했을 겁니다.  장교수는 지리산과 섬진강의 일반적인 자연현상과 더불어 지리산과 섬진강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옛사람들의 삶의 방식까지를 폭넓은 시각으로 들려줬다. 박두규씨가 민박장소로 정해놓은 의신을 들어가기위해 우리일행은 화개를 거쳤다. 일행 몇몇은 화개장터에서 쉬었다가자 했으나 어찌어찌하다 그냥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놓아먹인 써암탉 두어마리 묶어놓고 꾸벅꾸벅 졸고있을 할매, 더덕이며, 깻잎이며 고추며 고만 고만한 그릇에 담아 놓고 질펀하게 앉아있거나 헛된 박질만 해대고 있을 아낙네 모습을 그려 넣었던 화개장터. O O나이트클럽, O O훌, O O싸롱, O O수퍼------둥둥. 건방진 도시사람들의 이기적인 환상은 깨끗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아, 서러움만 안겨주었던 창밖의 화개장터여 !
우린 의신까지 가지못하고 쌍계사 넘어 신흥서 민박을 했다. 여장을 풀고 토론을 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어놓고 일행 모두가 설레임으로 막 자리했을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지리산고난이 시작되는구나」
우리는 방안으로 자리를 옮겨 둘러앉았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는 엉겁결에 단체손님 받아놓고 아저씨한테「사서고생한다」고 책망들었다면서도 다음날 아침 그곳을 출발할 때까지 싫은 기색 한번 하지 않고 뒷치닥거리를 해주었다.
 소백산맥의 주맥이 지리산에 머무니 지세를 살펴보건대 좌로는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이 이어져 좌청룡으로, 자리하고 우로는 一支麻이 하동과 함안을 지나 검해에서 멈추니 우백호가 자리한다할 수 있읍니다. 특히 지리산은 태백 &#8228;소백 &#8228;덕유&#8228;지리산까지 뻗어나간 산맥으로 볼 때 천리를 싸주는 명산중의 명산에 틀림없지요  풍수사상을 일종의 신앙이라고 본다는 최중두 선생은 신과 인간의 삶을 이어주고 자연의 섭리를 활용하려는 사상을 지닌 풍수사상이야말로 진취적 사상이라고 얘기했다. 풍수사상(風水思想), 자연과 인간의 삶을 접목시키는 이 사상이야말로 얼마나 귀중한 사상이던가 그럼에도 과거의 역사속에서 풍수는 오히려 지배층들의 자리다툼에 악용돼왔고 그 중에서도 전라도 사람들에겐 풍수설이 미끼가 되어 출세의 길이 철저히 막혀져 왔었으니 이제 전라도 시각의 풍수가 정립돼야 한다는 한일행의 말도
참말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결국은 지리산의 민족&#8228;민중적 정신사로 얘기가 되돌아갔을때 토론의 자리는 일부 피곤한 일행을 위해 마루로 옮겨졌다. 누구랄것도 없이 2층식구(여자 회원들)는 더 이상 얘기마당을 지키지 못하고 올라와 있었는데 모두 눕거나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지리산 기행의 소중한 정신을 오랜동안 가슴속에 묻어두려는 기색은 역력했다. 아래층에서  백두여 한라여 우리는 만나야한다며 목청 높여 부르는 노래는 콸콸 쏟아지는 계곡의 물소리와 더불어 우리의 가슴을 더욱 고동치게 했다.
빗속에서의 이튿날 기행은 경남 하동-진주-산청-번암-장수-진안-전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경남 하
동을 거쳐 남해고속도로로 들어서기전까지 우린 도무지 끝날것 같지 않은 섬진 강변 국도를 달렸다.
지리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가 합해진 섬진강은 남해로 흐르면서 지리산의 한의 역사를 더욱 애잔하게 담아두고 있다. 하동을 거쳐오는 길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를 멀리서 보았다. 지리산의 맥을 멎게 하고 높지 않은 굵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평사리는 그 앞으론 넓은 들판이 섬진강가에 이르도록 펼쳐져 있어 지리산의 중후한 역사와 섬진강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土地속의 서희와 길상이, 조주사 임이네가 떠올랐다.

진주시내를 지나 촉석루와 진주 국립박물관을 들렀다.잘 단장된 진주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나는 소외된 전라도 땅의 사람인 것에 새삼스럽게 울분이 치솟았다. 그리고 박물관 진열장을 들여다보면서 묘한 반감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유물의 대부분이 지배계층의 호화로운 장식품일 뿐 한 시대 민중들의 절실한 삶을 살펴볼 수 있는 흔적들은 드러나있지 못한 때문이었다. 만들어진 역사는 이렇듯 난무한데 이루어진 역사는 언제나 되찾아질 것인가. 육십령고개를 넘으면서 지리산에, 아니 우리 한반도 자연에 지녀왔던 낭만적인 감정을 씻어내고 싶었다.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이 피로 물들었던 시절의 처절한 이야기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한시대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가슴속에서 호홉하는 역사로 되살아나야한다는 것을 지리산은 소중하게 깨우쳐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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