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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 특집 [오래된 가게]
대대로 이름의 가치를 새기는 일
송미애(2016-01-15 09:40:18)

 

 

 

 

이제는 100년이 훌쩍 넘어버린 우리의 근대문화가 아직 공존하는 곳, 군산을 찾는 여행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세워졌던 건축물들을 직접 보며 역사적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의 이유가 되겠지만, 지금까지도 대를 이으며 운영되고 있는 가게들이 '내 어릴적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도장집'은 <일도당>
과거 시청, 법원 등의 관공서와 주요 사업체들, 그리고 큰 학교들까지 거의 모든 것이 밀집되어있었던 군산의 구도심. 그 당시 성행했던 가게들이 현재는 대부분 새로운 도심으로 함께 이동했지만, 관공서의 직인에서부터 일반인의 도장까지 독보적인 솜씨로 군산의 도장을 도맡아 제작했던 '일도당'이 아직 구도심을 지키고 있다.

 

"20대셨던 아버지가 처음 일도당을 시작했던 곳은 옛 군산 경찰서 인근이었어요. 그 후 1997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지요. 예전에는 여기가 군산의 중심지였어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알려진 이성당이 자리한 군산의 중앙로. 그 중앙로 길을 조금 따라가다 보니 전면 유리에 크게 그려진 도장 두 개가 눈에 띈다. 탕 위에 연기가 세 개 올라가면 목욕탕임을 알았던 것처럼 누가 봐도 '도장집'이다.

 

"일제 때부터 있던 제과점이 해방 후 이성당이란 이름으로 바뀔 때 즈음 일도당도 있었으니 얼핏 시기가 비슷할 거에요. 아버지께서 도장일 하신 건 그 이전이니 가업의 시작은 좀 더 오래전인 셈이지요."

 

1943년 개업, 3대에 이르는 세월
글씨와 조각에 탁월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고(故)손인기씨(1921년생). 10대 후반부터 도장일을 시작했던 그는 만주 하얼빈에서 몇 년간 일을 이어가다 1943년 군산에 일도당을 차렸고, 4남 2녀 중 셋째인 손남석씨(60)가 가업을 이어 함께 하는데도, 80이 넘을 때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아버지께 이 일을 배워서 한지가 40년이 되어가지만, 아버지의 솜씨를 따라가라면 아직 멀었어요. 글씨체, 조각 솜씨, 성품..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분이셨죠. 사실 3년 전 폭우로 가게가 물에 잠기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어요. 금전적인 손실도 컸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아버지의 도구들과 오래된 기계들을 그 때 다 잃었던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그래도 높은 곳에 있었던 이 자료가 남았으니 참 다행이죠."

 

주문 받았던 도장들은 손님들에게 드렸으니 없어졌지만, 종이에 깨끗하게 찍어진 도장의 흔적들은 다행히 파일 속에 남았다. 전화번호의 앞자리가 한자리에서 두자리로 변해가는 것도 신기하고, 수제 초코파이로 유명한 전주 풍년제과의 옛 도장도 눈에 띈다. 경찰서 로고가 그려진 도장, 알파벳이 아닌 한글로 영어 이름을 써 놓은 도장, 어린 시절 공책에 꼭 받아야 했던 '참 잘했어요' 고무인... 한 장 한 장 넘겨 보다보니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옛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른이 되어야만 만져볼 수 있을 것 같았던 부모님의 도장은 항상 집 안 서랍 속에 소중히 숨겨져 있었다. 빨간 색 인주를 묻혀 찍어낸 모양을 유심히 보고 또 봐도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던 이름 세 글자. 그 글씨체에는 왠지 모를 신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 처음 가져봤던 내 도장.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한글이 아닌 한자를 선택했던 기억도 난다.  

굳이 도장이 없어도 사인(sign)이면 많은 것이 대체 가능하고, 이름만 알려주면 컴퓨터가 몇 분내에 도장하나쯤 뚝딱 만들어내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내 이름을 새겨 넣은 이 조그만 물건에 묘한 애정을 갖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군산 지역 대부분의 도장을 일도당에서 맡아 하다보니, 손님들 중 성공하신 분들이 워낙 많았어요. 그 집에서 직인을 만들어야 사업체가 성공하고, 청첩장을 맡긴 부부는 잘 산다라는 소문이 허풍이 아닌 때였죠.(웃음) 지금도 손님들에게 농담인 듯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만큼 도장에 정성을 쏟기 때문이에요. 우리 집도 시대 흐름에 따라 컴퓨터로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클릭 몇 번이면 만들어지는 도장과 수제로 만드는 도장은 확연히 달라요. 정성이 그 만큼 들어가니 다를 수밖에 없지요. 요즘에도 중요한 인감이나 회사의 직인 등은 꼭 우리가게에서 수제로 제작을 맡기시는 손님들이 있어요. 짧아야 하루 보통 몇 일이 걸리는 작업인데도, 그 일이 여전히 너무 좋은 것을 보면 이 일이 제게는 천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목공과 서체의 결합, 도장
 컴퓨터가 점점 우리의 기록 문화를 장악하면서 사실 우리는 각자의 '글씨체'를 잃어가고 있다. 과거 뛰어난 글씨체를 갖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었던 도장작업. 단아하면서도 힘 있는 도장 속 글자들과 정교하게 조각된 도장을 보면 기술이 예술이고, 예술이 기술임을 느끼게 한다.

 

"아버지께 기술을 배워 간 제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저 역시 그들도 똑같은 과정으로 하나하나 배워야 했어요. 도장의 손잡이를 만드는 목공일부터, 거꾸로 쓰는 글씨체를 익히는 일, 활자판을 만드는 일, 사포로 도장의 면을 반듯하게 하는 일 등 도장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익혀야 하는 기술들이 많죠. 도장집에서 인쇄일을 같이 하는 것이 연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에요. 인쇄 활자 하나하나가 각각의 도장인 셈이거든요. 
당시 아버님의 글씨체는 다른 지역 인쇄집에서 찾아와 받아갈 정도로 인정을 받았지요. 저 외에도 가족들이 미술, 건축 등의 분야에서 일하고 계신 것을 보면 다들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이름의 가치를 새기는 일
손남석 씨의 아들 손정배씨(33) 역시 아버지의 일을 이어가기로 마음먹고, 현 법원이 있는 조촌동에 또 하나의 일도당을 열었다고 한다. 손남석씨의 아내 이은자(58)씨의 말에 의하면 시아버지, 남편 아들까지 세 명의 남자가 성품이며 손재주가 똑 닮았다고 하니, 앞으로 젊은 세대로서의 수제도장작업 또한 기대해볼만 하겠다.  

 

"아들은 이제 시작 단계에요. 한참을 배워야 하죠. 저두 아버지께 이 일을 오래도록 배우면서 힘든 시기도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 기술을 알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삽니다. 퇴직 없이 평생 자랑스럽게,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몸의 기능이 허락하는 한 평생 이 일을 하고 싶은 게 제 소원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수제도장들처럼 화려하게 치장하진 않았지만, 글씨체에 담긴 솜씨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일도당의 도장. 정성 가득한 도장을 찾는 많은 이들의 곁에  오래도록 남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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