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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8 | 특집 [84회백제기행]
<제84회 백제기행>사막의 모래바람이 꽃 피운 기적의 땅을 찾아 (중국 서안.돈황)
이혜경 교사·전주 기전여중(2005-01-25 16:01:56)

그렇다. 백제기행은 이미 나는 물론 우리가족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두 달에 한번은 백제기행을 통해 가족 나들이를 한 셈이다. 이로써 가족의 유대감이 깊어진 반면 별 준비 없이 훌쩍 떠나는데 길들여져 아쉬운 면도 없지 않다. 비단길로 여행을 떠나면서도 일에 쫓기다보니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황홀한 기대감과 설렘을 맛볼 여유가 없었다. 아! 조법종 선생님의 지적 채찍질(?)은 여전하셨다. 인천공항에 가는 버스 안에서 실크로드에 관한 두 편의 비디오를 시청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또 한 분 길잡이 이재중 선생님의 열정 앞에선 그저 옷깃을 여밀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두 분의 친절한 안내로 분에 넘치게 지식의 광야에서 헤매다 돌아왔다.
비행은 시공을 초월하게 하는 매개체다. 역사의 파노라마다. 고구려 집안기행 이후 2년 만에 또 다른 천년을 뛰어넘을 수 있다니! 2시간 반 만에 하이얀 구름아래 바둑판을 연상케 하는 옥수수 밭을 가로질러 서안, 아니 장안에 도착했다.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은 귀답사, 발답사, 눈답사로 보고 들으며 즐길 것이 많단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의 무왕 이후 한, 당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에 걸쳐 수도로 번창했던 역사적인 도시이니 말이다. 구시가는 당의 장안성을 중심으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안에는 빌딩이나 높은 건물 신축이 금지되어 있고, 대신 성밖은 개발이 한창이라 족히 20층은 됨직한 높다란 건물들이 쭉쭉 뻗어있다. 중국이 야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부개발사업의 중추가 바로 서안이다.
여정은 대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안탑은 17년의 여행 끝에 인도에서 불경 657부, 사리 150개, 불상 8기를 가지고 돌아온 현장법사가 불경을 보존하고자 세운 전탑이다. 역시 중국다운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나 경내는 전체적으로 회색 대리석이 사용되어 칙칙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청 또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어 주로 탁한 청색계통이 주를 이루고 간혹 노란색이 사용되었다. 1400년 전,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여 17년 천축 여행을 했던 현장법사의 내면에는 어떤 신심이 있었던 것일까?
생리반점이라는 곳에서 맛과 색, 속과 모양, 크기까지 다양한 18가지의 만두로 저녁을 마쳤다. 새끼손톱의 절반도 안 되는 만두도 있어 일행의 감탄을 자아냈다. 성문의 개폐를 알리는 종루와 고루를 지나 사절단 전용문이었다는 북대문 성곽을 돌아갔다. 호텔에 여장을 푼 뒤 슬라이드 화면을 보면서 이재중 선생님의 서안과 돈황 입문 강의를 들었다. 밤이 깊었다. 온 정신을 집중하는 분, 졸면서도 중요한 대목은 놓치지 않는 분, 달려드는 졸음 앞에 적당히 포기하신 분 등등 수강 태도가 다양하다.
둘째 날 새벽 4시에 모닝콜이 울린다. 역시 백제기행답다. 낡은 비행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창밖에 황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하늘아래 눈 덮인 산들이 그나마 위안이다. 드디어 돈황이다.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공항은 돈황 특유의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공항 건물 밖 공터의 트랙터 위에 찾을 짐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진풍경도 오래지 않아 사라지겠다. 8월 17일부터 새로 지은 공항이 문을 연다고 한다. 돈황 시내에 들어서자 시의 상징이라는 반탄비파상이 보인다. 비천무가 절로 마음속에 그려진다.
돈황시박물관은 2층으로 된 낡고 허름한 건물이다. 그렇지만 돈황이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시절의 유물들이 주를 이루니 알알이 영근 석류 속 같다고나 할까. 2층에는 돈황 주변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부터 수·당조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막고굴 장경동에서 출토된 돈황유서가 가장 진귀하단다. 앎의 깊이가 얕은 나로서는 오히려 아래층에 전시된 각양각색의 옥 병풍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 화려함을 넘어선 현란함이라니!
드디어 막고굴이다. 태고 그 자체다. 보존을 위해 최근에 덧바른 시멘트벽만 아니라면 말이다. 돈황에서 남동쪽으로 25km 지점에 위치한 막고굴은 웅장한 규모로 나를 압박해왔다. 암석산인 삼위산과 모래산인 명사산 사이 동쪽을 향한 낭떠러지 경사면에 1000여 개의 석불이 조각되어 있다. 해서 천불동이라고도 불린다. 이어 16국,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5대, 송, 서하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수백 개의 굴이 조성되고 불상이 모셔진 것이다. 인적도 드문 황량한 곳에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기원하고 간구했을까. 고달픈 삶의 여정 위에서 극락을 엿보고 싶었던 것일까. 제국의 통일을 꿈꾸는 제왕들의 위세과시를 위한 염원이 서린 것일까. 더러 서역으로 길 떠난 자식이나 지아비의 안전을 기원하기도 했으리라.
석실보장이라 쓰인 커다란 아치문을 지나면 중앙의 9층루를 중심으로 죽 늘어선 막고굴이 기다린다. 이재중 선생님의 신들린 설명은 계속되었다. 중국당국의 무신경은 대단하다. 굴속은 그저 깜깜하다. 아무런 장치가 없다. 문물이 하도 많아 세심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단 말인가 싶어 야속하기 이를 데 없다. 손전등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두 눈은 이재중 선생님의 손전등을 정신없이 따라간다. 도대체 몇 번을 보았기에 어둠 속에서 중요한 요소들을 꼬집어 설명해 주시는 것인지 감탄도 부족하다.
뼈대를 만들어 점토로 살을 붙여 만든 소조불상들을 중심에 모시고 부처와 보살, 시비왕 본생도나 5백강도 성불고사 등 불교 설화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벽화들이 사방을 감싸고 있다. 북위시대의 이국적 느낌에 이어 수, 당조에 이르면 부조불상도 점차 벽에서 떨어져 나오고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안으로 모셔들이게 된다. 탑돌이를 하듯 중앙에 모셔둔 불상도 있다. 인도인의 모습을 한 초기의 보살들도 서위시대에 이르면 중국인의 모습으로 바뀐다하니 외래문화를 중국화하는 특성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점차 화려함과 세밀함이 밀도를 더하여 불상과 보살 등의 옷깃 주름과 매듭, 살짝 구부린 손가락의 움직임 등에서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저녁 식사 후 돈황의 서쪽에 위치한 명사산을 향했다. 동서로 40km, 남북으로 20km에 이르니 산이라기보다는 앙증맞은 모래산맥이라 해도 되겠다. 석양 무렵의 명사산은 칼날처럼 처연하고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풍경은 환상처럼 몽롱하다. 몇 년 전에 명사산을 찾았다는 한 친구는 엄청난 모래바람에 정신이 없었다고 하던데 그날 명사산은 실바람 한 점 없이 잠잠하였다. 낙타의 배설물이 후각을 괴롭히고 낙타몰이꾼들의 호객소리가 어지러웠지만 막상 낙타 등에 오르니 사람살이에 대한 연민이 대신 밀려온다. 가다보니 두려움도 사라지고 점차 여유가 생기며 실크로드를 오갔던 대상들의 고독한 싸움이 떠오른다.
자연의 신비한 선물이 바로 월아천이다. 초승달 모양의 예쁜 오아시스는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모래가 넘나들거나 샘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풀밭이며 꽃이 귀한 줄을 여기 와서 알았다. 월아천을 노래한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간에 쫓겨 아쉬움을 떨치고 서둘러야 했다. 곧바로 어둠이 깔린다. 주변이 고요하면 울부짖는 모래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터인데 관광객이 넘쳐 시장보다 더 소란하다. 돌아오는 낙타 등에서 별자리를 그려보았다. 어둠 속에 들려오는 낙타방울 소리가 왜 어린 시절 시골외가를 생각나게 했는지 모르겠다.
셋째 날, 실크로드의 두 관문 옥문관과 양관을 향해 출발했다. 애티가 가시지 않은 풋풋한 인상의 안내원은 말끝마다 "인 것입니다"를 연발하여 일행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다. 모래와 자갈이 섞인 것이 고비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모래사막이 아니라 거친 모래와 자갈이 섞인 사막이기에 고비사막이라 이름을 붙였을 터인데 이제껏 단순한 지명으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 사전을 찾아보니 고비란 "풀이 잘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라는 몽고말이다. 물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면 풀이 자라니 생명보다 강한 것이 없다.
푸르른 하늘 아래 천산산맥의 만년설과 암석산, 모래산 등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펼쳐져 있다. 그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을 막아 당하저수지를 건설했고 그로 인해 월하천의 수위가 유지된다니 하늘이 준 은혜가 아니랴. 저 멀리 부처가 누워있는 형상을 한 산이 있으니 일컬어 와불산이다.
기원전 1세기 초 한무제는 돈황을 서역진출의 전군기지로 삼고 서북변경지대에 옥문관과 양관을 설치한다. 뿐만 아니라 흉노를 몰아내고 주천, 장액, 돈황, 무위의 하서4군을 설치했다. 그가 장건을 앞세워 개척한 교역로는 장안을 출발하여 돈황을 기점으로 하미, 투르판, 쿠차, 카슈가르, 사마르칸드에 이르는 서역북도와 미란, 야르칸트, 아프칸으로 이어지는 서역남도를 거쳐 멀리 이스탄불과 알렉산드리아에까지 이르렀단다.
옥문관은 돈황에서 북서로 100여km 떨어져 있다. 매표소를 지나 먼저 최변방 하창성으로 갔다. 이제는 쇠락한 모습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세월 앞에 무상함만이 남는다. 이러한 변방이기에 둔전제를 실시하여 주둔군이 변방을 지키는 한편 스스로 땅을 경작하고 목축해서 생활하게 한 것이리라. 세상에! 하창성 뒤쪽으로 초지가 펼쳐졌고 양떼와 양치기 아주머니가 보였다. 낙타가 수분을 보충하고자 피를 흘려가며 먹는다하여 낙타초라고도 한다는 경단초가 듬성듬성하다. 버스를 돌려 나오다가 한장성에 들렀다. 성벽은 진흙에 갈대를 섞어 판축한 것이라 한다. 그리 높아 보이지 않은 토성이지만 이는 말이 넘지 못할 높이라고 한다.
옥문관과 함께 돈황의 관문을 이루는 양관으로 향했다. 돈황에서 남쪽으로 70km 지점이다. 쭉쭉 뻗은 백양나무와 주렁주렁 매달린 청포도 밭이 가까워서 양관은 그나마 사람이 살만한 곳처럼 보였다. 관광객을 위해 최근에 지었다는 회랑에 서서 둘러보니 황량한 풍경 속에 5, 6m 높이의 봉화대만 을씨년스럽다. 5리마다 소돈을, 10리마다 대돈을 설치하여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2000km 밖 돈황까지 신호를 전했다고 한다. 성곽은 사라지고 저 멀리 만년설과 짙푸른 초지만 옛 모습 그대로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인공은 사라지고 자연만 남는 건가. 참으로 조그맣고 초라한 전시관이 있었다. 아마도 큰 바람이 지나간 뒤 발견된 것들을 진열해 놓은 것이리라.
근처 농원에서의 정겹고 맛깔스러운 점심식사 후 40여 분을 달려 막고굴보다 조성시기가 앞선다는 서천불동에 들렀다. 훼손상태가 더 심해 보인다. 반쯤 부서진 보살상의 소매는 갈대로 뼈대를 삼아 진흙을 붙인 모양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막고굴과 서천불동의 불상 조성 과정이 단번에 풀린다. 매끄럽게 마무리되고 채색된 불상들과는 다른 맛이 느껴졌다. 계곡 아래 탁류가 당당하게 넘실대며 흐르고 주변의 나무들이 한결 싱그러웠다. 이 물이 돈황을 키우고 먹인 것이다.
넷째 날, 우리는 서안에 돌아와 있었다. 녹록치 않은 여정이 계속되었다. 서안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4.5km를 가면 병마용갱을 만날 수 있다. 20세기 고고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일컬어지는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은 말 그대로 인류문명사의 다시없는 장관이다. 2300년 만에 세상에 알려진 병마용갱에는 약 8천개의 도용이 있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는 진시황의 권위를 드러낸다. 놀라운 것은 도용들이 각기 다른 표정과 자세를 취할 뿐 아니라 계급에 따라 복장은 물론 머리모양까지 달라 저마다의 개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실물크기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심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니 도공들의 탁월한 기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버스를 타고 화청지로 향하면서 진시황릉을 조망했다. 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뒤 도량형, 문자, 화폐를 정리하고 흉노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하고자 전국시대의 장성들을 동서로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와 함께 죄수 70만을 사역하여 진시황릉과 아방궁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숱한 백성이 피를 토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화청궁은 본래 역대 제왕들의 별궁으로 여산 산록에 있는 온천이다. 중앙에 연못이 있어 화청지라 불리기도 한다. 당 현종과 양귀비가 같이 심었다는 석류나무며, 같이 거닐었을 난간들, 여러 온천을 돌아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과연 나의 삶은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온천지를 돌아 푸른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유리문이 달린 건물이 있다. 중국역사를 바꾼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 유적지이다. 공산군 토벌을 목적으로 서안에 와 묵고 있던 장개석을 군벌 장학량이 감금하고 내전종식을 요구했던 장소라 한다. 그 당시의 총탄 자국과 깨어진 유리창이 그대로 있는 다섯칸 집이다. 국공합작이 아니었더라면 중화인민공화국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역사의 현장에 선 느낌이 새롭다.
신석기유적이 널려있는 반파촌은 서안 동쪽 6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반파는 농경과 도자기제조술을 습득하면서 정착한 신석기문화 중 기원전 5000년에서 3000년경까지 지속된 앙소문화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촌락지와 공동묘지의 유적지 위에 바로 건물을 지어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조성한 것이다. 촌락지의 움막 기둥이 세워졌던 구멍수가 많다는 점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주거형태와 달랐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지면보다 1m가량 낮은 곳에 유적지가 있다는 것이다. 성의 해자와 비슷했다. 어린아이들의 주검은 토관 속에 넣어 촌락지 내에 매장했나보다. 도자기를 구운 요지터도 있었다. 이런 유적을 통하여 선사이전의 생활상을 조명해 나가는 작업이 과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섬서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역시 신석기시대의 유물은 예술적 가치보다는 실생활에서 사용되던 실용품이 중심을 이룬다. 도끼, 긁는 도구, 낚싯바늘, 화살촉, 여러 종류의 도기들. 특히 발이 세 개 달린 정(鼎)이 무척 마음에 끌렸다.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도기의 문양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있었는데 벌써 기억이 희미하다. 간단한 기하학적 문양에서 점차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으로 바뀌어 가며 마치 기계로 제작된 듯 수려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두 마리 물고기의 옆얼굴이 하나를 이룬 문양 역시 인상적이었다.
진과 전국시대에는 드디어 청동기가 권력을 상징하며, 동경이 등장하고 사신문이 와당에 나타난다. 섬서역사박물관에는 금과 은, 도자기, 철기, 벽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문물이 전시되어 가히 문물박물관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당나라 장회태자묘에서 출토된 외빈도 혹은 신라사절도라는 벽화였다. 중국 궁정관리 세 명이 이민족 사절 세 명을 만나고 있는 그림인데 바로 정면에 있는 가운데 사신이 바로 신라의 사신이다. 새의 깃 두 개를 꽂은 모자를 쓰고 소매도포가 넓으며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다.
비림박물관! 본래는 공자의 문묘인데 당송 시대 이래의 석비를 보존한 곳이다. 송대의 여대충이 당의 개성석경(유교경전 13경)이 황폐해지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문묘의 뒤로 옮기고 현종황제의 효경비, 왕희지·안진경·구양순 등의 친필 석각, 소식·조맹부 등의 진적비를 그 주위에 세워 보존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다양한 서체와 품격 높은 필력을 한 자리에서 음미할 수 있는 참으로 귀하고도 소중한 자리이다.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나의 식견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탁본을 한답시고 비문 위에 온통 먹칠을 하는 것도 안타까웠다.
박물관을 돌다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원문거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길 양쪽으로 수없이 노점상이 늘어서 있다.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중국인지라 흥정은 천차만별이다. 옥제품, 도장, 오카리나, 구슬가방 등 다양한 물건이 많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당락궁에서의 당가무 관람이 마지막 여정이 되었다. 고전적이며 품격 높은 당가무, 비천무 등을 기대했던 나와 일행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나치게 현대화하고 관광용으로 연출한 점이 무척 아쉬웠다. 화려한 의상과 화장, 배경, 현란한 율동 등은 호사가들의 취향에나 맞을 듯 여겨졌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글쎄 백제기행단을 환송하려는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가 터진다. 바로 눈앞에서,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불꽃은 난생 처음인지라 색다른 느낌으로 와 닿았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다.
하나에 10위엔 하던 물건이 11개 10위엔도 되고, 380위엔 짜리가 50위엔에도 팔리는 나라. 대형버스가 중앙선을 넘어 곧바로 차선을 바꾸어도 알아서 비켜가는 나라. 새해 명절이 되면 먹을 것 잔뜩 쌓아놓고 한 달 정도는 그저 먹고 즐기는 데에 치중한다는 나라.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돈만 모으니 겉만 보고는 부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나라.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정부가 주5일 근무를 통해 소비를 격려하는 나라. 단 1위엔으로 한 끼 식사해결이 가능한가 하면 몇 백만 원을 웃도는 세계적 명품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부자가 있는 나라. 중국은 과연 어떤 나라일까?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단편적이었다. 그러나 현장의 모습은 분명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다. 중국의 힘은 과연 무엇일까? 아시아의 용, 아니 세계무대의 용으로 승천하고자하는 중국의 힘의 원천을 밝혀야 하리라. 공존은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하니 말이다.
백제기행에는 서로를 하나되게 하는 힘이 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영원한 젊은이로 살아가시는 분들,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한 젊은이들, 우리의 미래에 크고 단단한 열매들이 맺힐 것임을 보증하는 꿈나무들과의 다양한 만남이 있다. 이번 기행에서도 막내 윤승이부터 단장님까지 우리는 함께 배우고 같이 즐겼다. 나 역시 학교에 돌아가서 아이들과 그 기쁨과 감동을 나누며 즐겁고 활기차게 생활할 것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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