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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 | 특집 [백제기행]
근현대를 거닐다, 예술을 사고 팔다
문동환(2015-03-03 16:19:04)

기행은 말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지만 기분 좋은 긴장을 자아내기도 한다. 나들이나 소풍이 달달한 라떼 같다면, 기행은 정성 들여 덖어내고 우려낸 차 한 잔을 나누는 느낌 쯤 될 것이다. 이번 광주행 백제기행도 그랬다. 전날 밤, 아내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못 차분해지는 것이, 정갈한 다식 하나 곁들인 찻상을 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부부지간이라지만 기행을 앞두고 차오르는 내밀한 감정쯤은 오직 나만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듯싶었다.

기행코스는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과 대인예술시장 두 곳이었다. 양림동(楊林洞)은 동네 이름처럼 버드나무가 지천에 널렸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양림동은 호랑가시나무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일단 양림동에 가면 높지 않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여기저기에 호랑가시나무가 군락을 이룬 채 자생하고 있다. 수령 400년을 넘긴 키 큰 호랑가시나무부터 키 작은 것까지, 발길 옮기는 곳마다 호랑가시나무를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이 호랑가시나무가 예수의 가시관, 핏방울,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예수의 나무’로 불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양림동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시간의 기억이 존재하는 곳, 양림동

양림동에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선교활동과 그 숭고한 시간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있다. 그래서 한국 선교사(史)를 톺아볼 때 양림동을 빼놓고 얘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성자로 불릴 만큼 헌신으로 일관했던 쉐핑(서서평 선교사)과 윌슨, 유진 벨, 오웬, 그리고 소록도 자애원과 여수 애향원 설립을 주도했던 포사이트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터를 잡거나 양림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교육과 의료선교에 힘썼지만 정작 자신들은 청빈하다 못해 궁핍한 삶을 선택했던 숭고함, 호랑가시나무를 보며 그 뜻을 헤아려보려고 했던 건 어쩌면 섣부른 상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흐린 하늘 아래서도 양림동 언덕이 빛나 보였던 것은 100년 전 푸른 눈 이방인들의 고결한 정신이 양림동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림동은 시간의 기억이 존재하는 곳이다. 오웬 기념각과 윌슨 선교사의 사택, 유진벨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커티스메모리얼홀, 윈스보로우홀 등 외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근대 서양건축물들은 양림동 풍경의 일부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 된다. 각각의 건축물은 양림동 언덕의 풍경과 한 치의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 채, 적벽돌 사이사이에 시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것은 다 아름답다’는 어느 건축가의 역설은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특히, 윈스보로우홀은 아직도 수피아여중의 교육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운동장을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고건축의 단촐한 기풍이 압권이다. 시간의 기억을 품고 있는 고풍스런 건축물을 일상적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쁨을 학생들이 알지 모르겠다.


양림동의 어제와 오늘을 잇는 건 언덕 위의 적벽돌 건축만이 아니다. 양림동 언덕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천변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이장우 가옥과 마주치게 된다.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는 게 위압적인 솟을대문이라서 첫 대면은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마당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보면 위압감은 온 데 간 데 없다. 오래된 것의 힘이란 이런 데 있는 게 아닐까. 반가웠던 것은 바로 이 고택에서 전주에서도 활동했던 다음 김창덕 선생이 윤회매(輪回梅)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공간의 역사는 그렇게 질기디 질긴 인연처럼 시간을 타고 이어지는 것이다.

양림동을 떠난 기행팀은 메밀면으로 유명한 맛집에 들러 허기를 채운 뒤 초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대인예술시장으로 향했다. 대인시장은 요즘, 시쳇말로 가장 ‘핫(hot) 한’ 야시장이어서 세간에서는 대인야시장으로 통하기 십상이다. 때문에 시장 초입에 이르기 전부터 왁자지껄한 야시장 풍경을 기대하던 터였지만, 헛된 수고를 하는 건 아닐지 내심 걱정도 있었다.

 

사람 '이 곧 풍경' 대인예술야시장

그런데 쓸 데 없는 기우였다. 야시장 구석구석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각종 수공예품과 소소한 물목을 가지고 파는 셀러(seller)들, 적당한 목을 차지하고 연주하는 인디밴드, 간이 탁자에 둘러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야시장 내 전시를 관람하는 방문객들이 뒤엉켰다. 시장은 곧 사람이 풍경이라는데 대인시장이 딱 그 격이었다.

 

기행팀을 위해 바쁜 시간을 내어준 대인예술시장 별장프로젝트의 정삼조 총감독은 대인예술시장의 세 가지 키워드를 예술과 예술가, 자발성으로 정리하면서, 이 세 가지 키워드 때문에 대인시장이 쉽게 카피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행정기관이 획일적으로 주도해서 나올 수 있는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인예술시장은 공공의 지원을 받기 이전부터 예술이 지향하는 가치와 상인들의 이해관계가 양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는 고민과 노력을 이어왔다. 그래서 정감독이 언급한 세 가지 키워드는 대인시장을 예술시장으로 또는 야시장으로 카피하기 위해서는 그간 대인시장에 녹아든 예술가, 활동가, 그리고 상인들의 부단한 노력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경고쯤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잘 나가는’ 시장이라고 해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화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 오는 전남 광주의 지역적 특성이 쇠락해가는 대인시장 활성화를 이끌었지만,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시장을 점거하다시피 입주해있던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지하공간과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1년 임대료가 고작 30만원이었던 것이 지금은 월 20만원 수준이라고 하니 가난한 예술가에게는 이마저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프로젝트 팀이 공공건물 확보에 힘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까닥하다가는 예술(가) 없는 대인예술시장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공공건물 확보가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왠지 정감독을 중심으로 한 이곳 사람들은 꼭 해낼 것만 같다. 1959년 공설시장으로 출발해 급격한 쇠락에 직면한 이후,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술과 예술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장통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대인예술시장의 회장인데 예술을 몰라서야 쓰겠냐며, 문예창작도로서 만학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하는 상인회 회장님만 봐도 대인시장에서 예술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초행이라면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통은 미로처럼 보이기 일쑤다. 아내와 한창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중 결국 집결지를 향해 세워두었던 촉을 잃고 말았다. 둘 다 무던한 성격이어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만져보고 물어보고 맛보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이곳에서 내 이름을 호명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친한 후배내외가 대인시장 구경길에 나섰더란다. 그것도 시장통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던한 바에서 음료를 즐기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나니 반가움은 더할 수밖에 없다. 후배 성화에 못 이겨 잠시 동석한 우리는 술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곧 임실 필봉으로 이동해서 대보름굿을 볼 요량이라고 하는데 기행팀을 배신하고픈 유혹이 드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행길에서 뜻하지 않게 지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족하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버스에 오르려니 빗발이 굵어져 있다. 임차한 관광버스 안은 어두컴컴했다. 눈을 감고, 묘하게 섞인 채 뒹굴고 있는 어젯밤의 설렘과 양림동 고유의 정취, 그리고 활어같은 대인시장의 역동성을 잠시 복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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