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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 특집 [오래된 오늘]
고두밥에 엿기름, 달짝지근한 추억의 향기가 되살아난다
엿 이야기
이동혁(2019-12-17 11:57:07)


옷깃을 여미는 계절. 이맘때쯤 더욱 생각나는 추억의 음식들이 있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서 식구들과 정답게 노나 먹던 군고구마, 풀빵, 호떡 등의 주전부리들. 아침 일찍 가마솥에 여물을 끓여 외양간 구유에 퍼 준 다음 고곤 했던 다디단 엿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 아로새겨진 추억의 주전부리 중 하나였다. 가난했기에 부족했고, 부족했기에 불편했지만, 왠지 그 시절을 떠올리면 고단했던 지난날보단 따스했던 온기가 먼저 모닥불처럼 피어오르곤 한다.
찰각, 찰각, 철거덕, 철거덕, 동네 어귀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하던 엿장수의 가위 소리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엿장수가 마을을 찾으면, 아이들은 당장 집으로 뛰어 들어가 떨어진 고무신이나 부러진 쇠스랑, 빈 병 등이 없는지 살폈고, 어른들은 혹여나 아이들이 멀쩡한 집안 살림을 엿과 바꿔 먹지는 않을까 긍긍하며 흰 고무신과 양은솥을 간수했다. 그렇게 단단히 단속을 해도 몰래 살림살이를 엿과 바꿔 먹는 아이들이 있어, 엿장수가 왔다 간 날 저녁에는 으레 회초리를 맞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또 한 번 마을이 떠들썩해지곤 했다.
간식거리가 풍부한 요즘 아이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 엿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먹던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그중에서도 전국에 이름난 익산 대동마을의 ‘용산찹쌀엿’은 오래 전부터 진상용 엿으로 귀한 대접을 받아 왔다. ‘엿장수 타령’에 나오는 ‘해멸(함열) 용산에 찹쌀엿’이 가리키는 엿도 바로 이곳의 것이다.
용산찹쌀엿이 가진 맛의 비결은 물맛과 관련이 깊다. 우물이 두 개나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어서 ‘대동마을’이라 불렀는데, 예부터 샘물이 맛있기로 소문나 다른 마을에서도 이곳의 물을 길어다 엿을 만들었다고 한다.
엿을 만드는 건 겨울 한철뿐이다. 그러나 준비 과정은 이미 가을서부터 시작된다. 먼저 겉보리를 씻어서 엿기름을 만들고, 햅쌀로 지은 고두밥에 섞어 식혜를 만든다. 이 식혜의 즙을 짜서 가마솥에 달이면 조청이 된다.
조청을 저으면서 계속 달이면 짙은 노랑 빛깔의 갱엿이 된다. 이 갱엿을 조금씩 뜯어내 화롯불 위에서 늘이면 공기가 들어가 부피가 커지고 색깔도 하얗게 변한다. 이때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바깥바람을 끌어들이면 찬바람이 엿의 수축을 도와 엿을 보다 엿답게 만들어 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엿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다시 먹기 좋게 늘여 자르면 비로소 완성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에 사람 손이 닿는 고행이다. 한 번 일을 시작하면 48시간 동안 잠을 한숨도 잘 수 없다는 게 김정순 할머니의 이야기다.
용산찹쌀엿을 만드는 김정순 할머니는 이미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여전히 엿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전통 방식 그대로 용산찹쌀엿을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장인. 그 맥을 잇고자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만, 고단한 작업에 금방 포기해 버리고 만단다. 자신만 아는 비법을 죽기 전에 계승시키고 싶다는 김정순 할머니의 바람이 어서 이뤄지길 기원한다._글 이동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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