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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1 | 특집 [특집]
1980년대 음악계를 돌아보며
심인택(2004-01-27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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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나라는 정치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다. 더불어 음악 역시 시대에 따라 방황하듯이 마치 우리 나라는 세계 각 나라 음악의 시험장이 되다시피 했으며 음악의 사대주의적 상황에 대한 아무런 의미나 반성조차도 못했다. 정치경제가 외래 지향적인만큼 음악도 외래 지향적으로 성장 발전( ? )해왔으며 오직 미국 또는 구라파 지역음악이 한국 음악을 대변한 듯한 모습에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 하지 못하였다.
1980년대 초 광주민주화운동과 제5공화국의 시작은 어떤 면에서 음악에 대한 반성과 실천의 작업이 이루어진 계기가 되었다. 무릇 음악이 갖는 사회성은 그동안 무시되어 왔지만 70년대 부터 싹터왔던 음악의 현장성 ·사회성이 부각되고 생활과 밀접한 포는 의식과 밀접한 음악이 사회 각 계충 ·집단 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일이지만 음악사에서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그동안 안일무사와 외래 음악에 대하여 무조건 순종하던 음악인들에 대한 경종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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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초·중 ·고에서는 사회적 현실이나 역사적 과정을 무시한 채음악(양악)교육을 시켜왔다. 그 이유는 음악교사를 양성하는 대학이 그렇게 교육을 시키기 때문이지만 문제는그렇게 배운 음악이 대학 사회에서는 전혀 쓸모 없는 음악이 되고 만다는데 있다. 물론 초 ·중.·고통학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시위 앞에는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은 악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데모가 또는 운동권 노래이다. 악기로는 대개가 타악기 중심인데 팽가리 ·징 ·북 ·장고 등이 나오고 그들이 치는 장단은 농악장단에서 많이 갖다쓰게 된다. 노래역시 작사자가 있는 노래도 있지만 작사 ·작곡자가 확인되지 않는 노래가 더욱 많다. 그런데 그들의 음악은 학교수업 중에 가르치지도 않았는데도 노래를 잘 부르고 처음 배우는 사람도 몇번만 쫓아 다니면 쉽게 익힌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첫째로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리듬 또는 장단이 젊은 세대에 쉽게 적웅 된다는 점, 둘째로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선율이 언어 전달을 명쾌하게 하고 있다는 점, 세째로는 행진음악과 앉아서 부르는 음악이 구분되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 불러도 적합하게 짜여졌다는 점, 네째로는 선동적인 노래이지만 그들의 정서를 담고 있다는 점, 다섯째로는 그들이사용하는 악기가 팽가리 ·정 ·장고 ·북인데 그동안 농악에 쓰여지던 가락이 대학 사회에 여과 과정없이 쉽게 접목 되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두가지로 나누어서 하나는 이런 현장성이 강한 음악은 국민학교 때 부터 정리된 상태에서 바르게 가르쳐 을바르게 쓰도록 해야 하는 점이고 또 한가지는 이런 시끄러운 악기나 음악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었다는 점이다. 흔히들 음악 교육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는데 학교교육이 우리의 정서를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정서를 가르키다 보니 이런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학에서의 운동권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는 않아도 80년대 음악(국악양악)계에 무거운 짐이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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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음악이라고 해야 운동권음악에 숙달되고 그들이 직장을 갖게되면 자연히 음악도 역시 그 취향으로 흐르게 됨은 당연하다. 우리 나라가 산업화 되기 전에는 크게 선비들의 음악과 서민(농부)들의 음악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풍류계통의 음악과 민요·농요 퉁 소박한 그들의 생활 속에서 나온 음악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산업현장 중심의 노래가 나타나는데 신민요 중 철도와 신작로와 관계 있는 노래, 탄광 등 직업 현장과 밀접한 노래가 있어 왔지만 해방후 경제개발과 더불어 산업현장 노래를 음악전공자들이 빨리 정리를 해야하는데 음악가들은 모두다 외래음악을 공부하느라 산업현장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래서 산업 현장에 쉽게 접근 된 음악이 가요 또는 유행가라는 음악이었다. 이렇게 되니 음악을 한다는 사람은 가요 계통의 노래를 무시하면서 점점 현장성 노래는 비 전공자들에 의하여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점은 음악을 전공한다고 하는사람들의 반성과 자각이 있어야 할.부
분이다. 대학가에서의 운동권 노래는 곧바로 산업현장으로 파급되어 각 산업별로 그들의 생활 정서에 맞는 노래를 찾게되었다. 그 노래가 설사 데모에 앞서서 부르게 됨을 탓하기 보다는 진측에 그들을 위한 노래가 없었음을 탓해야 하겠다. 이 점 역시 80년대에 몇몇 뜻있는 전문 작곡가 또는 연주자에 의해 연구, 연주가 되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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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가요계의 큰 호황이었다. 그 이유는 대학이나 산업현장에 맞는 음악이 없었기 때문에 가요가 일반사회의 주된 음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80년대에는 조용한 바람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은 그동안 왜색가요다 또는 표절음악이다는 등 구차스런 비판도 있었지만 사회운동이 민족 자주성과 민주화의 영향으로 가요에서도 서서히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몇몇 작곡가와 가수에 의해서 대학가의 노래 산업현장의 노래 등이 구체화되고 또한 같은 노래라 하더라도 우리스런 노래를 찾는 등 운동이 나타나게 된다. 아직은 시도에 불과 하지만 가요에 대금 ·피리 ·가야금 ·타악기 등 국악기가 참여하게 되면서 일반 사회인들의 호용을 얻게 된다. 그 이유야 어떻든 그동안 양악기에 몸이 밴 사람들에게 포근한 우리악기의 등장은 어떤면에서 그들의 생활에 안정감을 주게 되는 큰 잇점과 민족정서 함양이라는 시대 상황과 같은 맥락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80년대 후반에 들어서“국악가요”라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되고 많은 호용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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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들어 사회 전반에 대한 변화가 일어 나면서 음악에 대한 논의가 짚어지게 된다. 톡히 작곡분야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동안 양악은 이론 ·작곡보다는 실기 위주의 교육을 며왔고 국악은 반대로 실기보다는 이론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그 이유는 양악은 너무 광범위한 음악이론을 어디서 부터 걸어야 하는지가 명확하지가 못했었고 대부분의 대학교수가 실기중심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국악은 대학교수가 이론 중심으로 있었기 때문에 실기가위축 된 면도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서 사회가 요구하는 음악이 다양해졌고 그래서 시험작에 불과하던 구라파적 현대음악이 실용음악으로 바꾸기 위해 한국적음악이라는 형태의 작곡 작업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국악계에서도 실용음악으로 많이 바해게 되니 연극음악·TV드라마 음악 ·영화음악 ·창작가곡 ·전래동요·무용음악·국악가요 등 음악에 관계되는 부분에 대거 참여하게 된다. 양약에서는 현대음악과 한국적음악(소재 ·음색중심)으로 국악에서는 전통음악과 현재적 상황을 접목시켜 우리 민족음악을 정립시키려는 노력이 뒤늦게 사회 변화에 적용하고 었다. 국악계에서야 어쨌든 우리 음악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여러 분야에서 각기 제 나름대로의 활동을 이론·작곡·연주 등이 펼치고 있으나 인적자원이 부족하고 양악계에서는 몇몇 의식있는 작곡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나 워낙외래 음악에 몸이 배여 있고 의식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한국음악 정립에 큰 문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80년대의 사회 문화의 변화는 이러한 문제를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서양음악적 상황을 벗어나려는 의식 자체가 중요한 의미이며 이들이 예술성이라는 미명아래 서양음악에 안주하려는데서 시작된 한국음악계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이제는 사회 각 계충을 위한 우리스런 음악에 참여 하고자 한다는 의식의 변화는 해방 이후 음악의 자주성 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80년대 경제개발과 더불어 찾아지는음악운동의 성패는 바로 자주성이 강조될 수 있는 한국음악의 방향 설정에 얼마나 많은 실천적 작품이 제시 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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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는 대체로 한국음악의 정립을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은 음악인 스스로 찾아졌다기 보다는 외래음악이 요구하는 각국의 음악에 대한 독자성과 일반 대중이 점차적으로 요구한 그들 계통에 맞는 음악 퉁이다. 그래서 음악용어도 몇가지 더 나타나게 되었는데 문화운동의 한 부류로 운동권 음악이 대학과 산업현장에 깊숙히 접목 되었고 양악에서도 작곡과 이론 부분은 현실과 현장에 크게 접근 하였으며 국악에서는 창작 국악이 한국음악으로 확대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음악이란 용어는 국악계나 양악계에서 모두 추구하는 바이지만 국악 계에서는 창작과 연주가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 한 예로 종교음악(가톨릭 ·신교)을 한국음악으록 어린이음악을 전래동요와 창작동요, 전통가곡을 바탕으로 한 창작가곡, 민요 동 생활정서에 맞는 국악가요와 그밖의 산업현장 음악 등 다양한 모습이 싹트며 이에 양악계에서도 작곡가의 참여가 한국음악이라는 대 명제를 걸고 접근하고 있다. 80년대는 사회 전체의 문화가 제자리를 찾고자 한 시발점이다. 이러한 여건을 조성하기 까지 사회전체 또 음악계에서도 많은 진통을 겪지 않은 수 없었다. 이제 우리 민족음악이 우리를 위한 음악으로 성장함을 지켜보며 격려를 해야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한다. 우리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이 없고 자신있는 우리 음악이 세계 어느곳에 내놓아도 한국음악임에 자부심을 갖는 우리음악을 위하여 그동안 뿌린 씨앗이 90년대에는 알찬 열매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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