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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 | 특집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완주 2
관리자(2011-03-04 18:27:52)

지역문화 다시보기 - 완주 2 


소중한 문화유산 고을이 자랑스럽더라 - 조법종 우석대 사회교육과 교수 


전라북도 완주군은 전주와 궤를 같이 하는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다. 완주의 공간을 역사적으로살펴보면 완주의 행정공간은 통일신라가 전국을9주로 편성했던 685년이래로 9주 영역 가운데하나인‘광역공간 전주’의 핵심공간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완주군’의 탄생과정은이러한 완주와 전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전주와 역사·문화를 공유했던 완주 완주군의 출현은 일제의 조선식민지 정책 가운데 지방중심세력의 약화정책과 연결되어 나타난 행정구역 축소분할의 결과였다. 즉, 1935년 전주군의 행정중심인 전주읍을 전주부로 승격시키면서 전주군을 완주군으로 개칭하여 전주에 소속되었던 15개 면을 관할하면서 완주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름도 전주와의 혼동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과거 전주의 이름인 완산주에서 산을 빼어‘완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든 것이다. 이로써 1300여년동안 함께‘전주’로 묶여있던 공간은 갑자기 전주와 완주라는 두 공간으로 생이별을하게 됐다.이는 앞서 일제가 호남선 철도를 건설할 때 전주로 호남선을 놓지 않았던 이유와도 연결된다. 즉, 1910~14년 호남선건설시 일제는 전주지역민이 반대한다는 애매모호한 이유로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속마을’이리(裡(속리)里(마을리)에철도를 놓아 전주로 연결될 예정이었던 호남선의 노선을 바꾸었다. 이는 그 실상을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식민지화한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가 철도도시로 발전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완주는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공유했던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형성된 곳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완주의 행정구역적 성격을 보면 완주는 고산-봉동-삼례축의 공간과 이서축의 공간 그리고 모악산 밑의 구이공간 등으로 대별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전주를 둘러싼 도넛모양의형태로, 전주를 구심점으로 진행된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함께 진행된 공간들이다. 역참, 성곽, 고전소설 문화의 공간 따라서 완주는 과거 전주군으로 전주읍과 함께 유지되었던 역사와 문화를 나누어 갖고 있는 형세를 보여준다. 


예컨대 삼례로 대표되는 전통역참문화는 서울과 전주를 잇는 교통로를 관장하던 삼례찰방이 설치되었던 곳의 문화이다. 이삼례는 호남의 수부 전주로 진입하는 교통로로서 고려, 조선시대의 중요 사건이 연결되어 나타났다. 특히, 1892년 동학교도의 삼례집회와 1894년 10월 동락농민혁명 2차 봉기의거점이 삼례였던 것이다.이같이 완주의 핵심공간 중 한 곳인 삼례는 전통교통문화의 중심지이자 한국 역참문화의 대표적 공간 그리고 근대 민중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의 핵심공간이었던 곳이다. 


전봉준선생이 삼례를 2차 봉기의 거점으로 삼았던 이유는 교통의 요지로서 정보와 기반시설이 존재하며공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할 수 있는 실제 요충이었기 때문이다.또한 완주의 위봉산성은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태조어진이변란 시 피난하기 위해 마련된 독특한 성격의 산성이었다.이곳에는 어진이 머물 행궁과 관련 시설공간이 있던 곳으로군사적 목적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군사적, 전략적 성격이 전혀 다른 산성이었던 곳이다. 그리고 앵곡마을의‘콩쥐팥쥐’로 대표되는 고전소설문화 공간은전주 서문밖 30리에 위치하였던 공간을 설정한 곳으로 콩쥐팥쥐전의 전반부 무대로서 자리하며 후반부 무대는 전라감영의 내아가 중심공간으로 나타나듯이 전주와의 관계가 매우밀접함을 보여준다.


한편, 완주지역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지역과 연경되는 주요 교통로와 연결되어 백제산성 등 관방시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고산, 화산일대의 백제산성은그 형태와 규모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들산성은 그 원형의 보전성이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산으로 파악된다. 백제부터 이어온 다채로운 사찰문화 또한, 완주지역의 사찰문화는 각각의 역할과 성격이 다채롭게 나타나고 있다. 먼저 완주지역에 산재한 사찰은 대표적으로 송광사와 위봉사, 화암사, 안심사, 봉서사 등이 거론될수 있다. 이들 사찰은 대부분 이 지역이 백제 지역이었음에그 연원을 백제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으나 관련 사료의 내용을 보면 고려시대 이래의 역사가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현상은 백제이래의 관련 사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적인 제약에 기인한다.그러나 안심사와 고산 삼기리의 봉림사지에 존재하다 이제는 군산발산초등학교와 전북대 박물관에 나뉘어져 보관되고있는 석조유물들을 보면 이 지역의 사찰들은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매우 규모 있고 수준 높은 불교문화의 중심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안심사의 부도와 수호 석인상의 모습은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무인상의 경우 고려시대의 무장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매우 정교한조각과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차후 미술사적인 관점에서의깊이 있는 접근이 요청되는 유물이다.또한, 봉림사지에서 발견된 삼존석불상과 석등, 석탑도 완주군지역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가장 백미로 꼽을 수 있는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삼존석불의 경우 비록 머리 부분은 모두 망실되었지만 광배와 신체 각 부위의 조각기법이백제 삼존불상조영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고려시대의 단아한 분위기가 잘 나타나고 있어 더욱 그 가치와의미가 부각되고 있다. 봉림사지 석등은 국내에서 확인된 석등 가운데 유일하게 간주석부분에 조각이 있으며 특히 그 조각내용이 용문양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학술적으로 석등의 종교문화사적 의미를 확인하는 데 결정적 자료로활용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물이라고 사료된다.한편, 송광사의 경우 최근 삼존불상과 사천왕상등의 복장유물이 확인되면서 이 사찰이 조전 중기 인조 대에 병자호란의 결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후에 효종으로즉위한 봉림대군의 무사 귀환을 위한 기도처였음이 확인되었다. 더욱이 흥미로운 사실은 삼존불상을 모신 명패에 쓰인주상전하, 왕비전하, 세자저하란 표현이다. 이는 원래 각각대응되는 부처님의 명호를 쓰게 되어 있는 것인데 이곳 송광사에 있는 명패에는 바로 인조와 왕비 및 소현세자로 쓰여있어 세분의 부처가 바로 이들과 대응되게 하는 신앙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벽암스님과의 관련 속에서 그 예술사적 성격이 부각되며 기타 국내유일이 형태인 십자각등과 같은 훌륭한 유물이 산재한 매우중요한 사찰이다.위봉사는 조선왕조의 개국시조인 태조대왕의 영정을 모시는 기능을 수행한 독특한 산성사찰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조선 불교의 맥을 진작한 진묵대사의 부도와 영정이 모셔진 봉서사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곳이다이같이 완주의 사찰들은 백제 이래의 전통과 고려의 문화·예술적 특징 그리고 조선시대의 호국불교적 성격을 잘간직한 특성을 갖고 있어 우리 후손들에게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이같이 완주지역의 문화는 전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으며 역참문화, 성곽문화, 사찰문화, 고전소설문화 등 다채로운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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