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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8 | 특집 [문화시평]
창조, 전통으로 가는 ‘외길’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스물둘
곽병창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2013-07-30 17:41:14)

‘숨어버린 전통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판을 열기 시작한 지 꼬박 이십이 년이 흘렀다. 90년 초반의 그 무렵에 우리는 참으로 이 지역의 전통예술이, 그 속살이 그립고 안타까웠다. 살풀이도 판소리도 산조도 과연 그 명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슬아슬하기만 했고 살아있는 명인들의 존재는 그만큼 귀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문화저널이 펼쳐보인 ‘전라도의춤, 전라도의 가락’은 그야말로 칠년 가뭄에 물 만난 듯한 기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전라도에서 전라도의 춤과 가락은 더 이상 그립고 아쉬운 존재가 아니다. 마당이 애지중지 키워온 이프로그램이 ‘전통’의 울타리를 은연중에 넓히려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즐거운 역설이다. ‘전통’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전통인가? 이 오래된 고민에 글로 답하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그래서 이번 공연의 레퍼토리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공연은 그 동안의 기록에 비추어볼 때 가장 파격적인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경계를 지어서 이야기하자면 전통 보존형 레퍼토리와 퓨젼형 레퍼토리의 비중이 처음으로 역전된 셈이다. 동일한 재료로도 참신한 공연 성과 낼 수 있어 두 가지 측면에서 이번 공연을 바라보려 한다. 첫째, 전통예술을 둘러싼 환경이 처음과는 참 많이 달라진 시점에서 공연 형식의 변화를 위한 주최 측의 이런 시도는 타당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이 오랫동안 지향해온 바에 대한 경의 때문이다. 혹시, 모셔야할 전통의 명인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자칫 재탕 삼탕의 레퍼토리로 채울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연예술의 아우라는 자주 반복해서 공연한다고 해서 지루해지거나 훼손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해를 거듭할 수록 그 시간의 깊이가 더해져서 이전의 것과 다른 새 기운을 드러낼 수도 있다. 거기에 무대연출 기법을 어떻게 달리하느냐에 따라서는 동일한 재료들로도 얼마든지 참신한 공연 성과를 낼 수 있다. 굳이 재료부터 바꿔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또, 여전히 그 오래되고 온전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매진하는 후예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전라도 구석구석의 전통공연예술을 충실히 담아내온 이 프로그램의 고유한 정체성은 지켜졌으면 좋겠다.


아슬아슬 전통을 뛰어넘는 일
자, 이제 두 번째로 이번 공연의 예술적 성과를 논할 차례이다. 전통의 경계를 넘어 미래를 창조하는 일은 짜릿하고 아슬아슬하지만 때로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뒤집어 말하면 뉘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일은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매우 재미있고 짜릿한 시도이다. 이번 공연은 그 중 어느 쪽일까? 새로운 것들의 ‘오늘’과 오래 된 것들의 ‘내일’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겠다는 슬로건까지 곁들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은영의 산조는 내면의 불길을 꼼꼼히 감싼, 잘 차려입은 정장을 연상하게 한다. 그 단단하고 깊은 해석과 화려함을 억누르는 연주법은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의 굳은 길과 잘 어울린다. 거기에 소리판의 선비 윤진철이 또드락 또드락 뒤따라가는 장고 소리 또한 연주자의 취향과 잘 어우러진다. 넘치지 않게, 그러나 빈틈없이 꽉 찬 소리의 사막길을 걷는 낙타와 수행자의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경의 그림은 동어반복이다. 이미 그려져 있는 소리의 그림에 너무 친절하게 덧칠하고 있는, ‘의도의 과잉’이다. ‘심봉사 황성 가는 대목’은 매우 재미있는 대목이다. 사고무친의 심봉사가 사기꾼 황봉사와 뺑파의 계략에 휘말려 곤경에 처한다. 원통절통할 일이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차가운 시냇물에 툼벙 툼벙 씻고 난 뒤에 ‘에이 시원하고 장히좋다!’ 외친다. 한과 신명의 역설적 미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이 대목을 박지윤 명창은 단정하고 편안한 소리로 능란하게 표현했다. 목구성이 당차고 상, 하청 소리의 고개를 넘나드는 품이 편안하다. 하지만 역시 언제나 그렇듯이 연지홀의 위압적인 공간은 관객들을 너무 점잖게 만들어버린다. 공소(空所)가 없어져버린 소리판은 소리꾼도 참 아쉬워한다. 동남풍의 타악은 이제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붙들기엔 너무 웅장하다. 흡사 적진에 뛰어든 전사들 같은 몸짓의 이들이 운우풍뢰의 휘몰이로 판을 몰아칠 때면 객석은 박수조차 칠 수 없이 멍한 지경에 이르곤 한다. 연주자들 스스로도 원시적 타악의 본질에 거의 되돌아가서 접신(trance)의 ‘들림’을 겪는 표정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무대용으로 재편되어 탄생한 사물놀이의 극단적 진보를 보여준다. 조상훈의 동남풍은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과 함께 성장해온 우리 지역의 대표적 예술 단체이다. 비보이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의 자랑과 걱정이 교차한다. 영원히 안 늙어야 할 텐데-. 아마도 악기를 세상에서 제일 빠르고 길게 치는 타악 연주팀이 아닐까 싶지만, 그것만으로 영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마실의 ‘The Road'는 이슬을 털고 발목을 적시며 걷는 새벽 논두렁길을 생각나게 했다. 피치카토로 뜯는 첼로의 경쾌함이 국악기들과 쉽게 어울린다. 해금은 좀 더 낭창낭창 나부껴도 좋을 듯했고, 피리나 소금 등 관악기 몇 대가 곁들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나라와 도라지 타령의 리듬 쪼개기는 익숙한 선율을 이리저리 변주해내는 재미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백은선과 안태상은 오래 전부터 새로운 음악세계를 함께 동경하고 추구해온 연주자들이다. 한국의 현과 서양의 현, 우리 현악의 새로운 자화상을 듣는 자리였다. 익숙한 그림이었지만 어딘지 낯설고 새로운 조합, 특히 스카보로우의 추억은 많은 중년 관객들에게 청춘의 음악다방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한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두 사람의 호흡과 열정이 모두에게 익숙한 선율을 타고 주거니 받거니 논다. 보헤미안의 느린 발길이라 할 만하다. 자신들만의 곡을 더 많이 연주하는 날을 기다린다. 스타피쉬는 그 자체로 성장잠재력을 충분히 지닌 밴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명의 보컬을 포함한 연주자들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했고 유연하였다. 다만 ‘사랑가’와 수궁가의 ‘함께 가자’ 대목을 변주한 두 곡은 타악과 전자음악의 음량에 가사가 묻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주자와 소리꾼의 밀고 당기는 호흡이 좀 더 세심하게 계산되면 좋겠다. 다음 무대에서는 소리꾼 이용선의 서늘한 성음과 다재다능한 무대 매너가 제대로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창조, 내일의 전통으로 나아가는 외길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문제는 보존과 퓨젼의 경계 또는 비중이 아니라 공연 자체의 예술적 완성도이다. 대중의 일시적 환호에 매몰되지 않고 공연자 스스로의 세상을 보는 눈, 자신의 예술행위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 당대의 청관중들과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 거기에 예술적 숙성을 위한 수련 과정 등이 어우러질 때 예술적 완성도를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지금의 ‘창조’가 내일의 전통으로 나아가는 외길인 것이다. (사)마당의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은 이미, 주기적으로 반복 재생되는 사회적 행위로서의 ‘문화적 공연(cultural performance)’*이다. 이제 이 공연이 한 단체의 업적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이 지역과 지역민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유지하는 장치가 되어간다는 뜻이다. 그 역할 갈수록 더욱 든든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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