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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9 | 문화현장 [문화저널]
<제3회 백제기행>쌀의 수난사(群山 미곡창고에서 扶安 계화도까지)
진호 본지 편집주간(2005-01-25 14:27:14)


한반도 남쪽에 온통 올림픽만이 가득차고, 올 쌀 생산량이 작년보다 1.8%~3.9%가 많은 3천9백여만섬의 대풍을 기록할 것이라는 농수산부의 발표가 있었던 지난 9月에도 일부 신문의 한귀퉁이엔 우리의 관심을 갈구(渴求)하는 기사(記事)가 간헐적으로 실리곤 했다.
&#43090;지금 상태 계속 땐 농촌 떠나고 싶다

 일부 농촌 자살률 도시의 4배

이농(離農)으로 농촌에 가정이 없다

농업진흥공사에서 실시한 순창군민 의식조사(意識謂査)는 자녀교육, 농촌의 저소득, 농업전망의 불투명 둥으로 농촌에 남아있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실제로 순창군인구는75년에 비해 12년 사이 41%가 줄어들었다. 이같은 이농(離農)으로 인한 농촌가족의 해체현상은 농촌에 가정이 없는 현상을 낳고 있으며 일부 농촌의 자살율이 도시의 4배(연세대 의대팀 조사)에 이르고 있고 농민을 자살로 몰고 가는 生活苦에는 농가부채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제 농촌을 얘기할 때 &#43090;한자리 수&#43091;의 단위「%」는 意珠가 없다. 농촌은 죽어가고 있는가?

9월 15일 오전 9시30분.

2회 백제기행 때도 비가 따랐었는데 그날도 초가을 비가 함께 했다. 고사(告祝)라도 지내야 되겠다는 회원들의 쑥떡거림 속에 언제나처럼 약속시간 보다 30분쯤 늦게 출발한 기행팀이 이 고장 최초의 신작로(新作路)였다는全-群도로에 들어섰올 때 주최측의 인사말이 시작됐다.&#43090;쌀의 수난사라는 주제로 세번째 백제기행을 갖습니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끝없는 들녘을 지나며 이땅 사람들은 우리의 「밥」올 어떻게 일구며 가꾸어 왔는지를 확인해보는 작업입니다. 특히 이번 기행은 일제 한반도 침략의 거점이었고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엄청난 쌀반출의 전초기지였던 군산항을 중심으로 한 농토수탈의 현장을 찾아보고 이 시대 우리 농촌 현실은 어떤지 현지 농민들과 함께 직접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기행은 군산을 시작으로 김제, 부안 둥 서부 들녘을 지나 부안 계화도까지 이어집니다.&#43091; 사회자는 안내와 함께 백제기행은 차속에서 노래를 절대 시키지 않는다는 규율( ? )까지 소개했지만 이 약속은 돌아오는 차속에서까지 적용되지는 않았다. 1회 때부터 한번도 빠짐없이 참가한 낮익은 얼굴들로 우린 더욱 반가웠고
어린딸을 무릎에 앉힌 30대 주부의 넉넉함은 더욱 아름다웠다.

오전 10시 30분.

이번 기행에 연사로 초청된 詩人 이병훈 선생과 군산대 이세현 교수 일행파 합류한 기행팀은 먼저 옥구군 성산면 진성창지(鎭城會趾)를 찾았다. 역사를 거슬러 중국에서 이땅에 도작(積作)문화가 전래된 후 오랜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농경사회의 재정적 원천이었던 &#43090;쌀&#43091;은 지배계급에의해 어떻게 수탈을 당해 왔는가? 전국적으로 쌀의 소출(所出)이 가장 많은 이곳 전북의 서부들녘에서 생산된쌀은 왕조시대 재정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진성창지는 바로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유적이다. 史學을 전공하고 있는 군산대 이세현 교수는 濟運은 고려성종(992년)때 정비된 제도로 이 제도가 정비됨으로써국가재정의 근원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조운이란 자국 주요 수로(水路)연변에 조창(漫倉)을 설치하고 소속지역의 租規를 거두어 보관했다가 개성의 京倉으로 水運하는 제도로 이곳 진성창지는 전국 13개 조창 중 하나였던 셈이다. 고려황조는 개성이남에 12개 이북에 1개의 조창을 두게 되는데 진성창은 현 扶安의 安興倉과 더불어 호남평야의 창고 역할을 맞게 된다. 매년 2월에서 5월사이 예성강을 따라 개성으로 운반되는 조운제도는 고려말 왜구의 발호로 큰 타격을 받게 되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창&#8228;조운제도는 왕조시대의 중요한 쌀의 수송방법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들어와 처음으로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1223년, 그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은 바로 호남지방의 곡창지대였고, 이로 인해 한때 조운이 불통되자 왜구는 내륙으로 들어와 조창의 조곡까지 약탈해 갔으며 이곳 진성창이 무너진 것도 고려말 왜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구의 창궐로 전라도 조운이 어렵게 되자 조정에서도 육로를 대해 세곡을 운반하는 방법을 택하나 이러한 육운(鷹훌)은 백성들의 고통을 더 심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온다. 왜구를 막아낼 수 없는 무력한 관리와 무거운 租뾰 조운이 끊기자 내륙까지 침범, 약탈하는 그들 앞에 백성이 당하는 슬픔은 더욱 컷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당시 쌀의 약탈로 길바닥에 흘린 쌀이 발등을 덮을 정도였다고 이병훈 선생은 전했다. 진포해전으로 기록된 1382년(고려 우왕 8년)의 전쟁은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처음으로 사용, 왜구 5백척을 무찌르는 전과를 남기는데 여러 가지 문헌을 살펴볼 때 진포는 현재의 군산으로 해석되며 그후에도 진포는 조창 조운의 기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멀리 진성창의 조곡 안전을 위해 설치했다는 산안개 자욱한 오성산 봉수대를 올려다보며 마을안 미륵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은채 군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한 일본인 칼에 의해 머리부분이 떨어져 나갔다는 그 미륵불은 언제부터 거기 세워져 있었을까? 무엇을 갈구하여 서 있었을까?

금강하구인 군산 옥구지역은 조선왕조에도 가장 중요한 쌀의 조운&#8228;조창 역할을 한다. 세종조에 군산에 군포영을 두고 1649년(효종) 대동법 실시로 이 지방에 호남청을 두어 쌀의 저장관리를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왕조의 국가재정을 위한 이 같은 제도는 농민에 있어 무거운 조세로 인한 수탈의 대상에 다름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세도 정권기에 봉건지배충의 농민에 대한수탈은 어느 정도 였던가?
삼정(三政) 문란으로 집약되는 이 시기에 농민이 부담해야 하는 租目이 43종에 이르고 이같은 공식적인 것 외에 외지에서 온 수령과 봉건지주들이 온갖 명목으로 탈취해 간 소작 농민의 쌀은 어느 정도일까? 농민들은 높은 생산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생활의 윤택을 누릴 수 없었고, 조선후기 각종 민란과 동학농민혁명을 거쳐오면서도 이같은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오전 l1시

말끔히 포장된 도로를 따라 전세버스는 임피면 소재지에 다달았다. 채만식의 생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초라한 문학비와 함께 그나마 생가는 양조장으로 남아 있어 40여년의 세월을 말해준다.

채만식-

그는 동학혁명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 땅의 농군들이 어떻게 살아 왔으며 어떤 수난을 받았는가를 그의 탁월한 몇몇 작품을 통해 역사의 이음매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낸 작가다. 군산 미두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소설「탁류」를 통해 보여준 가난하고 우울한 시대의 흔들리는 세태풍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단편 「논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동학혁명 이후부터 해방직후에 이르는 약 50여년의 한국자본주의경제 형성과정과 토지에 얽힌 官&#8228;民의 불협화음, 외국자본에 의한 민족자본의 예속과정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전라도&#43088;농투성이&#43089;한생원을 통해 그는 억압받고 수탈만 당하는 농민에게 있어 「나라(국가)」는 의미가 없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오전 11시 30분

임피를 떠난 기행팀은 한참 마무리 공사에 들어선 군산하구둑에 서서 일제시대 그들이 실어낸 쌀의 분량을 헤아려 본다. 1899년 개항이후 일본의 식민지 전진기지가 됐던 군산을 중심으로 그들은 옥구, 김제 둥 만경평야에 일본인 대지주를 형성해 갔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통계연보에 의하면 1908년 군산을 비롯한 3개지역 명야의 10분의 1이 ,일본인 소유였다. 1910년에 이르러서는 전북 총경지의 20% 정도를 접하게 된다. 또한 이곳 전북은 일제하 영세한 농민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1918년엔 전농가의 92%가 소작농 또는 자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일제의 개입으로 우리나라 농민층은 지주-소작관계로 양분되고 그 격차는 전북지역이 가장 두드러진다. 쌀수탈의 방편으로 대규모창고와 정미소가 들어서고 1910년경 전라선 철도와 도로(전-군도로, 김제로), 만경교 등이 가설되며 쌀반출의 향구였던 군산은 일본인들의 은행과 대도매상으로 온 도시를 점유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25년 그들은 285만엥이라는 거액을 투자 군산내항을 착공, 1933년 준공하고, 쌀25만 가마를 일시에 보관할 수 있는 거대한 창고 3동과 만8백평의 옥외하차장을 건설한다. 이렇게 해서군산을 통해 나간 쌀은 1934년 한해동안 전국 쌀생산량의 20.5%인 230만섬, 제2차대전 중인 l942년대에 들어서면 이같은 수치는 &#43090;공출제도&#43091;에 의해 더 심화됐다.

낮 12시

기행팀은 군산시내률 돌아 월명공원에 올랐다. 「탁류」에 묘사된 것처럼 미두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군산시는 당시 대도매상이 즐비한 거리였고, 무역상과 은행들 그리고 요즘의 복덕방 같은 점포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미두는 오늘날의 중권과 유사한 것이기는 해도 일본시장의 쌀값을 두고 저울질하는 일종의 곡물경매시장이었다. 대재 「미곡취인소(米뤘取人所)라는 간판을 내걸고 식민지하에서 고달픈 사람들을 끌어들인 삶의 현장, 바로 그 상정일 것이다. 하루에도 수천섬의 쌀이 배에 실려가는 꼴을 보면서 우리 농민들은 배를 곯았다. 그리고 농민들은 하나 둘 씩 떠났을 것이다. 자작농은 소작농이 되고 소작농은 극빈자가 되고 극빈자는 걸인이 되어 떠났을 것이다.

1925년 1년간 전국에서 농촌을 떠난 인구는 15만명, 이들은 걸인이 되거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혹은 일본 만주시베리아의 노동시장으로 흘러가거나 국내 각 도시의 일거리를 찾아 모여든 土幕民이 된다. 농촌빈민파 화전민,토막민의 이른바 3대 빈민층, 이들은 바로 식민지 지배정책의 정직한 산물이었다.
월명공원의 채만식 문학비 앞에 오랫만에 나들이 나온 듯한 두 쌍의 부부가 도시락을 벌리고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쌀을 생각하면서 그날은 아첨부터 무척 「밥」이 그리웠다. 「밥과 말」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것-. 먹을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얘기할 수 있다는 행복함-.

오후 2시.

천3백원짜리 푸짐한 「밥」을 먹은 우리는 대야를 지나 만경평야를 달렸다. 왕조시절, 곡창지대인 김제만경 방면으로부터 이 길을 따라 이어지는 선조들의 조곡수송 행렬은 쉼없이 붐비었을 것이다. 지금도 덜걱다리라고 부르는 주막거리엔 피곤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드는 나그네들로 흥청거렸을 것이고-. 해방 후 이 땅의 농민들은 잃어버린 내 땅을 찾을 줄 믿었다. 그러나 봉건잔재의 청산과 함께 경자유전(排者有田)원칙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절대다수의 농민이 바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은 대단히 불철저하게 실시되어 완전한 농민적 토지소유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토지개혁 없이는 민주주의적 경제재건은 있을 수 없었으나 정권지배층은 봉건지주의 이익을 대변할 뿐 농민의 권익은 보호하지 못했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 유산청산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였던 토지개혁 문제가 지주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끝나고 그후 계속된 농촌정책 부재현상은 「쌀의 수난」이 계속되는 원인으로 남는다. 해방을 전후하여 순전히 생존의 문제로 山으로 올라간 농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에게 「이념」이나「이데올로기」가 무엇이었던가? 쌀은 곧 생존 그 자체였다.
그리고 분단시대-차츰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도시엔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저곡가 정책은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도시로의 이농현상을 부채질한다. 저곡가 정책은 이농현상으로 이농현상은 공장노동자의 확보로 맞몰려가며 농촌은 피폐해 가고 전라북도는 인구이동률이 해마다 가장 높았다.
넓은 들판을 지나 「김제」 「부안」으로 이어지는 도로엔 올림픽을 앞둔 각종 만국기가 무심히 펄럭이고 있었고 차는 계속해서 신태인 쪽으로 달렸다.

오후 3시 30분.
우리는 신태인 성당 앞뜰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싱싱한(?) 두명의 농부를 만났다. 그리고 성당의 한 허름한 방에서 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6천명 정도의 논밭을 경작하고 있는 김영근씨(36, 카농 정읍협의회 총무)와 소작농 서중석씨. 그들에게 있어 우리의 관심이 한낮 스치는 바람이나 서튼 허영으로 비쳐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런 의구심은 끝내 떨쳐 버리지 못했다.
「농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농업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농촌에 살면서 온종일 논밭에 메달라면서 느꼈던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제 이 나라는 근본적인 농촌문제 해결에 눈올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수천년올 내려오면서 쌓인 이 나라 농업의 문제는 이제 설 땅이 없습니다. 추곡수매가를 몇% 올리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들은 그들이 조사한 통계나 정부의 통계자료를 이용, 산업화 시대를 맞으면서 농업 희생정책이 몰고 온 농촌의 파탄을 담담하게 얘기했고, 기행팀의 다소 지엽적인 질문엔 냉소적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실히 답변했다.
-1961년 우리의 식량자급도는 93.7%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83년 53%로, 금년은 38.4%(잠정적)로 떨어져 식량이 무기화 되어 가는 세계적 추세에 비추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농업만은 투기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실정인데도 개방 물결을 타고 도시 자본가들의 침투로 이제 다시 소작농의 비율은 농민전체의 43%에 이른다.
-모든 사회가 개방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농협의문은 굳게 닫혀 있다. 농자재 구입에서부터 판매까지 농협만으로 일원화되고 있는 실정에서 농사는 침체되고 관제농으로 전락하고 있다.
-물가안정을 빌미로, 왜 유독 쌀값만을 통제하는가? 쌀값만이 물가를 오르게 하는 주범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하루 세끼 쌀값이 커피 반잔값(250원)에 해당하는데도 비싼 것인가? 왜 농민의 희생만으로 안정을 유지하려 하는가? 공산품과 농산물의 인상폭을 따져보자. 정부의 비교우위론 정책은 농업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한다.
-그래도 평야지 농민의 형편은 산중 농민에 비해 나은 편이다. 산중엔 이제 빈집이 더 많고 그들은 축산이나 고냉지 채소도 할 수 없게 됐다.
-농민은 땀 흘린 만큼의 소득을 원할 뿐이다. 농산물수입 개방에 따라 농촌은 더욱 어려워져만 간다. 김영근씨는 농촌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녹색혁명과 가격보장 그리고 완벽한 토지개혁으로 임대차법을 없애고 토지는 농민의 것으로 되돌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추곡가 수매와 관련 단보당(300평) 생산비를 조목 조목 열거하며 한 가마당 107,780원은 받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토론의 끝부분에 한국농촌사를 연구하고 「일제하 전북 농민운동」 동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전북대 박명규교수(사회학)의 명쾌한 결론이 있었다.
「쌀의 수난은 곧 농촌의 수난이요 농민의 수난이다. 이같은 농민의 피해의식은 직접 땀흘려 경작한 대가를 자신이 향유-하지 못하고 무엇에 의해 수탈당하는데 있다. 그 수탈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가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왕조시대엔 수취의 주체는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나 지주였으며 지금에 와서는 외양적으로 시장교환원리에 의한 것처럼 보여지나 실은 불평등한 교환과 가격 결정으로 수탈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겉으로 자유로운 시장교환 형식을 벌어 매매되는 것 같으나 가격결정의 강제성으로 내면적 불균등은 더욱 심화되어 간다. 이것은 일제하에서 경매시장(미두장)을 이용한 교묘한 시장원리의 도입으로 쌀의 수탈이 자행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쌀의 수난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었다. 쌀의 수난은 바로 오늘의 역사였던 것이다.

오후 4시 30분.

기행팀은 그날의 마지막 목적지였던 부안 계화도로 향했다. 빡빡한 일정으로 좀더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함을 애석해 하면서-
제3공화국의 유산이라는 계화도 전망대에 올라 허기진 가슴을 막걸리로 채우며 우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간척지, 계화도를 굽어봤다.
쌀의 수난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70년대라던가 대통령 순방을 앞두고 심었던 모포기가 하루가 지나자 쓰러져 버리더라는 염전땅 계화도 지금도 풍년을 얘기할 때 각 매스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땅, 하늘에서 찍고 땅에서 찍고 동원된 농악대 앞에서 찍어 언제나 풍년이었던 땅. 그 땅 계화도는 원래 부안군 행안면 계화리에 속했던 셈이었다. 계화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간척사업을 착공, 66년 제1호방조제를, 68년 제2호 방조제를 축조해서 3968ha의 땅을 매립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동진강으로부터 67km의 도수로를 정비하고 이물을 가두기 위한 청호저수지를 건설함으로써 계화도 간척지는 조성됐다.그뒤 1976년 경지정리를 마치고, 1977년 섬진강 수몰지구민 1922세대를 위한 1,000동의 조립식 주택을 지으면서 이주민의 계화도 생활은 시작됐다. 섬진강 다목적댐건설로 인한 이주민이 이곳에 처음 정착하면서 그들은 18명, 15명의 두가지 조립주택을 150~200만원에 분양 받았고 논은 30년 상환으로 한 필지에 60만원 가격에 분양받게 된다. 그러나 계화도로 이주해온 섬진강댐 수몰민들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시 떠나야만 했다. 이주민에 대한 생계대책 미비와 심한 염피해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그들은 간척지 이주증서를 쌀 한짝이나 현금 몇푼에 팔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최근 외지인에 의한 토지 소유는 점차 늘어나 현재 전체 농민의 약 7할이 소작농이 됐다. 동행했던 시인 이병훈 선생은 이곳에 서면 나이들수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구천을 맴도는 고향 사람들의 환영(幻影)에 시달려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시집 「달무리의 作A들」올 통해 그의 가위눌림을 호소한다.

풀 은
어느 때부터인가
作人들은
풀잎으로 누워서
뿌리를 감추고 산다
그러나 그들은
풀잎도 아니고
풀잎에 목숨을 심고 사는 바람도 아니고
바람이 갈아 온 흙도 아니고
흙들이 지켜 온 풀뿌리의 윤리도 아니다
풀잎이 생산한 이슬도 아니고
이세상 가는 곳마다 적신 물길도 아니고
그늘이 썩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끼도 아니다
그는 모른다
어데서 온 무엇인지
어데로 가는 무엇인지
알아낸 사람이 없다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구렛나루의 화가 박민명선생은그 의 고향 계화도에 온 기념으로 &#43090;사진 한장 멋지게 박아달라&#43091;고 너스레를 떤다. 계화도 전망대에서 우리는 이주민 오용근(창북리)씨와 자리를 함께 했다. 그는 추첨에 의해 1정(15마지기)의 이주권을 가지고 78년도 이곳에 정착했다고 했다.
온정성으로 농사를 짓고 벼목이 올라올 때 쯤이면 빨갛게 변해 버리는 바닷물 염(醒) 피해 때문에 농사 비용만 소비한 뒤 제대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4~5년 전부터였다고 했다. 그후 다행이 농촌기계화가 실시된 83년 이후엔 농사조건은 그런대로 좋아졌지만 이들은 아직도 원주민들로부터 소외되고 계화농협에 진 엄청난 빚이 그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음을 고백한다.&#43090;이제는 농촌에 눈올 돌려야 할 때입니다. 황성맹인잔치에 초대된 맹인들 여기저기서 눈뜨듯 그렇게 눈올 떠야합니다&#43091; 그렇다, 이제는 우리의 고향, 우리의 뿌리일 수밖에 없는 농촌 그곳에 눈올 돌려야 한다. 어둑어둑해지는 들판을 차창으로 스치며 이 기행이 나그네的 시각에 머물지 않고 어려운 농촌현실에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원해본다. 그리고 문득 사상최대의 풍작이라는 올해에도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지방지의 리드기사를 다시 떠올렸다.&#43090;낙농가구당 평균 빚 2천만원&#43091;
-장수관내 실태조사에서 밝혀져……
-전국 농가 평균 부채의 9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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