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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 | 특집
[기획특집] 지역문화 다시보기 - 무주 2
관리자(2012-03-07 16:04:28)

나라지킨 의병, 그들의 정신을 기억하다


이관배 무주문화원 사무국장


전라북도 최동북단에 위치한 무주는 예로부터 서로 다른 부족국가 또는 다른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가 병합 또는 통폐합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구역을 이룬 고장이다. 삼한시대는 현재의 무주읍을 중심으로 있던 주계(朱溪)가 마한에 속해 있었고, 무풍면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산(茂山)은 변진에 속해 있었는데, 삼국시대에 와서도 주계는 백제, 무산은 신라에 속하여 각기 다른 국가로서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고려시대에 까지 국가는 하나였지만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계와 무산을 합치면서 무주현(茂朱縣)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조실록이 병화(兵火)에 소실되는 사건으로 인하여 무주 적상산에 사고(史庫)를 설치하게 되면서 무주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됐다. 270여 년 동안 무주, 금산, 용담, 진안, 장수, 운봉, 진산 등 7개 현을 이끌면서 위세(威勢)를 떨쳤던 고장으로써 무주의 자긍심과 정신문화는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무주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분연히 일어나 봉기한 선열들의 숭고한 호국의지가 담겨져 있는 충절의 고장이다.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조차 망해서는 안 된다


무주군은 삼남(三南)을 굽어보고 있는 덕유산(德裕山) 만큼이나 덕성과 부유한 생활 속에서 인심이 좋은 곳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또한 높고 험한 산이 많은 지역으로 덕유산과 적상산 등이 있어 국난이 있을 때마다 구국항쟁을 벌이던 의병들의 성지가 되었다. 험한 산악지형이 전체면적의 73%를 넘는 무주는 삼남의 요해처에 걸쳐 있는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기도 하였다. 북으로 청주, 서북으로 공주, 서쪽으로 전주, 남쪽으로 남원,동쪽으로 성주, 동북으로 상주와 떨어진 거리는 60~ 62Km에위치하고 있어 기습작전을 펴고 숨어들기 편한 지형이었다. 명승 제55호로 지정된 무주 구천동 일사대 일원에는 무주 구천동 33경 중 제6경인 일사대(日士臺)가 있고 고종 때의 학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고종23년에 건립한 서벽정(棲碧亭)이 있다. 송병선은 영·호남 지방의 선비들과 시론(時論)으로우국충정을 달래면서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문도를 길러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무주지역에 학풍을 일으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서벽정 입구에 들어서면 큼지막한 바위에‘무이동(武夷洞)’이라 새겨져있는데, 조선전기이이, 송익필, 최립 등의 조선 최고 문신들이 모여 시론으로서나라의 국운을 살피던 곳의 이름을 따와 지은 것으로 보여 진다. 이곳은 한말 구국의병항쟁에 있어 본격적인 의병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는 시작점이 된다. 고종42년(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10개의 개선조건을 고종임금께 올렸고 이에일본 헌병대에 의해 대전 석남촌으로 이송되었다. 상소운동이막히게 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을 한 송병선의 비보를 접한 면암 최익현 선생은 74세의 고령의 나이로 호남으로 내려와 의병전쟁의 불씨를 태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연재 송병선의 소식을 접한 무주지역의 건장한 청년 강무경은 필묵상으로 가장하여 국권회복에 뜻이 맞는 사람을 찾아 삼남지역을 누비던 중 전남 함평군에서 심남일을 만나 결의형제를 맺고,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본격적인 무력투쟁에 나섰다. 전남 일대를 누비며 연일 승전을 올리던 중 무리한 전투로 인해 쓰러져 양덕관이라는 선비의 집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양덕관의 둘째딸인 양방매와 결혼을 하게 된다. 18세 꽃다운 나이에 의병장과 혼례를 치룬 양방매는“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라는 말과 함께 남편 강무경을 따라 무력투쟁에 가담하였다. 1909년 전남 화순일원에서 대토벌작전을 벌이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910년 대구형무소에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부인양방매는 시신을 수습해 고향땅 무주군 설천면에 안장하고강무경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오다 1986년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된다. 훗날 후손들은 전북 무주군 설천면 나제통문주변 공원에 강무경 동상을 세우고 부부 의병 사적비를 세워그 뜻을 후세에 기리고 있다.


덕유산 호랑이 문태수


이렇듯 무주출신으로서 외지에 나가 구국항쟁을 펼친 인물들도 있었지만, 국립공원 덕유산을 중심으로 지역민과 함께 봉기한 인물들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문태수 의병장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문태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출신으로 면암 최익현을 서울에서 만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고 무주 덕유산으로 들어와 장수 출신 박춘실, 무주 안성 출신 전성범과 함께 일본군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무주, 장수, 금산, 진안 지역에 격문을 돌려 2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였다. 그 후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에 위치한 원통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는데 1907년 11월‘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가 설치되자 호남군 창의대장이 된다. 서울탈환을 위해 같은 해 12월 이원역, 옥천까지 점령하였으나 합류하기로 한 연합부대와 연락이 끊기고, 대규모 반격에 나선 일본군에 밀려 덕유산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후로 지하운동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전투를 200여 회에걸쳐 승전하였다.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여 신출귀몰했던 문태수 부대는 의병 투쟁을 하면서도 민가에 폐를 끼치지 않았고, 오히려 의병을 빙자해서 약탈을 일삼던 무리들을 처단하였다. 이러한 문태수는 도무지 잡히지 않았고 그로인해 덕유산 호랑이라는 별호를 얻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대대적인 의병소탕작전을 전개하는데, 덕유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의병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잠입해 들어온 일본군 헌병대를 무주구천동 삼공리에 매복하였다가 섬멸하는 전과를 세웠다, 그 후 주민들은 이 격전장에 그날을 기리는“충성을 다해 나라에 은해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백성 구했다. 나라 위한 의병대장 문태수의 비, 그 이름 온 누리에 떨치니 그 덕을 어찌 다 말하리”라는 비명을 새기고 송덕비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일본 비밀문서에는“전북 무주지방의 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과 같이 믿고, 부녀자는 부뚜막으로부터 음식을 궤로 옮길 때 처음 것을 문태수에게 제공하여 그의 성공을 기원하고”있다고 한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1911년 고향을 방문하였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1913년 옥중에서 자결로 순국했다.


항일의병, 여기에 잠들다 - 칠연의총


시위대가 강제 해산되자 신명선은 고향 무주로 들어와 황이만, 문봉호, 김원일, 홍병철, 정석마 등과 함께 창의기병을 하고 거창, 함양 등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무주 안성면 칠연계곡 화전민촌에 주둔하여 문태수 부대를 만나 연합작전을 세워 싸우기도 하였다. 안성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작전을 전개하던 중 작전계획이 일본군에 새어나가게 되고 작전전개를 위해 잠시 칠연계곡 인근에서 휴식 중이던 신명선 부대가 피습을 받아 150여 명의 의병들이 순국하게 된다. 전투에 간신히 살아남게 된 의병 문봉호가 인근 주민의 도움을 받아 유해를 수습하여 여러 곳에 안장하게 되고, 1969년 흩어진 유해를 봉분(封墳)하게 되고‘백의총(白義塚)’이라 명명하였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칠연의총’이라 했다. 우리고장 무주는 이렇듯 의병 뿐 아니라, 기미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무주군민 수천 명 이“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전일봉 등 항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우국지사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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