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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 | 특집 [읽고 싶은 이 책]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윤지용(2016-07-15 09:35:38)




태초에 빛이 있었다. '빅뱅(Big Bang)'이다. 성서의 창세기는 조물주가 "빛이 있으라"고 하기 전에는 혼돈과 공허만 있었다고 적고 있지만, 사실 빅뱅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물질도 에너지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현대 천체물리학의 정설이다. 그러니 '혼돈과 공허'조차도 없었다.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된 것이 137억 9,800만 년 전이다.(사실 이 어마어마한 시간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인간이 이것을 계산해냈다는 것이다!) 빅뱅 이후 우주가 팽창하면서 다양한 천체들이 만들어졌고 46억 년 전에 드디어 지구가 탄생했다. 우주에는 약 1천억 개로 추산되는 은하계들이 있고 하나하나의 은하계는 1~2천억 개의 별들을 품고 있다. 그러니 우주 전체에 10의 22제곱 개 정도의 별이 있는데, 이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인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는 8개의 행성들 중 하나가 지구이다. 우주라는 백사장의 모래알 하나쯤 되는 셈이다. 지구의 깊은 바다에서 아미노산분자들이 결합한 최초의 유기체(생명)가 출현한 것이 38억 년 전이었고, 이 단세포 생물이 수십 억 년 동안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포유류가 등장했다. 250만 년쯤 전에 어느 꼬리 없는 원숭이가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두 발로 초원을 딛고 섰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다. 라틴어로 '남쪽지방의 유인원'이라는 뜻이라 하니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쯤 되었던 모양이다. 또 다시 진화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 15만 년쯤 전에 마침내 오늘날의 인류인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종(種)이 나타났다.
위에 정리해본 과정 전체를 다루는 것이 요즘 각광받고 있는 'Big History(거대사)'이다. 이 책 <사피엔스>는 그 138억 년의 세월 중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수만 년, 현생인류의 출현과 번성과정을 다루고 있으니 Big History에 비하면 '미시사(微時史)'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조들의 흥망성쇠나 프랑스대혁명, 증기기관의 발명 같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이 '나무'라면, 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대륙을 떠나온 때부터 오늘날까지의 과정은 '거대한 숲'이다. 유발 하라리는 지층 깊숙이 파묻혀 있던 뼛조각, 돌로 만든 도구의 잔해들, 동굴 벽에 남겨진 손자국들을 실마리 삼아서 '역사 이전의 시대(Prehistoric Age)'의 역사까지 생생하게 복원해준다. 지난 수만 년 동안 우리 인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압축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렇다고 이 책을 '역사서'로 분류하는 것도 마땅치 않을 것 같다. 고고인류학, 지질학, 생물학, 종교학, 과학사,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등등 지금까지 인류가 스스로에 대해서 쌓아온 지식의 대부분이 망라된 백과사전 같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사뭇 철학서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사람의 두뇌 속에 그토록 장구한 세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고, 독창적인 해석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이 책은 두껍다. 본문만 588쪽에 이른다. 그러나 술술 읽혀진다. 문체가 쉽고 번역이 유려한 덕분이기도 하겠거니와, 무엇보다도 쉴 새 없이 지적호기심을 자극한다.
"From one Sapiens to another" 책의 앞표지 안쪽에 인쇄되어 있는 저자의 서명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사피엔스다. 라틴어로 된 생물의 학명은 생물학의 계통분류체계인 '계-문-강-목-과-속-종' 중 속명과 종명을 붙여서 만든다. 호모(Homo)는 '인간'이라는 뜻을 가지는 속명(屬名)이고 사피엔스(Sapiens)는 종명(種名)이다. 저자 유발 하라리가 책의 제목을 '호모사피엔스'가 아니고 굳이 '사피엔스'라고 붙인 의도는 책의 초반부를 읽다 보면 명백해진다. 우리들(사피엔스)만이 지구 행성의 유일한 인간 종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 속(屬)에 속하는 호모에렉투스, 호모네안데르탈렌시스(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인간 종들을 교체하고 홀로 살아남았다. '교체'라는 얌전한 표현을 쓰지만 그 실상은 잔혹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직접적인 폭력으로 '인종청소'를 자행했을 개연성이 높고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수렵채집을 통한 생존경쟁의 과정에서 그들을 '도태'시킨(굶겨 죽인) 것이다. 어쨌든 동아시아 일대의 호모에렉투스나 유럽지역의 네안데르탈인들은 호모사피엔스의 번성과 함께 멸절되었다!
저자는 사피엔스라는 종이 이토록 성공적으로 번식하고 지구행성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 과정에는 세 차례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약 7만 년 전의 인지혁명, 약 1만2천 년 전의 농업혁명, 500년 전의 과학혁명이다. 평범한 유인원 종의 하나에 불과했던 사피엔스 무리가 인지혁명을 통해 객관적인 실체가 없는 허구(신화, 규범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만들어냈고 이것들 덕분에 다수가 참여하는 사회적 협력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사회적 협력이 사피엔스가 다른 인간 종들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종들을 압도하게 된 원동력이다. 그 후 농업혁명을 통해 잉여생산물이 생겨나고 지배엘리트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보다 더 대규모로 조직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과학혁명이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와 결합되어 전지구적 범위의 제국이 형성되고 마침내 사피엔스는 지구환경 자체를 변화시킬 능력을 갖춘 유일한 생물종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그래서 과연 우리는 행복해졌냐고 묻는다. 사피엔스라는 생물종은 개체수가 70억에 이를 정도로 다른 생물종들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한 사람의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소외와 고통과 불안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심해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유전자는 자신들의 성공적인 번식을 위해서 각각의 개체들을 '생존기계'로 활용하고 심지어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 썼듯이 우리나라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딜레마가 압축된 곳인지도 모른다. 불과 한 세기 동안에 가혹한 식민지배와 파괴적인 전쟁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모두 겪었다. 그러나 한국인 각자의 삶은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들보다 만족스럽다고 볼 수 없다. 작은 집단을 이루어 떠돌며 수렵채집을 하며 살아가던 사피엔스들이 농경과 정착생활을 하면서 행복해진 것이 아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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