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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 | 특집 [연중기획]
“20년 야구인생이 담겨있죠” - 전라중학교 야구단 최한림 감독
공간 - 전주종합경기장 2
이세영 편집팀장(2013-05-02 16:00:42)

전라중학교 야구단 최한림 감독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 때부터 함께했던 선수다. 이름이 그리 알려진 선수는 아니었지만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좌완 사이드암 투수’가 그다. 그는 중학교 입학 때부터 95년 쌍방울을 떠날때까지 그리고, 전라중학교 야구단 감독으로 부임한 2008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과 인연을 맺어오고 있었다. 전라중학교 야구단의 연습이 한창인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그에게 이곳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은 애증의 장소”였노라 털어놓았다.

전주 야구장과 함께 했던 20년 야구인생
그가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중학교 야구단에서 야구를 시작한 그에게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은 학교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였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에서 매일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운동을 했다. 전주고에 입학하고도 야구장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지금은 좁아 정규시합을 할 수 없을 정도인 야구장이 그 때는 커보였다. 야구장을 뛰고 또 뛰었다. 더워도 추워도 야구장에서 보내는 하루는 내일을 위한 인내의 시간이었다.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은 지금이나 학창시절이나 시설이 형편없었다. 라커룸을 대신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운동을 마치고 쉴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저 부리나케 경기장을 나가 몰래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친구들과 농담을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낡았다거나 좁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학교 운동장이 작아서 여기서 매일 연습을 했으니 여기만한 야구장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죠. 야구선수로 꿈을 키우고 실력도 키우고 결국 프로야구단에 입단했으니 꿈을 이룬 꿈의 구장이라고 할 수도 있었겠네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군상상고와 전주고의 라이벌전이 한창이었던 때였다. 군산상고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야구장 주변은 전경이 진을 쳤다. 누가 이겨도 싸움은 나기 마련이었다. 한 번은 크게 사고가 나서 양쪽 학교다 징계를 받고 난리가 났던 기억도 있었다. 가장 힘든 기억은 매를 맞는 것이었다. 경기를 지는 날이면 그 정도는 더욱 심했다. 말을 아끼는 그였지만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매 맞는 곳’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혹독했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쌍방울에 입단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선수들과 함께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군 팀이어도, 꼴찌 팀이어도 그는 마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팔도에서 선수들을 모아서 팀을 만들다보니 사투리 때문에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더라고요. 십 몇 년 선배들에게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하고 새파랗게 어린 저를 선배들도 많이 아껴줬었던 기억이 나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뭣 모르고 입단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쌍방울도 이 경기장도 저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 같네요.” 처음 프로마운드에 섰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1만도 안 되는 관중 앞이었지만 신발끈을 묶는 손이 덜덜 떨렸다. 홈 경기장에서 홈 팬들과 함께 하는 순간을 말로 표현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쌍방울에서 5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성적도 그리 좋지 못했고 고향팀을 떠나야 하는 서러움도 겪었다. “프로는 고등학교와는 전혀 달랐어요. 훈련양도 적고 누가 훈련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죠.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데 저는 그걸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몸 관리만 잘 했으면 선수생활을 더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요.”

야구의 추억이 사라진다는 아쉬움
자신의 꿈을 이어 가는 후배들에게 보이는 애정 탓이었을까, 말을 하는 중간에도 그의 눈은 경기장을 뛰는 후배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부임한 후 2년동안 전국소년체전에서 우승할 정도로 실력있는 후배들이었다. 30년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자부심과 모교에 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감독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제가 야구를 잘해서 후배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몸 관리 못해서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경험과 먼저 야구를 하면서 겪었던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해주는 거죠.” 하지만 꿈을 가지고, 프로선수를 목표로 뛰는 후배들이 연습할만한 변변한 야구시설이 없는 전주, 야속하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수 시절 뛰던 야구장보다 낡기만 했을 뿐 나아진 것이라고는 없는 이곳이 후배들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때하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여기저기 금이 가고, 전광판은 고장나고, 조명시설과 외야 잔디가 사라졌다는 것이 바뀌었다면 바뀐것이겠죠. 쌍방울이 떠나고 나서는 제대로 되는 것보다는 안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다른 야구장에 비하면 야구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인접한 익산과 군산에도 인조잔디가 있는 야구장이 있는데 전주는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도 했다. 야구장은 잡초가 자라는 관중석과 부서진 의자, 허물어질 듯 군데군데 금이 가고 녹슬어 있었다. 철거계획이 있는 터라 시설관리공단에서도 시설투자를 꺼려한다고 했다. 지금은 야구장을 쓰는 그가 관리한다고 했다. “이 낡은 야구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이 담겨 있겠어요. 프로선수가 됐던 아니던 야구에 대한 추억이 서린 이 야구장 자체가 없어진다고 하니까 서운할 뿐입니다. 옛날에 여기가 야구장이었었다고 이야기만 해줄 수 있겠네요.” 그의 바람은 시합도 가능하고 일반 시민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야구장이다. 10구단 유치 실패 이후 이렇다 할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을 보며 새로운 야구장에 대한 큰 기대는 없다. 하지만 야구장을 허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선수들이 계속 운동할 수 있는 야구장을 먼저 지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은 저를 비롯해 이곳을 거쳐 간 모든 선수들의 추억이 함께 하는 곳이었습니다. 전주가 야구의 추억을 계속 이어나가고 후배들이 마음껏 경기할 수 있고 시민과 함께 야구가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장소, 제2의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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