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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6 | 특집 [특집]
6월 항쟁의 회고
이성호(2004-01-27 11: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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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군부정권의 4·13호헌조치와 그를 통한 영구집권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났던 민중항쟁이 있은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16년만의 대통령 직접선거와 17년만에 부활된 소선 거구제에 의한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루어냈을 뿔 아니라 소위 5공의 주역들을 국민앞에 끌어내는 동 수많은 정치적 변화들을 목격해 왔다. 그러나 항쟁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오늘, 온국민이 그토록 열망하던 사회의 민주화는 한발짝도 진전되지 못한 채, 오히려 5공의 망령들이 부활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이제 숭리감에의 도취 속에서 완전히 벗어난 오늘의 시점에서 항쟁의 과정을 돌이켜보고, 그것이 지니는 변혁 운동사에서의 의미를 재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역사의 진보란 과거의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진행되는 것이라 할 때, 6월항쟁의 의의와 한계에 대해 정리해 보는 것은 향후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방향을 정립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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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조치철회, 군부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 등을 주된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6월항쟁은 87년 6월 10일의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 쏠한뺨국변돼회’를 기점으로 억눌렸던국민의 민주화열기를 분출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명동성당 농성투쟁 등을 거치면서 일충강화된 민중투쟁역량은 최루탄 추방대회를 통해 군부정권의 폭력적 진압의도를 무력화 시키고, 6월 26일 국민명화대행진을 정점으로 마침내 군부독재정권을 국민앞에 굴복시킴으로써 6·29선언을 끌어내고야 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6월항쟁은 그규모와 지속성에 있어서 일제하의 3·1운동과’60년의 4·19혁명과 같은 전국적 투쟁양상과 투쟁의 지속력을 보여준 민중의 대독재투쟁이었다. 이것은 민중들의 정치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는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6월항쟁에 참여했던 사회집단들을 계급,계층별로 보면, 노동자,농민등 기층민중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뿔 아니라 빈민,도시중간 제계충, 학생,재야민주인사 및 보수야당 세력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지배 집단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계충이 참여했음을 알수 있다. 이렇듯 대다수의 국민대중이 6월항쟁과정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은 군부정권의 민중탄압이 얼마나 극심했었나를 반증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민주협쟁의 대열에 동참할수 있는 민중의 범주가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소수의 지배계급과 대다수의 피지배민중간의 대립구조라고 하는 사회의 계급관계를 6월항쟁은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치열한 민중의 투쟁력을 담고 진행되었던 6월항쟁은 소위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열기가급속히 식어버리고 만다. 비록 6·29선언이란 군부독재정권의 영구집권음모를 폭력적으로 실행하려 했던 4·13조치가 국민의 투쟁앞에서 굴복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보수야당세력 및 중간 제계충을 민중의 틀로부터 분리시키면서 민중의 민주화투쟁력을 고립 ·약화시키려는 군부정권의 기만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노태우선언이라 일컬어지는 6·29수습대책 8개항을 자세히 살펴보면, 호헌을 철회하고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는 사항외에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 제도적 조치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야말로 ‘선언’이었을 뿔 항쟁의 주역인 민중에게 있어서 절실한 생존권의 보장 및 정치적 제권리의 확보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6·29선언에 담겨져 있던 지배집단의 거만적 의도는 그 이후의 사태 속에서 일정하게 효과를 거두면서 나타난다 즉, 6월항쟁을 통해 결집된 민중의 투쟁역량이 생존권투쟁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7·8월 노동자대투쟁과정에서 보수야당은 자재를 요구하는 동 사회주의적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항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일부 중간충들조차도 노동자계급의 투쟁역량확대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게된 것이다. 또한 87년 하반기 이후의 정치일정과정에서도 629선언의 기만적 성격은 드러난다. 직선제 개헌을 위한 여야의 정치협상은 민중의 정치적 입장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서로 자신들의 유리한 입지점만을 확보하기 위한 줄다리기였으며 그 결과는 적당한 타협으로 맺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6·29선언은 민중이 정치적 주체로 동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보수세력과 중간충을 제도권내로 흡수하려는 군부정권의 허구적 민주화조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건국이래 최대규모의 민중투쟁이었던 6월항쟁이 지배집단의 기만적 제스츄어로 인해 이처럽 쉽게 흐트러지고만 것은 항쟁 속으로 집결한 민중역량이 조직적으로 결집되지 못한 데에 기인하는 바 크다. 애초부터 6월항쟁은 비조직적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이었다. 민중 스스로 가두시위나 정치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조직적으로 결집되어 있지도 봇했으며 싸웅의 방향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도 못했었다. 이러한 자연발생적 민중역량이 항쟁의 과정에서 을바른 전망의 수립과 강고한 조직의 형성에 실패함으로써 직선제 수용이라는 정부의 허구적 선언앞에서 목표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 6월항쟁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민중역량을 결집시키고 이끌어 갈 조직의 부재가 결과적으로 민중역량의 약화 및 분산을 초래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6월항쟁의 과정을 반성하면서 외세 및 지배계급의 단단한 실체를 깨닫게 된다. 87년 초부터 슐츠가 국내에 들어와 분주히 여야의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율 목격하면서도, 그것이 군부정권의 영구집권 음모와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 것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우리는 직선제 개헌만으로 군부정권의 의도를 분쇄할 수 있다는 낙관적 무드에 젖어, 저들이 얼마나 탄탄하고 탄력적인 집단인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결국 저들이 교묘하게도 직선제를 수용한다고 선언하고 나섰을 때 국민은, 이후의 모든 일정을 야당에 위임한 채 각자의 일상 속으로 돌아갈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6월항쟁은 결코 실패한 것만은 아니며, 한계 속에서도 일정하게 성과를 쟁취해 낸 민중투쟁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6월항쟁은 민중 스스로 정치투쟁의 주체로 나선 대독재투쟁이었으며, 이를 통해 군부정권을 굴복시킴으로써 민중이 민주화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커다란 성과로 내세울 수 있다. 즉 그간 정부의 제도적 억압 속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민중이 6월항쟁을 통해 정치적 주체로 일어섰으며, 민주주의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6월항쟁은 변혁운동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세력들이 어떠한 집단들인가 하는 민중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어느 집단이 변혁운동의 중심이되며 또 어느 집단이 어떤 계기로 동요하는가를 6월항쟁과 그 이후의 민중투쟁과정 속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항쟁 직후의 노동자‘대투쟁에서부터 을해의 여의도 농민집회에 이르기까지의 기간동안 나타났던 무수한 민중의 생존권투쟁 및 정치적제권리획득 투쟁은 6월항쟁의 이러한 성과를 확인시켜 준다. 6월항쟁 이후 2년이 지난 오늘, 우리사회의 변혁운동은 민족·민중운동으로 자기위상을 정립해 가고 있다. 6월항쟁을 통해 우리사회에 있어서의 외세의 실체와 지배세력의 높은 벽을 깨닫는 한편 민중의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과 역량을 확인하면서 정립된 오늘의 민족·민주운동은 자주화와 민주화의 실현을 통해 저들의 높은 벽을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를 6월항쟁으로부터 이어받고 있다. 60년 4월과 80년 5월, 그리고 87년6월로 이어져 온 우리사회의 봄을 개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오늘의 민족·민주운동은 의무로서 계승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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