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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 | 특집 [특집]
소설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우한용(2004-01-27 12:11:55)


2. 이야기와 소설은 별종인가.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옛날이야기를 해주시고는, 늘 그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옛날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단다, 녀석아.”아직도 외할머니의 그런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진의를 따지기 이전에 그 말씀이 맞아떨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외할머니의 말씀을 곧이곧이대로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야기를 좋아해서 소설을 쓴다면서 돈하고는 거리가 먼 서생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옛날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인가. 소설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그 말은 예사로 넘겨버릴 것이 아닌 듯싶다. 공부는 않고 옛날 얘기나 듣고 있다기는 남에게 뒤떨어질 것이고 가난하게 살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식으로 옛날이야기와 공부를 대적적인 것으로 파악할 일도 아니다. 인간이 왜 이야기에 대한 근원적인 의욕을 갖는 것이며 이야기의 어떠한 속성이 그러한 의욕을 촉발하는 것인가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야기 줄거리와 그것을 윤색한 플롯이 별종인 양 구분하는 버릇이 널리 퍼져 있다. 스토리+인과성=플롯]이라는 공식이 그것이다. 이는 매우 편리한 구분이기도 하지만 a2〉〈b3=c3라는 수학 공식처럼 독자들의 머리에 틀어박히면 그 형식이 다양하기 짝이 없는 소설을 공식으로 이해하는 작폐를 가져오게 된다. 소설의 매력은 공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생사를 역시 공식이 아닌 방식으로 드러내는 데에 묘미가 있는 것인데, 소설을 공식으로 이해하려 하다니.
스토리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플롯이라는 통념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국의 작가이며 소설이론가인 E.M.포스터가 BBC인가 하는 방송에 나가 강연을 하는 가운데 한번 던진 말이 세계적인 유행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내용인즉 스토리와 플롯을 구분하는 데에 인과성의 유무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도 죽었다.’하는 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개된 것을 스토리라 하고, ‘왕이 죽었다.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왕비도 죽었다. 하는 것은 인과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플롯이라는 것이다. 플롯이라는 말은 사건을 교묘하게 꾸민다는 것인 데 불어의 intrigue [책략, 계책, 묘략] 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꾸며서 논리성을 부여한 것이 플롯이고 따라서 소설도 그렇다는 주장이 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는 약간의 억지가 숨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왕이 죽고 이어서 왕비가 죽었다할 경우, 아무리 머리가 돌처럼 굳어진 사람이라도 일말의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이어서’ 혹은 ‘그리고’하는 어휘가 가리키는 시간 폭이 얼마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시간이 얼마간이라도 일상적인 사건의 계기보다 짧은 것이라면 우리는 이유를 묻게 된다. 혹은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혼자 죽기 억울한 왕이 전의를 시켜 왕비에게 약을 먹인 것은 아닌가 대비마마의 수렴청정을 견디지 못하는 아들이 왕비를 죽인 것은 아닌가, 왕의 장례식에서 너무 울어 눈물이 말라 체내 염도가 정상을 유지하지 못해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코메디식의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왕비의 자살? 그럼 자살의 이유는? 등등 수많은 의문을 불러오는 것이 현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야기를 듣는다든지 이야기를 읽는 경우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진행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끊임없이 의문을 삽입하면서 이야기를 재구성하려는 의욕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독자[청자]의 편에서는 아무리 단순한 이야기를 제공해 주어도 그것을 듣는 과정에서 플롯을 만든다.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고려하는 한 이야기와 플롯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하나의 대상으로 설정할 경우에는 스토리와 플롯이 그렇게 구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관점을 달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용 기호론적인 발상이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내용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떤 “이야기”를 혼자 중얼거리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근원적으로 대화의 양상이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양상이다.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기로 하자. 이러이러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너는 그것을 듣고 머리속에 꽁꽁 묶어 두어라. 내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건방지게 끼어 들면 치도곤이를 맞을 줄 알아라.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지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 다른 뜻으로 듣진 말아라.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엄명을 한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토끼와 거북 이야기도 좋고, 소금장수 이야기도 좋다. 혹은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붙이고 온 이야기 뭐라도 좋은데,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이야기 하나를 되풀이해 보기로 하자. 때는 거금 천사백 여년 전, 신라 선덕여왕 원년인데 당숭 상훤대사가 이곳에 와서 용막을 치고 기거하며 수도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요동하는 어느날 밤, 큰 범 한 마리가 용집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에만 전심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안을 보니 인골이 목에 걸려 인였으므로 뽑아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이 분분하여 사방을 분간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를 물어다 놓고가 버렸다. 대사는 정성을 다하여, 기절한 처녀를 회생시키고 보니, 바로 경상도 상주읍에 사는 김화공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겨울이라 적설을 헤치고 나갈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의 잡요로 떼려고 가서 전후사를 말하고 스님은 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처녀는 대사의 불심에 감화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한 도덕과 온화하고 준수한 풍모에 연모의 정까지 골수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의 예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하지 않는가··김화공도 또한 호환에서 딸을 구원해 준상원스님이 생명의 은인이므로, 그 은덕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자꾸 만류하는 것이었다. 여랜 남과 발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어, 함께 계룡산으로 돌아와, 김화공의 정재로 청랑서를 새로 짓고, 암자를 따로 마련하여 명생토록 남매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정토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한 뒤에 사리탑을 세운 굿이 이 남매탑이요, 상주에도 또한 이와 똑같은 탑이 세워졌다
고 한다. 이상보씨의 수필 〈갑사로 가는 길〉에 소개되어 있는 남매탑의 전설이다. 전설도 이야기의 일종이니까 그대로 이용해도 좋을 것이다. 단지 이런 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이야기를 접어두는 경우는 우리들의 논의에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이야기에 열중하는 좌중이 있는 가운데 앞에 옮겨놓은 이야기가 이야기다는 상황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기호론적인 실천의 장에 들어간 이야기를 문제 삼아 보자는 것이다. 이야기판에 함께 하는 청중들 혹은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소리 말고 그대로 듣기만 하라는 엄명을 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그러한 엄명이 더욱 의문을 짙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가 어디에 기록한 이야기냐 하는 것이 의문이다. 또 왜 그런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는가, 그 이야기의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당연히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 내용은 여러분이 원하는 바대로니까 달리 되풀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사람의 반응이 이야기의 의미를 좌우한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문제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야 말로 중요한 점이다.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앞에 따온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만일 사촌과 사랑을 불태우다가. 결혼을 생각하는데 사회적인 타부가 그것을 용납지 않아 결혼을 못하게 되어 자살을 기도하는 어떤 남녀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또 인신매매를 직업( ?)으로 하논 누가 듣는다면, 멍청한 중 같으니라구 그걸 데려다가 색주가에 넘기면 몇백냥은 착실히 받을 것인데 하며 아쉬워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야기하는 빽의 의도와 듣는 이의 의미해석이 이야기마당에는 반드시 끼어 들게 마련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혹은 읽은 이가 뒷날 계룡산에 등산을 갔다가 남매탑 앞에서 애인과 동산을 온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남매탑 앞에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사진을 찍어주면서 남매탑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탑은 공방살이 낀 탑이라구, 남매간에 결혼이 되겠어? 이호랑이가 물어갈 친구야 어쩌구 하면서 또 이야기를 창조할 것이다. 그러면 당장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무어냐고 대들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는 나도 들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발뺌을 할 것이다.
이야기판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끼어 드는 걸로 말하자면 실로 가관이라 해야 한다. 선덕여왕 때였는데 용지귀라는 미관말직의 사내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그 여왕 말이지 당숭상원대사가 신라때는 당나라와 교역뿐만 아니라 승려도 서로 오간 모양이지 큰 범 한마리가-얼마나 큰 호랑이였울까? 그건 네 상상에 맡기고, 인골을 뽑아주자-발광을 하다 죽게내버려 두지 그걸 왜 빼줘-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인사도 않고?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뭘 그렇게 오래 기다려, 나 같으면 쟁깃날을 세워 고랑을 깊이 파고 갈아엎었겠다. 거 정말 이야기 못하겠네. 주둥아리 열중 쉬어하고 있지 못하겠냐? 왜 내 입은 어디 가죽이 모자라 찢어놓은 줄 아냐? 입이 있으면 말을 하라는 거잖아 잘해봐라. 네가 다 해먹으라구. 화내지 말고, 그래 그 다음은 어떻게 됐다는 거야? 자식 얘기는 듣고 싶은 모양이지? 대충 이런 식으로 듣는 사람의 끼어 옮을 용납하면서, 아니 거기서 신명을 얻어 가지고 이야기는 열기를 더해 가는 것이다. 고수가 얼씨구! 하며 추임새를 넣어 주어야, 청중들이 좋다! 무릎을 쳐야 창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이야기가 이루어지자면 이야기 내용과 함께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 듣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듣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스토리는 자연스럽게 타당한 논리성을 획득하고 하나의 복잡한 플롯을 이루게 된다. 단지 스토리로 남아있는 이야기는 죽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마당에서는 플롯과 스토리가 달리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듣는 사람 편에서 그냥 있지를 못한다. and then과 because, why 동의 간탄사를 끊임없이 던져넣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기호론적인 과정이라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이야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이야기의 구조가 변화를 겪기도 한다. 우리할머니 얘기는 그렇지 않더라 하며 이의를 제기해 오면, 글쩨 나도 들은 이야기라서, 혹은 읽은 지가 오래라서 하는 변명과 함께 네 이야기가 맞는다고 하고 그래서 말이다…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구조의 변화를 용인해 준다. 또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생판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앞에 인용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변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의남매를 맺은 남녀가 스스로 달아오르는 사랑의 정열을 제어하지 못한 나머지 어느 날 계율을 범하게 된다. 뇌성벽력이 천지를 요동하다가 벼락이 치는 바람에 두 남녀는 돌이 돼 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탑을 세운 것이 그 사연도 애달픈 남매탑이라는 것이다, 하는 직의 전개도 가능하다. 혹은 경상도 상주로 돌려보낸 이국처녀를 끝내 잊지 못하는 당숭이 눈보라가 치는 밤, 밖에 나와 상주땅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마침내 얼어죽는다. 그 자리에 사람들이 탑을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남아 있어 전설을 이야기한다 하는 식도 있을 수 있다. 이야기는 그렇게 자생력을 가지고 변형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소설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소재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과 그것을 읽는 과정이 유사한 기호론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쓴 단편 중에 〈눈뜨는 아침햇살〉은 계룡산 삼불봉에서 소재를 얻은 것이다. 결혼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은사 구인환교수를 모시고 게룡산에간 적이 있었다. 삼불봉은 남매탑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고개 길목에서 왼편으로 꺾어 돌아가는 데에 있는 암벽 봉우리이다. 그 밑으로 생이 있고 작은집 한 채가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 내노라하는 무당들이 모여들어 자신들의 신통력을 자랑하는 기도터였다. 삼불봉 절벽 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집 마당에는 모서리가 거칠게 째진 돌거북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절벽에 돌출한 바위덩이가 떨어진 것을 다듬은 것이라고 했다. 그 바위덩이가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그 집 딸이 압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들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그야말로 포스터가 말하는 스토리의 전형이다. 절벽 위의 바위덩이가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그 집 딸이 바위에 치어 죽었다. 주인은 바위를 다듬어 돌거북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거기 돈을 바치고 소원을 빈다. 이러한 서사단위로 잘라질 수 있는 이야기는 서사단위 자체에 그리고 사단위들 사이에 많은 의문이 도사리고 있다. 절벽에 붙어 있던 바위덩이가 굴러 떨어 졌다는 것은 크게 이유를 달 필요는없을 것이다.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굴러 떨어진 것일 수 있으니까 그러하다. 사람이 치어죽게 집을 지은 이유는 문제가 된다. 죽지 않은 어른들은 그 시간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주인은 왜 바위덩이를 다듬어 돌거북을 만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딸의 죽음과 무슨 관계이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그 바위덩이로 만든 돌거북에 돈을 바치고 소원을 비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런 행위는 과연 영험이 있는 것인가 영험이었다면 그것을 수용하는 태도는 올바른 것인가 그런 질문은 끝도 없이 진행될 수 있다.
아무튼 그러한 의문을 포함하여 혹은 해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이야기의 세부적인 부분을 보충하기 이전에 관심이 간 것은 잘 차려입은 여자들, 돈 꽤나 있어서 자가용을 굴리고 다니는 서울 여자들이 계룡산까지 차를 몰고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허영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적이지 못한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한 사회구조 가운데 개인의 의지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사회의 그런 구조에 기대어 보충된 것이다. 그 과정은 나 스스로 이야기를 걸고 거기 대답을 하는 식으로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플롯화 가능성을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실천해 본 것이다. 이처럼 플롯의 가능성은 이미 내재된 것이라면 이야기와 플롯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야기를 플롯과 대비하면서·자연시간의 흐름을 따라 서술한 소설을 시덥지 않게 보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분명 소설을 공식에 따라 바라보는 못된 버릇의 한 국면이다. 자연시간의 순서에 따라 소재를 배열하는 것 자체가 플롯의 개념일 수 있다. 현대과학을 운운하는 가운데도 운명론적인 사고가 팽배해 있는 현실에 숨어 있는 사고와 감성의 단순성을 그런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라면 스토리와 플롯은 일치하게 마련이다. 스토리와 플롯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 민담과 소설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작가의 의식이 그러한 구조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라면 이는 기법의 미숙이 아니라 기법과 의미의 통합이라고 보아야 옳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 혹은 부정하는 현대인의 심리 일단을 드러낼 수 있는 구조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뜨는 아침 햇살〉은 그렇게 만들어진 소설이다. 무속적인 세계,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덩이에 절을 하면서,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이중성의 단면을 그려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변형된 이니시에이션스토리가 되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소설도 이야기의 한 양식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 소설을 읽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이들은 가난할 팔자란 말인가 우리외할머니의 말씀처럼 이야기를 즐기는 것이니까. 말씀이 그러했듯이, 이야기는 태초부터 있었다. 태초에 있었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플롯으로 꾸였다고 하는 소설은 별종의 것은 아니다. 다만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구전성을 문자화한 것일 뿔이다. 기호론적인 구조를 보다 완벽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은 소설보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말의 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행위, 아니 이야기라는 살아있는 장치 속에서 남을 만난다 남을 만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남은 단지 내가 이해하고 명령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아니라 나를 규정해 주고 나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확대된 자아의 양상이다. 바흐씬의 지적대로 “인간의 존재 자체는 깊은 의사소통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의사소통함을 의미한다.” 남은 내 존재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남을 받아들이고 내 존재의 근거로 삼는 양식에 스토리를 개입시킨 것이 소설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그것이 스토리건 플롯이건 우리들 삶의 한 발언형식어다. 그러한 묘미를 너무 일찍 깨닫는 것은 현실적인 보복을 당하게 된다는 염려를 일찍이 하셨던 외할머니였는지도 모른다. 대화가 없는 현실에서 대화를 요구하고 나오는 것은 혁명적인 속성을 띤다.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대화는 이루어져야 한다.“삶은 그 본질상 대화적이다. 산다는 것은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질문을 던지고 듣고 대답하고 동의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도 그러한 삶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스토리와 플롯을 갈라 이야기를 장애하는 것 자체가 이야기의 속성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에 참여하는 대화정신의 실천이다. 그러한 속에 소설도 살아 있는 대화의 한 양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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