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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특집 [특별기획-전북의 땅과 문화, 사람들2 <익산>]
속치레의 단단함이 따르지 못한 아쉬움
익산의 문화
황경신 문화저널 기자(2003-07-03 15:23:53)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께 이리역에서 한국 화약 주식 회사의 다이나마이트를 싣고 있던 화물 열차가 폭발했다. 그 폭발로 역을 중심으로 한 사방 2킬로미터 안쪽의 집들이 폭삭 주저앉고 죽거나 다친 사람이 1천4백명, 이재민이 7천여명에 달했다.
시가지 곳곳에 허물어진 지붕과 벽돌 조각은 마치 전쟁 폐허의 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지금까지도 ‘이리역 폭파사건’은 익산시를 기억하게 하는 큰 사건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폭발사건으로 익산의 도시 발전은 적어도 삼십년 정도는 족히 앞당겨 놓았다.
원래 익산시는 익산군과 이리시로 행정구역을 달리하고 있었다.
1995년 정부에서 발표한 ‘경기도 평택시 등 5개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이리시와 익산군은 통합 됐고, 인구 33만 5천명을 지닌 익산시가 형성됐다.
지금의 익산시는 서해와 옥구, 금만 평야를 마치 어머니 품안으로 껴안고 있는 형상이다. 
익산은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해 노령산맥의 천호산과 미륵산의 동부에 산세를 이루고 있고 서북부에 솔함라산 줄기가 이어져 서부로 향하는 구릉과 대하천으로 비옥한 평원을 이룬다.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 논산군과 부여군에,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어 전북에서는 김제시 다음으로 쌀생산량이 높은 곳이다.
호남선이 남북으로 중앙을 관통하고 익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전라선과 군산선이 남북으로 통과하며, 호남 고속 도로는 동부를 지나 금마 진입로에 있고, 10여개의 국도와 지방도 등 전국 각지를 이을 수 있는 편리한 교통망이 갖춰져 있다.
전라선과 호남선, 장항선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유동인구가 유난히 많고 익산공단내에 있는 국내 최대 귀금속단지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익산시는 종교의 도시로도 불린다. 1924년부터 구 이리시에 자리잡기 시작한 원불교가 있다. 원불교 신도가 4만을 넘어서고 시내 곳곳에 교당이 있으며 원광 유치원, 원광 중학교, 원광 여자 중학교, 원광 고등학교, 원광 여자 고등학교, 원광 대학교 같은 원불교 재단에서 세운 교육 시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불교 방송인 원음방송국이 1998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익산시에서 개국했다.
원불교뿐 아니라 천주교의 김대건 신부가 처음 선교를 시작한 나바위 성당이 있고 기독교 방송인 CBS도 익산에서 먼저 개국을 했다. 

익산군과 이리시

통합전 익산군은 마한과 백제 문화의 자취가 뚜렷한 곳이었다. 
본디 마한 땅이던 이곳은 백제에 합쳐지면서 금마저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통일 신라 때에는 금마군으로 바뀌었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서 익산군이 되었는데 농경지가 비옥하고 교통이 편리한데다 문물이 번성하여 문화유적이 풍성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미륵사 터 석탑과 왕궁의 5층 석탑이 익산군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꼽힌다. 이것말고도 삼기면 연동리의 백제 때에 만들어진 석불좌상, 금마면 동고도리의 석불 입상 등 마한과 백제 문화의 흔적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이리시는 일제시대 일본군들이 일본의 식량조달을 목적으로 만든 이리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도시다.
옛부터 이리는 사방으로 길이 뚫린 ‘호남의 심장’으로 불렸다. 유동인구가 유난히 많은 곳으로 이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 도시의 특성으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토박이’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전주보다 먼저 공업단지가 들어서 산업화가 이뤄져 1980년대만 해도 1백2개가 넘는 업체에서 1만2천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섬유, 봉제 공업과 보석 가공업체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섬유업체가 하향길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공장이 문을 닫고 화학과 금속 업체 공장만이 남아있자 이와 같은 연유로 전북 노동운동의 뿌리가 이곳에서 시작됐거니와 익산노동자의 집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지금도 활발하다.

적어서 안타까운 문화활동

‘익산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민연대’에서 1998년에 실시한 ‘익산시민의 의식구조 및 요구분석’(7백명 대상)에 의하면 문화자긍심 의식조사에서 남자, 여자 모두 자긍심이 낮게 나타났다. 50대부터 20대까지 모두 50%를 넘지 못했고, 또한 문화부족에 대한 의식도 면에서도 90% 이상이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올해 익산시에서 책정한 문화예술예산은 96억으로 전체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1%. 각종 문화단체 보조금, 문화원 운영비, 공연예술경비, 세계아동공연예술축제 지원, 입점리 고분 전시관 건립, 금마 저수지 관광조성, 웅포 덕양정, 숭림사 주변 관광휴양지 조성, 문화재 정비 등이 그 내역이다. 지난해에 비해 69억원이 증액됐다. 
“우선은 마한 백제 문화권 개발을 가장 큰 축으로 문화예술예산이 짜여져 있다. 사실 현대 문화에 해당하는 공연이나 전시는 시민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지원금을 요청하는 문화단체 또한 1년에 서너군데에 불과하고 그 액수도 매우 적다”고 익산시청 문화관광과 유영기 과장은 말한다.
그러나 증가된 예산에도 불구하고 익산시의 겉으로 드러난 변화에 견주어서 문화의 실질적 성장 곧, 속치레의 단단함이 뒤따르지 못함을 익산시민들과 외부 사람들은 안타까워 한다.
이리가 근대에 형성된 도시로서 두드러진 역사없이 성장한 데에서 찾는다. 유적이라고는 동산동에 있는 단군의 초상을 모신 단군 성묘를 들 수 있을 정도인데 이도 근거가 충분치 않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다. 고유한 민속 놀이 같은 것도 전해 오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리가 익산의 조그마한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가 개화의 물결을 타고 철도와 함께 갑자기 성장한 도시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듯 유적이나 민속의 전통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체 문화활동도 퍽 소극적이어서 문화활동이 아쉬운 도시라는 인상이 짙다.
통합 이후에도 이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익산의 마한 백제문화의 풍성한 문화유산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이 보존과 개발에 박차를 가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훌륭한 문화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뭘 합니까?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시켜 보존하고 개발하는 일이 후대에 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익산 고적선양회 임홍락씨의 말이다.
현재 그 문화적 가치만큼이나 말이 끊이지 않는 마한 백제 문화권 개발은 한국 역사학회에서 용역을 의뢰해 보고서를 작성중에 있다. 알만한 익산시민들은 백제문화권 개발이나 명성에 있어 충남 부여에 밀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문화를 빼고는 이렇다할 문화예술단체를 찾기도 어렵거니와 솜리문화예술회관을 제외하고는 화랑이나 변변한 소극장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공연기획사들 사이에서 ‘익산 공연은 본전 찾기도 어렵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을까. 물론 익산의 문화가 척박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
우선은 엄청난 숫자의 유동인구 때문이다. 척박한 문화적 환경에서 생활해온 익산시민들은 이미 문화활동을 익산이 아닌 자동차로 30, 40분이면 닿는 전주나 대전에서 향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익산은 그 외양에 견주어 문화의 공급과 수요가 척박한 곳이다. ‘토박이’가 부족한 신생도시는 생산의 기지였을 뿐 향토애가 자리잡기 힘들었으며 이러한 도시 형성의 이유로 이제는 빛을 발할 법한 문화적 토양이 제대로 가꿔지지 못하고 있다. 전통문화가 풍부한 익산의 경우에도 진척이 부진한 보존과 개발사업으로 시민들의 발길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익산 소재의 대학이나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은 익산이라는 지역사회로의 환원보다는 전주나 서울로 그 무대를 옮기고 시민들 또한 공급이 이뤄지지 않는 이곳에서 더 이상의 수요를 발하지 않는 것이다. 교통의 요지라는 익산의 자랑이자 특성이 익산 문화인구를 외부로 유출시키는 어찌보면 역으로 그 특성을 발휘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반면 이러한 익산의 특성들이 더욱 다양한 문화를 끌어모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기도 한다. ‘토박이’문화가 없다보니 문화적 ‘텃새’ 또한 다른 지역보다 적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익산의 농경문화는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한 문화와 해안도시에서나 볼 법한 웅포의 용왕제나 성포 별신제 등이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굳은 토양이 없다보니 다른 문화의 유입도 다른 지역과 견주어 볼 때 더욱 그 틈새가 넓게 열려 있다. 이렇다 보니 문화적 토양의 단단함은 없을지언정 익산의 지리적 여건과 도시형성 과정의 특성, 유동이 많은 익산시민들의 ‘나그네성’이 만들어내는 닫히지 않은 문화의 다양성은 현재 익산시의 소극적인 문화활동의 새로운 활로로 기대해봄직 하다.
또한 통합이후에도 익산시의 문화 지원이나 활동은 여전히 익산군의 마한백제문화권에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예산의 증액보다도 문화산업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마인드 부족과 중장기적인 계획의 부재를 극복해 내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시민들과 외부인들 모두 익산 문화의 뿌리와 문화적 자긍심의 발로를 마한 백제 문화권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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