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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 | 특집 [연재]
뉘른베르크의 반성과 재건
코로나 시대의 집콕 배낭여행
윤지용(2021-03-04 11:14:36)

코로나 시대의 집콕 배낭여행


뉘른베르크의 반성과 재건

윤지용 편집위원




고풍스러운 중세도시

뉘른베르크(Nürnberg)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에서 뮌헨 다음으로 큰 도시다. 영어로는 ‘Nuremberg’로 표기한다. 인구는 약 52만 명이다. 11세기 중엽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성벽을 쌓고 도시를 건설했다고 하니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다. 대부분의 중세도시들처럼 강을 끼고 도시가 형성되었다.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페그니츠 강은 마인 강의 지류라고 한다. 중세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였다. 특히 시계 공업과 정밀세공기술로 유명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최초로 철도가 가설되어 기차가 운행된 곳이기도 하다.


뉘른베르크의 명소들은 대부분 구시가지 성벽 안쪽에 있어서 도보로 둘러볼 수 있다. 구시가지 북쪽의 언덕에서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카이저부르크는 11세기 무렵에 지어졌다는데, 말 그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이저(Kaiser)’의 성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뉘른베르크에 오면 이 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유럽의 중세도시들에는 대개 유명한 광장이 있고 이런 광장들이 여행자들에게 랜드마크 구실을 한다. 뉘른베르크 도시여행의 출발점은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하우푸트마르크트 광장이다. 하우푸트마르크트(Hauptmarkt)는 우리말로 ‘중앙시장’쯤 되니, 옛날부터 이곳에 장이 섰던 모양이다. 시청사(Rathaus)와 성모교회(Frauenkirche)도 이 광장에 있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성모교회는 14세기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교회 건물 외관과 실내는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상들과 장식들로 가득 차 있다. 교회 앞쪽에 있는 시계탑의 시계는 1509년에 만들어졌다는데 날마다 정오에 인형들이 나와서 퍼포먼스를 한다.이 광장의 명물은 또 있다. 높이가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분수 ‘쇠너브루넨(Schöner Brunnen)’이다. 분수라기보다 탑에 가깝다. 옛 독일의 통치자들이었던 일곱 명의 선제후를 비롯해서 40여 명의 역사인물 조각상들이 분수를 에워싸고 있는데 조각상들에 새겨져 있는 세밀한 장식들에서도 이 도시의 뛰어난 세공기술을 엿볼 수 있다. 이 분수의 철창에 매달린 고리를 왼쪽으로 세 번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이 고리를 돌리려고 줄을 선다. 하우푸트마르크트 광장은 크리스마스마켓으로도 유명하다. 유럽의 도시들에서는 해마다 성탄절을 앞두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 화려한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뉘른베르크의 크리스마스마켓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대하다고 한다.


뉘른베르크의 철도박물관도 가볼 만한 곳이다. 독일은 철도교통이 발달한 나라다. 특히 뉘른베르크는 1835년에 독일에서 최초로 철도가 만들어진 곳이다. 뉘른베르크에서부터 인근 도시 퓌르트(Fürth)까지의 철길이 독일 최초의 철로였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에는 독일 철도청이 직접 운영하는 철도박물관(DB Museum)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다양한 자료들과 실물이나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어 독일 철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830년대에 운행되었던 최초의 기관차와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최신 고속 열차 ICE가 나란히 전시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나치의 본거지였던 뉘른베르크

고풍스럽고 평화로운 도시 뉘른베르크는 부끄럽고 아픈 역사를 끌어안고 있다. 사실 이 도시는 ‘나치의 요람’이었다. 1923년의 ‘뮌헨 폭동’ 이래 바이에른 주는 극우세력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고, 그중에서도 뉘른베르크는 1933년에 집권한 히틀러가 가장 사랑한 도시였다고 한다. 1939년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해마다 나치당의 전당대회가 열린 곳도 바로 뉘른베르크였다. 1935년에도 뉘른베르크에서 나치당의 제7차 전당대회가 열렸는데, 히틀러는 이곳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해서 유태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공식화하는 법률들을 제정•공포했다. 이른바 ‘독일혈통 및 명예보존법’과 ‘제국시민법’이다.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들이었는데, 뉘른베르크에서 제정되었다고 해서 ‘뉘른베르크법’으로 불린다.

뉘른베르크 구시가지에서 남동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당시의 나치 전당대회장 건축물(Reichsparteitagsgelände)이 그대로 남아 있다. 9번 트램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나치 전당대회장은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뜬 거대한 원형경기장 모양이다. 로마제국과 같은 대제국을 만들겠다는 히틀러의 야망과 광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인데, 외형만 겨우 완성된 상태에서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미완의 건축물이 되었다. 패전 후 독일은 미완성의 경기장 내부 일부를 일종의 역사박물관인 ‘기록의 전당(Dokumentationzentrum)’으로 조성해놓았다. 이 박물관에는 나치의 야만적인 폭력과 학살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히틀러가 구상했던 거대한 나치 전당대회장은 미완성이라서 실제 전당대회가 열리지는 못했다. 1938년까지 전당대회가 열렸던 곳은 동쪽 투첸트타이히 호수(Dutzendteich) 건너편에 있는 체펠린 비행장(Zeppelinfeld)이었다. 이곳은 일찍이 1909년에 독일사람 페르디난드 폰 체펠린이 수소가스를 채운 최초의 비행선을 만들어 이착륙에 성공했던 곳이라서 ‘체펠린 비행장(Zeppelinfeld)’이라 불리는 광장이다. 히틀러는 이 광장에 거대한 연단을 지어 수십만 군중을 내려다보면서 “위대한 독일제국”을 선동했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가 고대 페르가몬 신전을 본떠 연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초에 이 연단 구조물 꼭대기에는 나치를 상징하는 거대한 조형물이 있었는데, 연합군에 의해 폭파됐다고 한다. 히틀러가 특유의 과장한 몸짓을 섞어 열변을 토하고 이에 동화된 군중들이 열광하는 유명한 장면들이 바로 이곳에서 연출되었다.



나치의 본거지였던 뉘른베르크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으로부터 집중적인 폭격을 당했다. 전쟁 기간 동안 뉘른베르크에 떨어진 수만 발의 폭탄으로 많은 시민이 살상당하고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위에서 소개한 구시가지의 역사유적들 중 대부분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전후에 다시 복구한 것들이다. 이런 건물들의 외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군데군데 벽돌 색깔이 다른 부분들이 있는데, 부서진 곳에 새로 쌓은 벽돌들이라고 한다. 이 벽돌들에서 전쟁의 폐허에서 역사를 복원하고 도시를 되살려낸 뉘른베르크 시민들의 고난이 느껴진다.



독일은 부끄러운 역사를 스스로 공개하면서 참회하고 나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나라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전쟁의 폐허와 분단을 극복하고 유럽의 중심국가로 자리 잡은 저력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뉘른베르크도 그랬다. 나치의 만행에 대한 뉘른베르크 시민들의 사죄와 반성은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뉘른베르크 구시가지 바깥쪽에 ‘인권의 길(Straße der Menschenrechte)’이라는 거리가 있다. 이 거리에 세워져 있는 30개의 원형기둥들마다 각각 UN의 인권선언문 30개 조항으로 한 조항씩 새겨져 있다. 각각의 기둥들마다 새겨진 언어가 다르니 총 30개 나라의 말인 셈이다. 첫 번째 기둥에는 독일어와 히브리어가 병기되어 있다. 아마도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학살에 대한 반성의 의미일 것이다.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아랍어, 중국어, 티베트어까지 다 있는데, 한국어는 없어서 약간 서운했다.



전쟁범죄에 대한 단죄

뉘른베르크라는 도시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린 전범재판 때문이기도 하다. 나치를 패망시킨 승전국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1945년 11월부터 뉘른베르크에서 국제군사재판(Nuremberg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을 열었다. 1년여 동안 계속된 이 재판에서 나치 전범 24명이 기소되어 20여 명이 교수형이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중 현역군인 신분이었던 이들은 관례에 따라 총살형에 처했어야 했는데, 재판부에 참여한 러시아 장군이 “만행을 저지를 나치를 군인으로 대우할 수 없다”고 끝까지 반대해서 민간인 피고들과 함께 교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의 공군원수였던 헤르만 괴링은 교수형을 모욕으로 여기고 형 집행 전날 감방에서 음독자살했다.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이 아닌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진행한 것은 나치의 본거지에서 나치 정권의 주역들을 처단한다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던 뉘른베르크 법원 건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법원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법원 안에는 당시의 재판 기록을 전시하는 기념관도 만들어져 있다.


나치 전범들에 대한 심판과 처벌은 승전국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독일정부는 스스로 나치 전범들을 색출하고 기소하는 전담기구를 만들어 운영해오고 있다. 독일은 1945년 이래 14만 명 이상의 나치 부역자들을 추적해서 법정에 세웠고 이중 절반가량이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최근에도 전쟁 당시 십 대 소년으로 나치 수용소의 보조 경비원이었던 90대 노인이 기소되었다. 살아 있는 한 끝까지 추적해서 죄를 묻는다는 것이다. 침략전쟁의 전범들을 영웅시하여 신사(神祠)에 모셔두고 정부 인사들이 공식적으로 참배까지 하고 있는 일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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