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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 | 특집 [연중기획]
운을 쫓는 사람들 복권방에 모이다
공간 3 - 기원의 장소 4
임주아 기자(2013-01-04 15:03:11)

눈발 날리는 주말 오후였다. 살금살금 빙판 위를 걸어 초록 간판 앞에 섰다. 쉴 새 없이 문이 닫혔다 열리는 걸보니 오늘, 토요일 맞다. 시장 도로변에 있는 열 평 남짓한 복권가게, 흔히 ‘로또방’이라 부르는 곳이다. 바(bar)처럼 생긴 긴 책상 몇 개와 낡은 컴퓨터 두 대가 놓인, 조금은 생경한 풍경이지만 복권을 사러 오는 이들에겐 없어선 안 될 쉼터다. ‘1등 2회 당첨 판매점’이라는 대문짝만한 현수막이 시선을 압도하는 벽, 그 아래엔 2002년 12월 시작한 1회 차부터 가장 최근까지 총 4000개가 넘는 숫자가 적힌 당첨번호벽보가 대학대진표처럼 빽빽이 붙어있었다. 벽보 앞으로 쪼르륵 붙어선 빵모자 쓴 세 할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득했다.

카운터에선 단골손님과 복권가게 주인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이고, 반만 사셔요. 어떻게 번 돈인데 이걸 다 사…….” 할머니가 오 만원 어치를 달라고 지폐를 내미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한사코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치를 보니, 아르바이트생이 종종 있는 일이라 일러주었다. 한 자리에 오래 가게를 하다 보니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꿰뚫는 덕에, 사정 어려운 어르신들이 한 번씩 충동구매를 할라치면 저리 말리곤 하는 것이다. 딸 같은 그 마음이 고마워 또 오고 또 오는 얼굴들이다.

저녁이 가까워오니 금세 줄이 길어졌다. 복권가게에서 배출한 유명 인사들이 속속 도착할 시간이다. 그중엔 일등당첨자도 있고 삼등만 스무 번 넘게 당첨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빵모자 할아버지 삼인방 중 한 분이 일등당첨자라는 것 아닌가. 이 가게 출신(?)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확실하다는 주인의 말을 들으니 그 후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술술 이야기를 풀었다. 로또를 처음 산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매주 한 번씩 꾸준히 로또를 사던 그는 거짓말처럼 꿈에서 일곱 개 숫자를 봤다. 아침 일찍 복권가게로 뛰어가 복권을 샀다. 며칠 뒤 그는 진짜 당첨자가 되어 나타났다(!) (드라마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현실에선 귀하게 회자되고 있었다.)

하지만 1등 치곤 초라한 금액이었다. 그 해 로또 농사는 풍년인지 흉년인지 1등이 무려 열아홉 명이나 나왔던 것.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평소 검소했던 그는, 주식투자를 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대신 그 돈으로 작은 건물을 마련했다. 당첨된 이후엔 로또를 잘 사진 않지만 가끔 로또방에 와서 친구들이 하는 ‘조합’을 지켜보며 몇 마디 거들곤 한다. “그리 계산해봤자 답 없으. 그게 로또여.”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로또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잇는다. “근데 가장 중요한 건, 현장에 오는 사람만이 천운을 쥘 수 있단 거예요. 진리는 그런 거지요.”

순간 지금껏 보고 들었던 로또에 관한 안타까운 사연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1등 번호를 쥐고도 찾으러 오지 않아 낭패를 본 사람, 문자로 자동추첨 1등 번호 받아놓고 로또를 사지 않아 당첨금을 놓친 사람, 지인에게 사 달라 부탁한 복권이 일등에 당첨돼 소송에 휘말린 사람 등 입 아프게 수두룩하지 않은가. 이 와중 주인아주머니도 한 몫 거든다. “자동으로 달래서 뽑았는데, 손님이 숫자를 훑어보더니 마음에 안 든다고 안사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냥 내가 했지. 근데 글쎄 그게 3등에 당첨됐지 뭐야 호호호호!” 옆에 앉은 몇몇 사람이 입맛을 다셨다. 정말이지 로또는 신도 모를 일이 아닌가.

일주일동안 로또복권을 품어본 사람은 안다. 희망이 얼마나 얄팍한 놈인지. 연금복권을 사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본 사람은 안다. 희망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지. 이윽고, 이 로또 한 장에 얼마나 많은 기도가 생략돼 있는지 말이다. 서로 담소도 나누고, 숫자조합도 하고, 로또카드에 한 땀 한 땀 숫자를 칠하며 소원하는. 난로 앞에 삼삼오오 모인 손을 함께 녹이며 이 겨울을 함께 나는 간이휴게소이자 대합실이자 동사무소 같은 곳. 고로 싱싱한 행운을 사려거든 복권가게로 가시라. 노래만 부르지 말고 발 디딘 곳에서 기원하시라. 현장에 있어야 행운이 따를 것이니.

(※참고로 빵모자 할아버지 두 분이 말씀하시길, 일등 될 확률은 814만5060분의 1이고, 이는 벼락 맞을 확률인 180만분의 1보다 4.5배나 많다고. 그런데 당첨된 할아버지는 그런 건 답 없고 꿈만 잘 꾸면 된단다. 그래, 새해니까 품어보자 로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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