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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 | 특집 [지역출판문화의 부흥을 꿈꾸다]
수(數) 쓰기가 힘들어 마음의 문(文)을 찾다
지역출판사의 고군분투기
김형미(2017-01-20 10:47:14)




문(文)은 곧 천문(天文)이니
문(文)에는 색(色)이 있고,
색(色)에는 기(氣)가 있고,
기(氣)에는 영(靈)이 있다.
기의 신령함(氣 속의 靈)은 어둡지 않아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
-<道典> 중에서-


귀신별이 떴다. 동지나 되어야 뜨는 별이 왜 벌써 찾아왔나. 28수(宿) 중 겨울철 별자리로, 여귀(與鬼)라고도 부르는 별. 죽은 사람, 즉 귀신이 타는 가마인 상여를 뜻하여 이 때쯤 하늘을 볼 때면 섬뜩한 느낌마저 들기도 하는. 수(數)가 살고 문(文)이 죽은 시대여서 그러는가. 네 개 주홍색 별로 이루어진 귀성 가운데 하나의 별이 있는 저 붉은 '하늘눈'이 올해는 더욱 붉게 충혈되어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해 오싹하다.
그렇다. 머리로 계산을 하는 수(數)가 아닌, 가슴으로 말을 전하는 문(文)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무슨 수가 없을까. 이래저래 수 쓰기가 참으로 힘들다. 해서 만나본 것이 에라, 쓰기 힘든 수는 재껴두고 마음으로 문을 찾았다. 그렇게, 지역 출판문화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우리 고장에서 출판인쇄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곳은 전주이다. 고려중기 이래 조선후기까지 왕실에 수백 년 인정받은 진상품으로 들어가 외교 문서로 사용된 한지가 발달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완주의 삼례문화예술촌이나 대승한지마을이 출판인쇄문화의 자랑거리로 꼽을 수 있는 지역이 된 건 당연한 것이다.
물론 직지심체요절로써 출판인쇄지역의 선두를 선수쳐버린 청주나 원주의 한지가 있어 아쉽게 되어버린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 고장의 다양한 노력으로 다져진 문화는 청주나 원주에 비할 바가 아닌 건 확실하다. 전주의 완판본(完板本) 문화관이라든지 목판서화체험관, 한지박물관, 독립출판물 전문서점이나 동문예술거리의 헌책방골목 등. 이밖에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일인출판사를 자처하는 이들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전주 출판 문화의 역사, 신아출판사
서정환(벽산, 77) 씨가 대표로 있는 전주의 <신아출판사>. 1970년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무려 47년 동안이나 건재해왔으니 그야말로 살아 있는 출판문화의 역사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신아출판사는 1970년대 활판시대부터 1980년 중반 이후 컴퓨터가 보급, 발전되면서 2000년대 활판이 아주 없어지게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몸소 역사의 한 현장을 통과해온 셈이다. 활판시대에는 일 년 동안이라고 해봐야 책 몇 권 내는 정도였고, 80년대에 와서는 무크지라도 낼 수 있었으며, 90년대에 이르러 그나마 출판등록이 자유로워져 인문학 잡지를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수필과 비평],[소년문학] 등 3종의 월간지와 [문예연구],[인간과 문학] 등 4종의 계간지를 비롯해 베스트셀러는 못 냈지만 5000종이 넘는 책을 출간해왔다는 서정환 대표. 지방 신문사를 전전하다 적성에 안 맞아 결국 종이 다루는 일인 출판사로 몸을 풀었다는 그는, 전주 완판본의 맥을 이어가고자 한다는 뜻을 굳건히 하고 있다. 완판본으로 인해 서민들에게 한글이 제대로 보급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그로 인해 출판의 중심이 되어보겠다고 말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 시인에게는 무료로 시집을 내주고, 유지가 힘든 인문 잡지사나 처음 시작단계에 있는 여타 잡지사들의 잡지도 거의 다 그런 식으로 책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인문학 시대의 도래'를 꿈꾸어왔던 그가, 이제 와 돌아보니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보던 이들은 사라지고 누구 할 것 없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거나 스마트 폰에 혼을 저당 잡혀 살고 있더란다. 그러한 모습에 어찌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말하는 '사전(辭典) 시대'는 이미 가고 없는 것이다.




시대의 발원자를 꿈꾸는, 모악
'사전 시대'는 가고 없지만, 최근에 새로 생긴 출판사도 있다. 전북 문인들 20여명이 각자 500만 원씩의 출자금을 모아 총 1억 원으로 열게 된 <모악>. 시인 안도현, 김용택, 유강희를 비롯해 소설가 이병천, 김병용 등 지역을 넘어선 대표 문인들이 우리 고장을 위해 할 일을 찾다가 우석 빌딩 5층에 자리를 구축했다고 한다. 현재 <모악>은 김완준 씨가 대표로서 직원 한 사람 두지 않고 홀로 지키고 있다.
김완준 대표는 꿈꾸던 세계여행 대신 <모악>에서 시대의 기록자이자 발원자가 되어보고자 한다. 전국 최초로 문인들이 설립한 출판사이니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련만, 되려 지역 출판문화 발전을 염원하는 정도가 무척이나 깊다. <모악>은 전주, 김제, 완주를 아우르는 지역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지역성을 띄는 건 당연하다고 그는 또 말한다. 하지만 이름 그대로 솥에 쌀을 안쳐놓은 어머니가 바로 모악산 아닌가. 밥을 퍼주다 보면 지역인들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전국에서 밥을 달라고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출판사가 될 수 있으리라. 문인들의 좋은 뜻을 안고 시작하였으므로, 그 뜻을 지켜가는 한 전국을 두루 품을 수 있는 솥이 될 것이기에.


나는 하나이기도 하고/열이기도 하네/열을 생각지 못하고 하나가 움직이면/열이 따라와 고독하게 혼자 가는 길을 막네/하나의 어리석음으로/세상일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것은/나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다른 곳에 있어서임을 모르는/또 다른 어리석음이네/나는 하나이기도 하고/열의 솥을 안고 있는 거시적인 시대라네/열 속에 하나가 들어가 다 같이 가는 역사라네
- '모악' 김형미


<모악>에 들러 김완준 대표와 얘기를 나누다 문득 떠오른 싯귀를 적어보았다. 현재 김완준 대표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은 홍보의 문제라고 한다. 책을 쓰는 작가들이나 문화의 중심에 있는 이들조차도 출판에 대한 관심이 없다고. <모악>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역 출판사들에게 힘이 생겨야 판매비도 서울만이 아닌 각 지역으로 모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민들이,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며 그는 이것이 본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짊어진 시대의 과제임을 짚었다.
사실 모든 중심은 '나'에게 있다. '나'라고 하는 이들이 지역 변두리에 있으면, 그 변두리가 바로 중심이다. 지역이 살아야 모두가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보다 많은 이들이 각자가 '나'라는 주역이 되어 전국에 수많은 '중심'을 만들어가길 나 또한 바래본다.
어쩌면 <모악>은 벌써 중심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작가회의의 모태인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아름다운 작가상 1회 수상자이면서 지역의 큰 어른이자 본보기가 되는 정 양 시인의 시집에 이어 박기영, 문 신, 정동철 시인이 잇달아 시집을 내었다. 정 양 시인이 당당히 구상문학상을 수상하게 되고, 박기영 시인이 백석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본 것은 힘을 덜어줄 수 있는 용기와 덕을 밑바탕에 안고 글을 써서일지도.


꿋꿋한 생명력을 갖춘, 부안이야기
2016년 여름에 사단법인이 된 부안의 <부안 이야기>는 탄생한 지 꼭 8년이 되었다. 핵폐기장 사건 이후 부안의 방향성을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대안책으로 내놓게 된 것이 <부안 이야기>이다. 부안의 땅과, 사람과, 역사와 문화, 예술이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부안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인 정재철 선생님의 답변이다.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바다도 잃었고, 갯벌도 잃었는데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두고 미래의 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부안역사문화연구소'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부안 이야기>는 서 융, 신영근, 연합치과와 더불어 170여명의 후원회원과 특별회원들의 후원을 받아 완벽한 자립 구조가 되었다. 책을 출간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의 가장 큰 사안은 재정이다. 재정자립이 편집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출신 외에 부안을 사랑하고 부안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뜻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부안 이야기>는 지자체 지원을 마다하는 독립체제로서 전국에 없는 드문 책일 것이다.
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구성하면서, 부안 지역 문화유산을 자료화하는 '부안 아카이브' 작업도 함께 추진해나가고 있다. 부안의 역사, 문화, 자연자원 및 각종 콘텐츠를 발굴하여 보존하고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사이버 상에 '기록 보관소'를 만든 것이다. 고문서와 사진, 영상, 기록물 등 부안 관련 각종 자료를 구축하고 유지 보수해 나가려는 작업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독립체제가 된다든가, 수익률을 낸다는 것은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지역의 출판문화운동이 전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모악>의 김완준 대표가 얘기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현 출판 흐름에서 미래는 다양한 콘텐츠를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문학이 죽으면 드라마나 영화의 질도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산업의 뿌리이자 밭이 될 수 있는 문학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원책 필요 없이 계속해서 책을 낼 수 있는 구조만 되면 된다고,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된다고.
그러고 보니, <신아출판사>나 <모악>, <부안 이야기>는 공통점이 있다.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그것이다. 각자 맡은 바대로 '존재한다는 것'이, 뜻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기본 수익금만 있으면, 훌륭한 콘텐츠로 생산 자생 구조"가 되어 보다 많은 지역민들에게 좋은 책, 훌륭한 정보, 질적인 문화로 되돌려줄 수 있다. 본연의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인 것이다. 그들 모두는 "왜 출판사는 중앙인 서울에만 있어야 하는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부익부빈익빈 구조로 되어 있는 지원 체계에서 벗어나 수많은 지역이 곧 중앙인 서울이 되어야 한다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살렸던 문(文)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말도 안 되는 수(數)에 밀려 바닥을 치고 있으니 가슴을 칠 노릇이다. 물론 시대의 흐름 탓도 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영상매체 등 시각적 효과를 부르는 세태가 주를 이루고 있어 문(文)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문과 함께 사람들의 가슴에 흐르는 마음도 사라졌다. 조금 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소통과 융합의 시대,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소통하는 인문학적 능력과 소양이 절실하다.
'소천지'라고 하는 '사람'은 천지 마음과 기를 받아서 나왔기 때문에 마음(心)이 있고 기(氣)가 있으니,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른 질의 기가 생기게 된다. 욕심, 미움, 포악함과 사랑, 즐거움, 평화로움 등 이 모두가 마음의 힘으로 양질의 기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 한다. 흔히 꿈에서 죽은 시체를 보거나 오물을 뒤집어쓰면 재물을 얻게 된다고 하는데, 귀성과 가운데 별인 적시기가 밝으면 모든 재화가 풍성해져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이 귀성과 응하는 이 때, 지역 출판문화 운동에 큰 힘을 불어넣었으면 한다. 이렇게 좋은 문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져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활기를 띠며 열릴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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