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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 | 특집 [저널의 눈]
없어지고 허물어지고… 갑오년, 그 역사적 현장의 비극
이세영 편집팀장(2014-08-01 17:22:31)

1894,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에 모인 천 여 명의 농민들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시작은 신임군수의 학정이었지만, 봉건제도를 부수고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자는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한국의 근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의 일대 사건이자, 우리역사상 최초의 민족운동이며 최대의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가진 자주 민주 평등 평화 상생 인권의 가치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엄혹한 현 시점에서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2갑자인 올해, 마당 <백제기행>은 120년 전 그날의 함성을 따라 전북지역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탐방했다. 전북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전국의 유적지 354곳의 43%인 156곳이지만 현장에서 만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의 관리는 엉망이었다. 특히 김제의 동학 유적지는 관리상태가 최악이었다. 김덕명 추모비는 마을 촌로에 의해 관리고 있었고, 농민군의 무덤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사라지고 있으며, 원평 집강소는 지붕이 허물어진 채 방치돼 있었다. 또 많은 유적들이 이렇다 할 기념문이나 안내표지판 하나 없어 유적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한 관리의 부실은 곧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이다. 더불어 콘텐츠가 주요한 문화자원으로 개발돼야 할 때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동학농민혁명의 자산을 보유하고도 활용하지 못하는 있는 꼴이다. 더 이상 사라지고 잊히기 전에 우리의 문화자산인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보존할 지혜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김덕명 추모비와 농민군 무덤

김제시 금산명 용계리 원평마을에는 동학의 금구 대접주 김덕명의 추모비가 있다. 이 비는 80년대 중반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추모비 뒤편에는 당시 희생된 동학농민혁명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각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따라 가면 작은 언덕 구미란전투 당시 전사한 수백명의 농민군을 묻었다는 무덤들이 남아 있다.

김덕명은 동학농민혁명의 세 거두인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못지않게 혁명의 시작부터 끝까지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전봉준의 친위군을 이끈 김덕명은 이곳 원평을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현재 원평에는 추모비 하나만이 그를 기억하는 전부다. 관에서 한 일이라고는 추모각을 올라가는 길에 세운 안내판이 전부다. 김덕명의 추보비 바로 옆에 기거하는 촌로가 이 비와 추모각을 관리할 뿐, 도움의 손길은 전무한 형편이다. 이 지역에는 김덕명의 추모비 외에도 원평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추모비가 함께 위치해 있으나 이를 기념하고 기리는 사업은 전무하다. 



원평 구미란 전투 터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일대 소나무 숲 사이에는 무명농민군들의 작은 봉분들이 수십기 남아 있다. 이곳 구미란은 우금티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결전을 벌였던 곳이다. 우수한 화력을 가진 연합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던 농민군은 이곳에서 다시 패배의 쓴 잔을 마신다.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전투지인 이곳 구미란에는 수십기의 무덤이 남아 그 당시의 억울한 죽음과 패배의 잔상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없으면 구미란 유적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구미란 전투터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고사하고 장소를 알려주는 안내판조차 없고 농민군의 무덤들도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 다시 찾은 농민군의 무덤 위로 나무가 쓰러져 있고,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2008년 창립한 유족회가 관심을 가지고 나무 말뚝에 숫자를 써 18개의 무덤을 표시하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원평집회 터 

이곳은 1893년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집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열리고 있을 때, 호남지방 동학지도자들이 중심이 된 금구·원평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이 집회는 전봉준이 중심이 되었고 손화중도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교조의 신원을 위해 계획된 보은집회와는 달리 금구·원평집회에서는 ‘척왜양’ 등의 기치가 전면에 내걸린 정치집회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이전 역사인 원평집회 터에는 아무런 안내나 기념물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원평집강소 터 

동학농민군은 1894년 4월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성을 점령했다. 전주점령은 농민군이 거두 최대의 성과 중 하나다. 이를 계기로 주민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전라감영 선화당을 비롯해 전북 내에 53개 세워진다. 

김제시 금산명 원평리에 위치한 원평집강소는 김덕명 장군의 도회소로 전봉준 장군이 군수물자를 비축하며 2차봉기를 준비하던 곳이다. 또 전주화약 기간 동안 전라도 곳곳을 돌던 전봉준 장군이 휴식을 취하고 논의를 하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원평집강소의 상량문에는 ‘광서 8년 임오 3월20일’이라는 글씨가 두렷이 남아 있고, 당시의 형태를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이곳 원평집강소는 전주화약기간 세워졌던 53개 집강소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또한 오늘날 남아 있는 유일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여서 보존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는 아무도 기거하지 않은 폐가로 방치되고 있었다. 지붕한쪽이 심하게 무너져 더 이상 방치할 경우 형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원평집강소 붕괴에 대한 관계자들의 성토와 도내 언론들의 보도에 지난 6월 보수를 위한 절차를 밟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김제시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사례라 할 만하다. 소설가 이광재 씨는 “동학혁명과 전봉준의 생에서 정읍 고창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 원평이지만 김제시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중요한 사적지를 방치하고 있다”며 원평 지역 유적지의 방치와 무관심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고부관아 터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늘날 고부는 정읍에 딸린 면으로 작아졌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정읍보다 큰 고을이었다. 고을의 물산이 풍부했던 만큼 관리들의 탐학은 극에 달해 오히려 주민의 고달픔은 컸다. 

그래서 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는 고부농민봉기의 중심 지역이었다.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위치한 고부관아는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표상으로 고부봉기 때 농민군에 의해 점령된 곳이다. 하지만 현재, 고부관아는 고부초등학교가 자리하며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자, 농민군에 의해 두 차례나 점령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안내문조차 없어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었다.


황토재 전적지

황토재는 현재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35미터의 낮은 구릉지다. 이곳에서 1894년 4월 7일(음력)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황토재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군대와 맞서 승전을 거둔 현장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곳 황토재 마루에 서 있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1963년 세워진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탑이라는 의미도 있다. 전북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관리사업소에서 관리하고 있는 이곳은 전봉준장군 동상과 사당, 기념관, 광장, 주차장 등이 갖춰져 있고, 2004년에는 기존의 기념관을 대체하는 국내최대의 동학농민혁명관련 전시관과 교육관을 개관, 운영 중에 있다. 

정읍과 백산의 동학사적지는 타 지역에 비해 잘 정비돼 있어 찾는 이들의 발길도 많은 편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인식도 높아 이를 활용하려는 정읍시의 의지도 높다. 하지만 황토재 전적지에서 마땅한 해설을 들을 수 없다면 기념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 오래된 기념물들 중심으로 재현된 현장은 당시의 시대상과 현장감을 상상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어 아쉽다.  


김개남 고택 터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군의 3대 지도자였던 김개남의 고택 터가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에 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서 김개남 장군의 고택터는 수많은 농민군이 밥을 지어먹고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만 남기고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안내문이 있어 이곳이 고택 터임을 알아볼 뿐 밭으로 변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전봉준 장군 체포 장소

전봉준 장군의 유적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고 복원된 곳도 적지 않다. 순창 쌍치면 금성리에는 2005년 전봉준 장군 피체지 전시관이 있다. 하지만 전시관의 관리는 안되는 듯하다. 덩그러니 지어진 한 채의 집에 역사적 사실도 다르고 내용과 동떨어진 사진이 붙어있기도 했다. 체포장소도 관리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여서 먼지가 쌓인 채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삼례봉기 기념비

청·일전쟁의 승리를 이용하여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1894년 9월(음력) 동학농민군은 삼례에서 척왜양창의 기치 아래 2차 봉기한다. 한일의병의 시발점이며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번져나간 기점이 되었던 삼례봉기는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 넘게 기념사업이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1996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삼례입구 찰방다리 부근 도로변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를 건립하여 이 지역 기념사업의 단초를 열어 놓는다. 

삼례봉기를 기념하는 이 기념비는 큰 도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관리되지 않고 무성하게 자란 주목으로 찾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인근 주민들에게 물어도 기념비의 존재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방치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울타리는 무너지고 없느니만 못한 기념비가 삼례봉기의 의미마저 퇴색시키고 있는 듯해 안타깝기만 했다.


용머리고개와 완산칠봉 전투지

동학농민군은 원평·삼천을 거쳐 용머리고개로 지나 전주성에 입성한다. 용머리 고개는 전주 진입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지만 도로가 나며 원래 자취가 상당히 훼손됐다. 또 동학농민혁명과 연상시킬 기념물이나 안내문이 없어 용머리고개가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인지 알아보는 이도 없다. 

완산칠봉 전투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격전지 중 하나다. 전주성을 둘러싼 관군과 농민군의 전투는 크게 세 차례 전개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전투에서 관군은 완산칠봉에 진을 쳤고, 농민군은 화력의 열세와 지형적인 불리함을 안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관군의 대포 공격이 얼마나 무차별하게 진행됐는지 전주성뿐만 아니라 경기전까지 훼손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의 구체적인 전투양상은 밝히지 못하고 있어 연구화 고증을 통해 완산칠봉 전투지를 알리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최근 발견된 일본 방위청의 자료에 의해 완산칠봉에 동학농민군의 집단매장이 이뤄진 사실이 드러나 현장 확인과 발굴이 필요해 보인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관련된 유일한 기념물인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는 1991년 8월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가 전주 완산 체육공원 내에 세웠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시민들의 공감 없이 세워져 전주성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전주입성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전주성곽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주입성비의 존재를 아는 이도 매우 드물다. 보고 상기하는 기념물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주입성비의 위치를 옮겨 시민들의 발길이 쉽게 닿도록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 동서남북문의 표지석에 농민군의 활동, 전주성 점령 등을 기록이 없었고 전라감영지, 초록바위 등 상당부분의 유적지가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위치하거나 적절한 설명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장군의 동상은 동학농민혁명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덕진공원에 모여 있어 전주가 동학농민혁명의 주요한 사적지임을 알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동학혁명기념관

한옥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은 1995년 천도교에서 국고보조금과 각계성금으로, 지하 1층 지상3층의 연건평 270평 규모로 건립되었다. 2층 전시실에는 서지학자인 이종학씨가 기증한 동학농민혁명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진·서책·문서 등 총 400여점에 이른다. 하지만 현재 2층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전시물과 시설들은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노후화돼 있고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빛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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